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날 저녁, 나는 자취방에서 노트북을 켜고 강남 1번 게이트에 관한 정보를 찾아봤다.
화면 속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던전 후기와 공략법이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슬라임 던전은 초보자에게 안전한 편이라고 여러 커뮤니티에 적혀 있었다.
누군가는 "슬라임은 그냥 젤리 갖고 노는 느낌"이라고 썼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장비만 제대로 갖추면 하루에 레벨 두세 개는 그냥 오른다"고 적어놨다.
나는 스크롤을 계속 내리며 후기들을 읽어 내려갔다.
초보자용 단검 추천 목록, 던전 입장료, 관리원에게 물어봐야 할 것들.
메모장을 켜고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적었다.
(일단 레벨을 좀 올려야겠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덮고 알람을 새벽 여섯 시로 맞췄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던전 입구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강남 1번 게이트는 강남역 뒷골목 어느 빌딩 지하에 있었다.
아침 공기는 아직 차가웠고, 거리에는 출근하는 사람들보다 던전으로 향하는 이들이 더 많아 보였다.
빌딩 입구에는 커다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강남 1번 게이트 - 슬라임 던전 - 위험도 최하]
입구에는 청명 길드 소속 관리원이 서서 출입자 명단을 확인하고 있었다.
검은 제복을 입은 관리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태블릿을 두드리고 있었다.
"신분증 확인해 주세요."
나는 신분증을 내밀었다.
관리원은 화면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레벨 1이시네요. 조심하세요."
나는 신분 확인을 마치고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은 생각보다 길었고, 내려갈수록 공기가 눅눅해졌다.
계단 끝에는 푸르스름한 빛이 일렁이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게이트였다.
문 표면에는 마치 물결처럼 빛이 넘실거렸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웅웅거리는 낮은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순간, 눈앞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습기 찬 동굴, 벽을 타고 흐르는 초록빛 이끼, 저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
공기 중에는 축축하고 비릿한 냄새가 감돌았다.
발밑의 바닥은 미끄러웠고, 천장에서는 이따금 물방울이 떨어졌다.
똑, 똑.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소리가 동굴 전체에 퍼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상태창을 다시 열었다.
[가챠] 항목은 여전히 잠겨 있었다.
(경험치를 좀 벌어야 하니까...)
나는 단검을 손에 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동굴 안은 어둑했지만, 벽에 붙은 이끼가 은은한 초록빛을 뿜어내고 있어서 앞을 보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그때였다.
발밑에서 뭔가 물컹한 것이 꿈틀거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젤리처럼 투명한 몸을 가진 슬라임이 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크기는 축구공만 했다.
몸속에는 작고 붉은 핵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던전 입구에서 산 초보자용 단검을 뽑아 들었다.
손이 살짝 떨렸다.
(별거 아니야. 슬라임은 약하다고 했어.)
슬라임은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움직임이 느려서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나는 숨을 고르고 슬라임의 몸통을 향해 단검을 내리찍었다.
퍽.
둔한 소리와 함께 슬라임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흐물흐물 흩어졌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작은 안내 문구가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바닥에 남은 슬라임의 흔적을 내려다보며 나는 단검을 옷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이 정도면 할 만하겠는데.)
자신감이 조금씩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슬라임을 몇 마리 더 잡고 나서였다.
동굴 이곳저곳에서 슬라임들이 꿈틀거리며 나타났고, 나는 그때마다 단검을 휘둘렀다.
처음엔 손이 떨렸지만, 다섯 번째 슬라임을 잡을 때쯤엔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레벨업! 현재 레벨 2]
안내문이 뜨자 나는 저도 모르게 상태창을 열었다.
[가챠]
[소비 가능 레벨: 1]
손끝이 저릿해졌다.
(드디어...)
어젯밤 커뮤니티에서 읽었던 가챠에 관한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강력한 무기를 뽑았다고 자랑했고, 누군가는 쓸모없는 잡템을 뽑았다며 한탄했다.
나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고, 조용한 구석으로 들어가 손끝으로 스킬창을 눌렀다.
[레벨 1을 소비하여 가챠를 실행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확인을 눌렀다.
스아아아.
손끝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작은 구슬 모양의 빛이 손바닥 위에 떠올랐다가, 곧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밝아졌다가 서서히 옅어지며 어떤 형태를 그려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사람 키의 손바닥만 한 존재가 서 있었다.
등에는 얇은 날개가 달려 있었고, 금빛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다.
체구는 20센티미터쯤 되는, 작은 요정이었다.
날개는 마치 유리처럼 투명했고, 움직일 때마다 미세한 빛의 가루가 흩날렸다.
"으아... 여기가 어디야?"
요정은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는 바로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 계약자님이시구나! 처음 뵙겠습니다!"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나는 잠시 말을 잃고 그 작은 존재를 바라봤다.
(진짜 사람... 아니 요정이 나왔어.)
믿기지 않아서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손을 뻗어 살짝 만져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저는 나리예요! 계약자님의 네비게이터랍니다!"
나리는 팔짝팔짝 날아다니며 자기소개를 했다.
날개를 팔랑이며 내 주변을 한 바퀴 빙 돌고는 다시 눈앞에 멈춰 섰다.
"가챠 스킬로 뽑힌 조력자, 뭐 그런 개념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네비게이터?"
"네! 던전 정보 알려드리고, 소재도 대신 옮겨드리고, 뭐든 도와드릴게요!"
나리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팔을 허리에 얹고 씩 웃었다.
나는 상태창을 다시 확인했다.
[가챠 보상: 조력자 '나리' 소환]
[등급: 알 수 없음]
등급란이 물음표로 채워져 있었다.
(등급이 알 수 없다는 게... 좋은 건가 나쁜 건가.)
나는 그 물음표를 몇 번이나 눌러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리는 내 어깨 근처를 빙빙 돌며 신나게 말했다.
"그런데 계약자님, 능력치가 좀... 소박하시네요?"
"...뭐라고?"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그냥 특이하다는 뜻이었어요!"
나리는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웠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잠깐만... 이 반응,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리를 바라봤다.
나리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앞에 슬라임 무리가 있어요! 얼른 잡으러 가요!"
나는 더 캐묻고 싶었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나중에 다시 물어봐야겠어.)
나리의 말대로 조금 걸어가니 슬라임 몇 마리가 모여 있었다.
서너 마리쯤 되는 슬라임들이 동굴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꿈틀대고 있었다.
나는 단검을 고쳐 쥐고 다가갔다.
하나씩 순서대로 처리하며 시간을 벌었다.
퍽, 퍽.
연달아 울리는 둔한 소리와 함께 슬라임들이 차례로 흩어졌다.
나리는 신기하게도 손끝에서 작은 빛의 실을 뽑아내어, 죽은 슬라임의 핵을 빨아들이듯 회수했다.
빛의 실이 슬라임의 잔해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작고 반짝이는 핵이 나리의 손안으로 스르륵 모여들었다.
"이렇게 하면 소재 회수 시간이 훨씬 빨라져요!"
확실히 실용적인 능력이었다.
(생각보다 진짜 도움이 되네.)
직접 손으로 핵을 찾아 회수했다면 시간이 두 배는 더 걸렸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 사냥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슬라임을 잡고, 나리가 핵을 회수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어느새 리듬이 생겼다.
동굴 안쪽 깊은 곳에서 낯선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윽...
낮고 기괴한 소리였다.
동굴 벽을 타고 울리는 그 소리는 지금까지 들었던 슬라임의 어떤 소리와도 달랐다.
나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날개를 팔랑이던 움직임이 멈췄다.
"어? 이 소리..."
"뭔데?"
"슬라임 던전에서는 원래 안 나는 소리예요."
나리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동굴 벽을 따라 흐르던 물소리가 어느새 멈춰 있었다.
방금까지 귓가에 익숙하게 울리던 그 소리가 사라지자, 동굴 전체가 낯선 정적에 잠긴 것 같았다.
대신 어둠 속에서 붉은빛 두 개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짐승의 눈 같았다.
그 두 개의 붉은빛은 규칙적으로 천천히 흔들리며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