‹ 목록으로 하필 악역 황녀의 기사라니

1화

겨울이 깊어지면 황궁의 북쪽, 동뢰궁 담장 아래로는 눈이 유난히 오래 쌓였는데, 그 안에 누가 사는지 아는 이들조차 그 담을 눈여겨보는 법이 없었다는 것이 이 구역의 오랜 관습이었다. 궁인들은 이 담장 근처를 지날 때마다 걸음을 서두르며 고개를 숙였고, 그 이유를 물으면 다들 비슷한 대답을 했다 — 저 안에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소문이며, 소문이란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옮는 법이라고. 그렇게 칠 년이었다. 전 황제의 셋째 딸이자 제1황녀 황서린이 이 담장 안에서 스물의 나이를 다 채운 것도, 그녀를 기억하는 이들의 얼굴에서 동정과 경멸이 뒤섞인 표정이 사라지지 않은 것도. 황서린이 어릴 적부터 백성의 삶을 살피는 개혁안을 손수 작성해 조정에 올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었다. 그 개혁안이 지지 세력을 얻지 못한 채 정적들의 손에 짓밟히고, 그녀가 그 실패의 책임을 대신 짊어진 채 동뢰궁에 유폐되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것은 오직 '불쌍한 악역 황녀'라는 낙인뿐이었는데, 그녀 자신조차 이제는 그 말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다른 누군가를 가리키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 되어 있었다. 강도현이 그녀의 종자로 배속된 지는 반년이 조금 넘었다. 근위기사단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으로 '흉전사'라는 별명을 얻었으면서 하필 아무도 원치 않는 자리에 스스로 지원했다는 사실을 두고 궁 안에서는 온갖 억측이 돌았지만, 강도현은 그런 소문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에게는 다른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생에 그가 수백 시간을 들여 플레이했던 게임 '황실전기' 속에서, 이 황궁과 이 인물들이 어떤 결말을 향해 걸어가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 게임 속에서 황서린은 모든 분기에서 죽는, 그저 성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치로만 쓰이던 조연이었다는 사실도.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강도현은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화면 속 텍스트 몇 줄로 소비되던 존재가, 지금 눈앞에서 붉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황금색 눈은 항상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했는데, 그것이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인지 이미 포기해버린 자의 무감각인지 강도현으로서는 쉽게 구분할 수 없었다. 그날 아침, 강도현은 궁내부 서고에서 밤새 뒤진 낡은 법전 한 권을 손에 들고 동뢰궁으로 향했다. 손끝이 먹물로 얼룩져 있었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그의 걸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문턱에서 예를 갖추며 말하자, 황서린은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또 뭘 찾아온 것이냐." 그 말투에는 기대도 실망도 담겨 있지 않았는데, 강도현은 그것이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왔는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전하를 이 궁에 묶어둔 근거가 실은 삼십 년 전 개정된 궁규의 오기(誤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강도현이 법전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당시 황실전범을 필사하던 서기가 '황통 계승권자'와 '황통 계승 예정자'를 혼동해 한 줄을 잘못 옮겼고, 그 오기가 지금까지 정정되지 않은 채 전하의 유폐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여왔습니다." 황서린이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는데, 그것이 놀라움인지 의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걸 어떻게 알아냈지." 그녀가 묻자 강도현은 짧게 웃었다. "제가 좀 이런 걸 잘 찾습니다." 사실은 게임 속 사이드 퀘스트 텍스트에서 본 정보였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강도현은 곧바로 궁내부 대신에게 정식 서한을 올렸다. 오기를 정정하고 전하의 궁 밖 출입을 즉시 허하라는 내용이었는데, 법적 근거가 명확한 이상 대신들도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결재가 내려오던 순간, 황서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칠 년 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 문이 열린다는 감각. 동뢰궁의 문이 열리고 황서린이 처음으로 그 담장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궁의 정원에는 낮게 깔린 겨울 안개가 걷히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는데, 그 표정이 너무나 담담해서 강도현은 오히려 가슴이 저릿해졌다. 이것이 해방이라면, 왜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보다 두려움이 먼저 스치는 것일까. 그 물음에 답이 채 나오기도 전에, 정원 저편에서 갑옷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한 무리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앞장선 자의 갑주에는 서천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고, 그 뒤로 따르는 병사들의 창끝이 겨울빛을 받아 차갑게 번뜩였다. "황서린 전하." 앞장선 자가 예를 갖추는 척하며 말했으나, 그 목소리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침 잘되었습니다, 지금 막 전하를 찾아 나설 참이었거든요." 그의 말투에 담긴 함의를 강도현이 놓칠 리 없었다. 자유를 얻은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굴레가 이미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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