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몬스터의 촉수가 정수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검붉은 표면이 축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끝에서 점액질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뜬 채 그 순간을 마주했다.
발목을 휘감은 힘이 너무 강해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피할 수가 없어.)
숨이 턱 막혔다.
그때, 내 옆에서 작은 빛이 확 터졌다.
"안 돼요!"
나리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녀의 몸 전체가 눈부신 금빛으로 물들었다.
평소의 은은한 반짝임과는 전혀 다른, 눈이 시릴 정도의 광량이었다.
작은 날개가 격렬하게 진동하며 공기를 갈랐다.
파앗.
동굴 벽에 금빛 잔상이 어지럽게 부딪혔다.
촤아앙.
금빛 실선이 촉수를 그대로 관통했다.
몬스터가 고통스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끄어어억.
동굴 전체가 떨리는 듯한 울음이었다.
촉수가 반쯤 잘려나가며 바닥으로 늘어졌다.
잘린 자리에서 검붉은 액체가 뿜어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발목을 감았던 힘이 순식간에 풀렸다.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났다.
무릎이 후들거려서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나리, 너..."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본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지원형이라고, 전투는 못 한다고 했던 요정이 몬스터의 촉수를 그 자리에서 절단해버렸다.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나리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날개의 진동이 처음보다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계약자님, 지금이에요! 저놈 균형이 무너졌어요!"
나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단검을 고쳐 쥐고 몬스터의 옆구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발끝으로 바닥을 박차는 순간, 다리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는 걸 느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손목을 살짝 꺾어 칼끝의 각도를 맞췄다.
푹.
칼끝이 검붉은 살을 파고들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저항감이 묵직했다.
몬스터가 크게 몸부림쳤지만, 이미 균형을 잃은 뒤였다.
거대한 몸통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힘을 다해 칼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변했다.
쿠웅.
몬스터의 거대한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동굴 바닥이 진동하며 흙먼지가 살짝 피어올랐다.
동굴 안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숨소리만이 벽에 부딪혀 울렸다.
[미확인 몬스터를 처치했습니다]
[레벨업! 현재 레벨 3]
안내문이 눈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글자를 제대로 읽을 여유도 없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려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괜찮으세요?"
나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앞으로 날아왔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얼굴에도 옅은 피로가 스쳐 있었다.
"어, 어. 넌 괜찮아?"
"저는 좀 지치긴 했지만 멀쩡해요!"
나리는 억지로 웃어 보였지만, 날개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확실히 느려져 있었다.
날갯짓 사이사이에 미묘하게 삐걱거리는 듯한 느낌마저 있었다.
(방금 그 힘... 나리도 뭔가 무리한 것 같은데.)
나는 그 부자연스러운 리듬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넘어져 있던 남자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다리 한쪽에서 피가 배어 나와 바지를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목소리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다리를 절뚝이며 나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괜찮으세요? 상처가 심해 보이는데."
"이 정도면 귀환하면 치료받을 수 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그 손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혼자였으면 저도, 여러분도... 아니, 감사합니다. 이 말밖에는 못 하겠네요."
그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귀환석을 꺼내 사라졌다.
빛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그가 흘린 핏자국만 남았다.
동굴 안에는 다시 나와 나리만 남았다.
바람 한 줄기가 동굴 입구 쪽에서 스며들어 왔다.
평소라면 그저 시원하게 느껴졌을 그 바람이, 지금은 이상하게 서늘했다.
나는 잘려나간 몬스터의 사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검붉은 액체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사체의 표면에는 처음 보는 무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초보자 던전에서 마주쳤던 다른 몬스터들과는 확실히 다른 질감이었다.
(저런 존재가 초보자 던전에 나타난다는 게... 정상이 아니야.)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나리, 아까 그 힘 말이야."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그거요?"
나리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평소라면 눈을 마주치고 또박또박 대답하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손끝으로 자신의 옷깃을 살짝 만지고 있었다.
"그냥 계약 스킬이에요. 위급할 때만 쓸 수 있는 거라서, 평소엔 잘 못 쓴다고 보시면 돼요."
대답이 어딘가 정해진 대본을 읽는 것처럼 들렸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정보는 이상하게도 헐거웠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일단은 넘어가자.)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 캐물어봤자 더 이상의 대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귀환하는 길, 동굴 벽을 따라 이어진 좁은 통로를 걸으며 나는 문득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어릴 적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어른들이 뭔가를 해주기만을 기다리는 어린애였다.
병원 복도에 앉아 발끝만 바라보던 그 시간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나는 다시 한번 무력하게 쓰러진 채로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렸다.
발목이 묶인 채로, 눈을 뜬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그때도... 지금도, 결국 누가 구해주는 쪽이었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동굴 벽을 스치는 손끝이 차갑게 느껴졌다.
"계약자님?"
나리가 내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조심스러웠다.
"무슨 생각 하세요?"
"아니, 별거 아니야."
나는 애써 표정을 풀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동굴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냥... 다음엔 내가 먼저 구해주는 쪽이 되어야겠다 싶어서."
말을 뱉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나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작은 눈동자 안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그러다 곧 배시시 웃었다.
"그럼 저부터 열심히 도와드릴게요!"
밝은 목소리가 어두운 동굴을 조금이나마 환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웃음을 보며 옅게 웃음을 되돌렸다.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방금 본 그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그 낯선 무늬와, 나리가 흘린 어딘가 어색한 대답까지.
동굴을 빠져나가는 발걸음 위로,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조용히 따라붙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