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날 밤, 나는 방에 틀어박혀 밤을 새우기로 했다.
'뇌물 이야기가 새어나가기 전에 확실한 실력을 만들어야 한다.'
계단식으로 이유를 늘어놓자면 이랬다.
첫째, 부정합격 의혹이 나오면 무조건 시험 성적을 다시 파고들 것이다.
둘째, 그때 내 답안이 진짜 실력으로 나온 게 아니면 발뺌할 방법이 없다.
셋째, 그럼 지금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압도적으로,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잘하는 것.
넷째... 아니, 넷째는 없었다.
그냥 셋째가 전부였다.
'인생이 원래 이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전생 기억 활성화: 데이터 분석 모듈]
또 저 문장이 떠올랐다.
이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원래 전생에 데이터 분석이 직업이었으니, 지금 이 몸에 남은 습관도 그런 식으로 발현되는 모양이었다.
'전생엔 엑셀 켜고 밤새던 게, 이젠 붓 들고 밤새는 거로 바뀐 것뿐이네.'
도구만 바뀌고 야근은 그대로라는 게 조금 서글펐다.
나는 책상 위에 종이를 넓게 펼쳤다.
지난 십 년간 이 지역에서 소과에 합격한 사람들의 명단, 그들의 답안 유형, 채점관의 성향까지 최대한 긁어모았다.
서당 훈장님한테는 옛 기록을 빌려달라고 사정했다.
"훈장님, 지난 시험 답안 사본 좀 볼 수 있을까요."
"이놈, 갑자기 그건 왜 찾누?" 훈장님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공부에 참고하려고요." 나는 최대한 순진한 얼굴로 웃었다.
속으로는 다른 계산이 돌고 있었다.
'훈장님 서재에 있는 기록만 다 털어도 최소 삼백 명 분량은 나온다.'
시장에서 만난 아저씨들한테도 이런저런 소문을 캐물었다.
"저번에 합격한 그 집 아들 답안이 어땠다더라." 곡물상 아저씨가 던진 말 한마디도 나한테는 데이터였다.
"채점관이 이번엔 좀 짠 편이라던데." 포목점 할머니의 잡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모은 정보가 얼추 이천오백 명 분량이었다.
[히든카드 확인: 오국 관료 데이터베이스 - 표본 2,500명]
'이거다.'
나는 순간 무릎을 쳤다.
단순히 이번 소과만 잘 보고 끝낼 게 아니었다.
5국의 관료 이천오백여 명의 출신, 소속 서원, 승진 경로까지 다 데이터화하면, 이 난세에서 어떤 서원이 진짜 실력자를 키우는지, 어떤 경로가 가장 안전하게 출세할 수 있는지 다 계산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이건 이 시대판 입시 정보 사이트를 나 혼자 머릿속에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거 잘 정리하면 나중에 서원 컨설팅도 차릴 수 있겠는데.'
쓸데없는 사업 구상까지 스쳤다.
'전생에 이런 걸로 논문 썼으면 지도교수님이 좋아했을 텐데.'
또 쓸데없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나는 밤새 데이터를 정리하며 소과 시험의 출제 경향을 파악했다.
지난 십 년간 문제 유형의 칠 할이 경전 해석이었고, 나머지 삼 할이 실무형 문제였다.
실무형 문제는 특히 곡식 유통, 세금 계산 같은 것들이 자주 나왔다.
'이건 완전 내 홈그라운드잖아.'
곡식 무역상 아들이 세금 계산 문제를 만나는 건, 게임으로 치면 스타팅 지역에서 튜토리얼 몹을 만나는 수준이었다.
경전 해석 쪽도 대충 흘려볼 순 없었다.
지난 십 년간 가장 많이 출제된 구절 스무 개를 뽑아 따로 외웠다.
'이 정도면 기출문제집 한 권 뽑는 수준인데.'
붓끝이 마를 정도로 종이를 채우다 보니 어느새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아침이라니.'
몸은 피곤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맑았다.
시험 당일, 시험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서생들이 옷매무새를 다잡으며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군가는 붓을 손에 쥔 채 계속 손가락을 떨었고, 누군가는 벌써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어차피 내가 계산한 범위 안이니까.'
"이겸이 아니냐? 안색이 왜 그렇게 태평하냐?" 근처 서생이 물었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지난번 서당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놈이었는데, 얼굴이 이미 시험장 들어오기 전부터 반쪽이 나 있었다.
"자신 있으니까요." 나는 씩 웃었다.
"자신은 무슨! 여기 앉은 놈들 절반이 작년 낙방생이다. 다들 필사적이라고." 그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속으로는 다른 걱정이 앞섰다.
'문제 유형은 예상대로겠지만, 채점관이 부정합격 의혹 때문에 더 깐깐하게 보면 어떡하지.'
'괜히 답안을 너무 완벽하게 써서 오히려 의심받는 건 아닐까.'
'아니, 그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하다 만 척을 할까.'
머릿속에서 별의별 시나리오가 다 돌았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건 앞에 놓인 시험지를 최선으로 채우는 것뿐이었다.
시험지를 받는 순간, 예상했던 유형이 그대로 나왔다.
경전 해석 문제 일곱 개, 실무형 문제 세 개.
'맞아, 이거지.'
경전 문제는 밤새 외운 스무 구절 중 열다섯 개와 겹쳤다.
붓이 거의 자동으로 움직였다.
실무형 문제 중 하나는 곡식 백 석을 세 개 지역에 최적 비율로 분배하는 문제였다.
'이건 뭐, 전생에 하던 최적화 계산 그대로잖아.'
두 번째 문제는 세금 징수 시기를 언제로 잡아야 백성들 부담이 가장 적은지 묻는 문제였고, 세 번째는 흉년이 든 지역에 구휼미를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였다.
'전부 내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장부 옆에서 주워들은 것들이잖아.'
나는 답안지에 계산 과정을 촘촘히 적었다.
단순히 정답만 쓰지 않았다.
왜 이 비율이 최적인지, 대안이 되는 두 가지 분배 방식과 비교까지 곁들였다.
'혹시나 다른 방식이 더 맞다고 생각하는 채점관이 있으면 이걸로 반박도 가능하게.'
채점관이 보기에는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었을 것이다.
시험장을 나서면서 나는 옆자리 서생을 슬쩍 돌아봤다.
그는 아직도 붓을 든 채 손을 떨고 있었다.
'수고하십시오.'
속으로 짧게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시험이 끝나고 며칠 뒤, 결과가 붙었다.
"이겸! 이겸! 붙었다!" 박수복이 골목까지 뛰어와 소리쳤다.
박수복은 우리 집 가신으로, 원래 성격이 좀 급하고 목청이 큰 아저씨였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뛰어오는 모습이 꼭 동네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보였다.
"수복 아저씨, 목소리 좀요." 나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게 아니라! 붙었어! 그것도 그냥 붙은 게 아니라!" 박수복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 지역 소과 역대 최고 성적이라고 다들 난리다!"
[결과: 소과 합격, 성적 지역 최고점 (역대 신기록)]
나는 그 문장을 보고 잠깐 멍해졌다.
'……역대 최고면, 이거 눈에 너무 튀는 거 아닌가.'
원래 계획은 그냥 의심 못 할 정도로 잘하는 것이었는데, 최고 성적이라니.
이건 좀 과했다.
'적당히 잘하는 것과 압도적으로 잘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잖아.'
전자는 그냥 성실한 학생이고, 후자는 뭔가 사연 있는 학생이 된다.
'하필 후자로 왔네.'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아느냐! 온 동네에 잔치를 벌이려고 하신다!" 박수복이 신나서 말했다.
"……잔치는 좀 참으시라고 말씀 좀 드려주세요." 나는 이마를 짚었다.
"참긴 뭘 참어! 나도 벌써 돼지 한 마리 잡으라고 일러놨다!"
"아저씨, 그게 더 문제라니까요."
박수복은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벌써 옆집, 뒷집 문을 두드리며 소식을 퍼뜨리러 뛰어갔다.
소과 합격, 게다가 역대 신기록.
원래는 뇌물 의혹을 덮기 위한 방패였는데, 오히려 더 큰 관심을 끌어버린 셈이었다.
'이거 원, 조용히 넘어가려다 오히려 무대 한복판에 서게 된 느낌인데.'
전생으로 치면 시험 만점 맞아놓고 부정행위 의심받는 그런 상황이었다.
'차라리 칠십 점쯤 맞았으면 이런 관심도 안 받았을 텐데.'
집에 도착하니 정말로 아버지가 대문 앞에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 이 지역 최고 성적으로!" 아버지가 벌써 목이 쉬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어 축하한다며 아버지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버지, 진정하십시오." 나는 얼른 아버지를 말렸다.
"진정이라니! 이런 경사가 어디 있다고!" 아버지가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 저는 그냥 열심히 했을 뿐인데요."
"열심히 한 것도 실력이지! 우리 이겸이가!"
아버지는 이미 내 말을 들을 상태가 아니었다.
그 뒤로 며칠간 우리 집은 마을 사람들로 문턱이 닳았다.
다들 축하한다고 왔지만, 그중 몇몇의 눈빛은 조금 달랐다.
뭔가를 캐물으려는 눈빛, 계산하는 눈빛.
"그런데 이겸이, 진짜 혼자 다 준비한 게냐?" 한 노인이 슬쩍 물었다.
"네, 밤을 좀 많이 새웠습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허어, 그 어린 나이에 그게 가능한가."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잡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숨은 미묘한 뉘앙스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역시, 이 정도로 눈에 튀면 그냥 안 지나가겠지.'
또 다른 이웃은 우리 집 곡물 창고 쪽을 흘깃거리며 지나갔다.
'저 시선, 뭐지.'
우연이라기엔 너무 자주 그쪽을 보는 것 같았다.
합격의 기쁨과 동시에, 등줄기에 서늘한 예감이 스쳤다.
너무 잘한 것도 죄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이때까지 몰랐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