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알람이 울렸다.
나는 이불 속에서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더듬었다.
화면에는 '한빛대학교 경영학과 4학년 이도현'이라는 이름과 함께 채용 사이트 알림이 떠 있었다.
[불합격을 안내드립니다]
스물세 번째였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 흐릿한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방 안에는 프린트한 자기소개서 뭉치가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또 광탈이네...)
나는 그 종이 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에는 이력서 사본이 스무 장 넘게 쌓여 있었다.
각기 다른 회사 이름이 찍혀 있었지만, 결과는 항상 같은 문장으로 끝났다.
불합격.
나는 손끝으로 그 종이 더미의 맨 위장을 슬쩍 넘겨보았다.
자기소개서 첫 줄에는 '성실함과 책임감을 바탕으로'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몇 번이나 고쳐 쓴 문장인데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성실함이랑 책임감으로는 안 되는 시대인가...)
나는 그 종이를 도로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텔레비전에서는 아침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제 강남 3번 게이트에서 활약한 S급 탐사자 정하윤 씨가 또 한 번 신기록을..."
화면 속 남자는 검을 든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카메라는 그가 몬스터를 베어내는 순간을 슬로모션으로 재생하고 있었다.
검날에서 튀는 붉은 빛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나는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돌렸다.
다른 채널에서도 게이트 이야기가 나왔다.
또 다른 채널은 신규 던전 발견 소식을 보도하고 있었고, 그다음 채널에서는 유명 길드의 채용 공고가 스크롤로 지나가고 있었다.
요즘은 어디를 틀어도 다 그 얘기였다.
게이트, 탐사자, 몬스터, 레벨.
세상이 뒤집힌 지 벌써 3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이 세계에 발을 들이지 않고 있었다.
리모컨을 내려놓고 나는 텔레비전 화면을 한참 바라보았다.
화면 속 정하윤은 인터뷰에서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처음엔 다들 그렇죠. 저도 처음 각성했을 때는 힘 합계가 40도 안 됐어요."
그 말이 유독 귀에 남았다.
(40도 안 됐다는 사람이 지금은 S급이라니.)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는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었다.
하나는 지금처럼 서류를 넣고 광탈당하는 삶.
다른 하나는 던전에 들어가는 삶.
주변 친구들 중 몇몇은 이미 탐사자로 전직해서 꽤 짭짤하게 벌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동기 중 한 명은 반년 전에 자퇴하고 곧바로 던전에 뛰어들었는데, 지금은 중형 세단을 몰고 다닌다고 했다.
물론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초보 탐사자 사망률이 낮지 않다는 뉴스도 여러 번 봤다.
뉴스에서는 매달 몇 명씩 초보 탐사자가 던전에서 실종되거나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식이 짧게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그 위험조차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굶어 죽거나, 블랙기업에서 갈려 죽거나 둘 중 하나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정장 두 벌과 낡은 운동화 한 쌍이 놓여 있었다.
나는 정장 대신 가장 튼튼해 보이는 바지와 운동화를 꺼내 입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면접 볼 때보다 지금이 더 떨리네.)
청명 길드 강남지부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깨끗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은은한 조명 아래 상담 창구들이 줄지어 있었다.
천장은 유리로 되어 있어 오전 햇살이 그대로 로비 바닥까지 스며들었다.
바닥은 대리석처럼 반짝였고, 사람들의 발소리가 낮게 울렸다.
나는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다가 '신규 등록' 표지판 아래 있는 창구로 다가갔다.
창구 안쪽에는 단정한 정장을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명찰에는 '서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나를 잠깐 훑어보고는 곧바로 서류철을 꺼냈다.
"신규 등록이신가요?"
목소리에는 억양이 거의 없었다.
"네, 처음이라 잘 모르는데요."
"각성 테스트부터 진행하겠습니다. 저쪽 수정구로 가시면 됩니다."
그녀는 손끝으로 옆 부스를 가리켰다.
짧고 정확한 지시였다.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부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스 안에는 사람 키만 한 투명한 수정구가 있었다.
안내문에는 '손을 얹으면 능력치와 초기 스킬이 자동으로 감지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부스 옆에는 다른 신규 등록자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한 남자는 손을 떨며 수정구 앞에 섰고, 또 다른 여자는 이미 테스트를 마치고 상태창을 들여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침을 삼키고 수정구 표면에 손을 올렸다.
순간 손끝에서 서늘한 감각이 퍼졌다.
스산.
뭔가가 몸 안으로 흘러드는 느낌이었다.
팔뚝을 타고 그 서늘함이 어깨까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이도현]
[힘 11 / 민첩 12 / 체력 13 / 정신 11 / 마력 12]
[합계 59]
[보유 스킬: 가챠(???)]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합계 59라는 숫자가 유독 눈에 박혔다.
(이게... 평균이겠지?)
나는 상태창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다른 능력치는 큰 특이점이 없어 보였다.
문제는 마지막 줄, 물음표가 세 개나 붙은 스킬명이었다.
서연이 서류를 확인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합계 59면 평범한 축이네요. 대부분 초보 탐사자가 50에서 70 사이입니다."
"그럼 이건 뭔가요?"
나는 스킬 창에 뜬 물음표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서연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에 찬 작은 단말기를 들어 뭔가를 확인하는 듯한 몸짓을 했다.
"가챠... 처음 보는 스킬명이네요."
"희귀한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이름이라는 뜻이에요. 잡스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녀는 단말기를 몇 번 더 두드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희 데이터베이스에도 안 잡히는 이름이에요.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가끔 그런 게 나오긴 하더라고요. 대부분 별 볼 일 없는 스킬이었어요."
말투는 여전히 사무적이었지만, 그 안에 작은 호기심이 스치는 것도 느껴졌다.
서연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곧바로 초보자용 던전 위치와 안전 수칙이 적힌 안내서를 내밀었다.
"강남 1번 게이트는 슬라임 던전이라 초보자에게 추천드립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위험하면 바로 귀환석을 쓰세요."
낮고 단정한 어조였다.
"귀환석은 어디서 구하나요?"
"등록 완료하시면 기본 지급됩니다. 로비 나가시기 전에 데스크에서 받으세요."
나는 안내서를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등록을 마치고 로비를 나서는 길, 나는 걸으면서 계속 상태창을 만지작거렸다.
스킬창에는 '가챠'라는 이름만 덩그러니 떠 있고, 설명은 텅 비어 있었다.
로비 밖으로 나가는 유리문을 지나면서도 나는 계속 그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확인할 방법이 있을 텐데.)
나는 손끝으로 그 이름을 톡 건드려 보았다.
그 순간, 눈앞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가챠]
[레벨 1을 소비하여 무작위 보상을 획득합니다.]
[현재 레벨: 1 / 소비 가능 레벨: 0]
[레벨이 부족합니다. 던전에서 경험치를 획득하세요.]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나를 힐끗 보고 지나쳤다.
심장이 살짝 빨리 뛰었다.
(레벨을... 소비한다고?)
다른 탐사자들은 레벨이 오를 때마다 능력치가 자동으로 붙는다고 들었다.
친구들이 말하던 시스템과는 뭔가 결이 달랐다.
그런데 나는 그 레벨 자체를 재료로 써서 뭔가를 뽑는다는 거였다.
서연이 말한 대로 확실히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이름이었다.
(이거... 그냥 잡스킬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안내서를 손에 꼭 쥐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강남대로의 오후 햇살이 건물 사이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그 빛 속에서 나는 손안의 안내서를 다시 펼쳐보았다.
슬라임 던전, 초보자 추천, 위험 시 귀환석 사용.
익숙한 문구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 문장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뭔지는 몰라도, 이 스킬이 평범하지 않다는 확신만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레벨 1을 채워야 비로소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그 문장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