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하필 악역 황녀의 기사라니

5화

조은채의 질문이 회의장 복도의 찬 공기 속에 그대로 걸려 있는 동안, 강도현은 대답을 고르느라 잠시 침묵했다. 복도 창밖으로는 첫눈이 그치고 남은 잔설이 회랑 기둥마다 얇게 덮여 있었고, 그 서늘한 빛이 조은채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침묵이 조은채에게는 또 다른 의심의 근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원래 사람을 판단할 때 표정보다 침묵의 길이를 먼저 재는 버릇이 있었는데, 사법가의 후계자로서 훈련받은 습성이었다. "지키려는 것 맞습니다." 강도현이 짧게 답했지만, 그 말이 조은채의 경계심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아무 대가 없이 누군가를 지킨다는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겁니까." 그녀가 되물었는데, 그 어투에는 냉소가 섞여 있었으나 그 냉소 뒤에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얼굴이 숨어 있었다. 마치 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확인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강도현은 그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도 그녀를 완전히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원작 게임의 지식을 가진 전생자이며, 이 세계가 사실은 자신이 수백 시간을 들여 플레이했던 텍스트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조은채는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고, 미친 사람보다는 흉전사로 남는 쪽이 차라리 유리했다.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제가 지금 하는 일이 결과로 증명될 테니까요." 그 말에 조은채는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물었다. "결과라는 게 얼마나 걸릴 결과입니까. 누군가 또 죽고 나서야 증명되는 결과라면, 그건 증명이 아니라 변명이겠지요."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강도현은 대답하지 못했고, 결국 조은채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 뒷모습에서 강도현은 그녀가 완전히 그를 믿지도,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믿음과 의심 사이, 그 좁은 틈이 지금 그가 서 있는 자리였다. 조은채가 그렇게 강도현을 경계하게 된 데에는 그녀만의 사정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백작가의 사법적 소임을 이어받을 후계자로 자라온 그녀는, 증거와 소문을 구분하는 훈련을 받아왔음에도 유독 '흉전사'라는 이름 앞에서는 그 훈련이 무력해지는 것을 느꼈다. 강도현이 기사학교 시절 장태오를 스무 번 넘게 이겼다는 소문이 처음 궁에 퍼졌을 때, 그녀는 그것을 대단한 실력의 증거로 받아들이는 대신 무자비함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당시 궁인들 사이에 돌던 이야기는 대략 이런 식이었다. "그자는 상대가 무릎을 꿇어도 검을 거두지 않는다더라. 장태오 공자가 그렇게 당하고도 다시 도전한 건 오기였을 뿐, 강도현이라는 자는 자비를 모른다." 승리를 거듭할수록 상대를 봐주지 않는 성정이라는 해석이 궁인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고, 조은채 역시 그 해석을 별다른 의심 없이 흡수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소문을 처음 퍼뜨린 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해석의 근거가 실은 소문에 소문이 덧붙여진 것일 뿐, 확인된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조은채가 스스로 깨닫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한편 황서린은 회의를 마친 뒤 잠시 궁 밖 산책이 허락된 시간을 이용해 정원 한쪽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감시를 위해 배정된 궁녀 두 명이 멀찍이 떨어져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거리감이 오히려 익숙한 것처럼 그녀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눈 덮인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나무들은 가지 끝마다 눈이 얼어붙어 유리처럼 반짝였고, 그 반짝임이 황서린의 황금색 눈동자에도 옮은 듯 비쳤다. 강도현이 다가와 곁에 서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은채가 널 의심하는 것 같더군." 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걱정이 섞여 있었다. "의심할 만하죠." 강도현이 대답했다. "제가 갑자기 나타나서, 갑자기 전하를 위해 이것저것 벌이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 황서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황금색 눈이 잠시 그의 얼굴을 살피다가, 짧게 물었다. "넌 정말로 왜 그러는 거지." 그 질문은 조은채의 질문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지만, 황서린의 입에서 나오자 강도현의 가슴에 다른 방식으로 파고들었다. 조은채의 질문은 검증을 요구하는 질문이었으나, 황서린의 질문은 이해를 구하는 질문이었다. 그는 잠시 대답을 미루다가, 결국 절반의 진실만을 골라 말했다. "전하께서 이런 곳에 갇혀 계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의 말에 황서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시선을 정원으로 돌렸는데, 그 침묵이 거절인지 수용인지 강도현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녀의 옆얼굴이 눈빛 속에서 유난히 창백해 보였고, 강도현은 그 창백함이 추위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정원 저편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란이었다. 궁 밖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여럿이 담장 인근에 몰려들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먼 곳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 같았던 것이 순식간에 사람의 목소리로 또렷해졌다. 강도현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감시를 맡은 궁녀 하나가 다급히 달려와 아뢰었다. "전하, 밖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연쇄 의문사 소식이 이미 시중에 퍼진 모양입니다." 궁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손에 든 등불도 함께 흔들렸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담장 너머에서 누군가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역 황녀가 또 사람을 죽였다더라!" 그 외침에 이어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이며 순식간에 소요가 커졌다. "확인은 됐고?" "확인이 뭐가 필요해, 그 여자가 살던 시절부터 그랬는데!" "궁 안에 있으면서도 사람을 죽인다는데 이게 나라냐!" 목소리들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겹쳐 들려왔지만, 결론은 하나로 모아지고 있었다. 낙인. 황서린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잠시 벤치를 짚고 섰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숨소리도 평소보다 짧아져 있었다. 강도현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 지탱하며 낮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원 담장 한쪽이 무너지듯 사람들이 밀려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 부러지는 소리와 다급한 발소리, 그리고 그 사이를 뚫고 들려오는 고함이 겹쳐지며 순식간에 정원의 공기가 바뀌었다. 소문만으로 낙인을 확신한 군중이, 이제 눈앞에 그 낙인의 대상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 혼란 속에서 한 여인이 군중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왔다. 긴 흑발을 단정히 묶은 그녀는 주변을 한 번 훑어본 뒤, 강도현과 황서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긴 위험합니다. 일단 안으로 피하세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한나래!" 그녀는 잠시 강도현을 바라본 뒤, 군중을 막아서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 이름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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