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아니, 뭐, 그냥 지나가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캡모자 쓴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걸음마다 발소리가 골목 벽에 부딪혀 울렸다.
다각. 다각.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렸다.
치이익, 치이익.
꼭 지금 이 상황에 맞춰 조명 감독이 분위기 잡는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내 정신이 아직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안 들었다.
온몸이 그 자리에 박혀버린 것 같았다.
발바닥부터 시작해서 무릎, 허벅지까지 순서대로 굳어가는 느낌.
마치 몸 안에서 누군가 콘크리트를 붓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새끼 얼굴 봤어?"
가늘쭉한 남자가 정장 입은 남자를 발로 짓눌러 놓고 이쪽을 향해 눈짓했다.
정장 입은 남자는 신음도 못 내고 바닥에서 버둥거렸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가늘쭉한 남자의 이름은 정민혁이었다.
캡모자 쓴 남자는 박태식이라고 불렸다.
그때는 그 이름들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전혀 몰랐다.
"봤겠지, 이 시간에 여기서."
박태식이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냈다.
검은 쇳덩이, 손잡이가 짧은 그것.
권총이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영화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작고, 훨씬 무겁게 느껴지는 물건.
왜 다들 총을 그렇게 가볍게 휘두르는 것처럼 찍어놨는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영화 제작진들한테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건 알지만, 머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도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이리 와."
총구가 나를 향했다.
검은 구멍.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숨이 멈췄다.
귓속에서 이명이 울렸다.
삐이―.
그 순간 감각이 다시 터졌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도였다.
골목의 모든 구조물이 좌표로 바뀌었다.
왼쪽 담벼락 뒤, 오른쪽 쓰레기통, 뒤편 삼 미터 거리에 있는 소화전.
박태식과의 거리, 삼 점 이 미터.
정민혁과의 거리, 오 점 일 미터.
마치 게임 로딩화면처럼 숫자가 눈앞에서 계산됐다.
숨 쉴 틈도 없이 쏟아지는 정보에 머리가 아릴 정도였다.
근데 이상하게, 그 와중에도 다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왼쪽으로.
내가 움직인 게 아니었다.
몸이 먼저 결정하고, 뇌는 나중에 통보받는 느낌.
이게 도망치는 건지 뭔가에 조종당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이 새끼 뛴다!"
박태식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총성이 울렸다.
타앙!
귀가 먹먹해졌다.
뭔가 벽을 때리는 소리, 파삭.
총알이 벽돌을 깨고 튀는 소리였다.
벽돌 파편이 목덜미에 튀었다.
차갑고 따가운 느낌.
그게 진짜라는 걸 그제야 확실히 알았다.
나는 골목 모퉁이로 몸을 던졌다.
무릎이 콘크리트에 부딪혀 통증이 번졌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프다는 감각조차 지금은 사치였다.
"이쪽이야!"
정민혁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발소리가 빨라졌다.
다각, 다각, 다각.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도망칠 곳을 찾아야 한다.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소리쳐서 사람을 부를까.
그러다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곧바로 그 생각을 덮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감각이 다시 내 눈앞에 지도를 펼쳤다.
골목 끝, 삼 미터.
거기 막다른 벽.
오른쪽에 좁은 틈,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
왼쪽엔 뭔가 떨어져 있는 물체.
권총.
방금 박태식이 발로 걷어차서 떨어뜨린 것인지, 아니면 정민혁이 위협하던 중 흘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검은 쇳덩이가 바닥에 반쯤 그늘 속에 놓여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그 표면에 살짝 반사되어 번쩍였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손이 뻗어나갔다.
손끝이 차가운 금속에 닿았다.
무겁다.
생각보다 훨씬 무겁다.
손목이 살짝 꺾일 정도로.
뒤에서 정민혁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감각이 알려줬다.
일 점 팔 미터, 일 점 이 미터, 좁혀지는 거리.
돌아봤다.
정민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눈, 씨익 웃는 입꼬리.
그는 나를 위협거리로도 보지 않는 표정이었다.
저 웃음.
저 여유.
사람 하나 죽이는 걸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얼굴.
그 순간, 게임에서 수백 번 반복했던 동작이 몸에서 그대로 튀어나왔다.
조준.
발사.
타앙!
반동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손가락이 저릿하게 떨렸다.
정민혁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가 복부를 손으로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것이 스며 나왔다.
"으어………."
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손에 쥔 권총이 갑자기 백 배는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손끝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게임 속에서는 수백 번, 수천 번 눌러왔던 버튼.
근데 이건 리스폰이 없다.
그 사실이 뒤늦게 목덜미를 조여왔다.
"이 새끼가……!"
박태식의 목소리가 골목 저편에서 터져 나왔다.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동료가 쓰러진 걸 본 눈빛이 어땠는지, 뒤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몸이 다시 먼저 움직였다.
권총을 든 채로 뒤돌아 뛰었다.
좁은 틈, 감각이 알려줬던 그 길.
몸을 옆으로 비틀어 겨우 통과했다.
어깨가 벽에 긁혀 화끈거렸지만 아프다는 느낌조차 늦게 왔다.
콘크리트 가루가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등 뒤에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타앙!
뭔가 귓가를 스치는 느낌, 뜨거운 바람 같은.
비명이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만약 소리를 냈다면 그다음 총알은 더 정확했을지도 모른다.
뛰었다.
무작정 뛰었다.
골목을 세 번 꺾고, 계단을 굴러 내려가듯 뛰어내리고, 다시 골목으로 파고들었다.
발바닥에 물웅덩이가 튀어 신발 속까지 축축해졌다.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거기 서!"
박태식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멈추면 끝이라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서 목구멍에서 쇠 맛이 났다.
다리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근육이란 게 원래 이렇게 뜨거워질 수 있는 건지 처음 알았다.
그런데도 계속 뛰었다.
감각이 계속 눈앞에 좌표를 던졌다.
다음 모퉁이, 다음 골목, 다음 사각지대.
마치 누군가 나를 위해 최적의 도주 경로를 그려주는 것 같았다.
왼쪽으로, 오 미터.
다시 우측 대각선, 십일 미터.
숨 쉴 틈도 없이 쏟아지는 지시.
그런데 그 사실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게 나를 살리는 능력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을 가진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나한테 이런 걸 줬는지, 왜 줬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지금은 그 지시를 따르는 것 말고는 아무 선택도 없었다.
손에 쥔 권총의 무게가 계속 느껴졌다.
방금 사람을 쐈다.
실제로, 진짜로.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니라, 살아 숨 쉬던 사람의 배에 구멍을 냈다.
머리가 하얘졌다가, 다시 새까매졌다.
그 사이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셀 수도 없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계속 따라붙었다.
다각, 다각, 다각.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감각이 알려주는 거리가 그걸 증명했다.
십사 미터. 십일 미터. 구 미터.
숨이 막혔다.
이대로 잡히면 끝이다.
머릿속에서 그 문장이 계속 맴돌았다.
끝이다, 끝이다, 끝이다.
그 순간, 골목 끝에 좁은 틈이 하나 더 보였다.
감각이 알려준 마지막 탈출로였다.
근데 그 틈이 유난히 좁아 보였다.
정말 저길 통과할 수 있을까.
아니,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조차 없었다.
발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숨소리까지 섞여 들려올 정도였다.
축축하고 거친, 짐승 같은 숨소리.
박태식의 것이었다.
다리를 억지로 밀어붙였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좁은 틈 앞에 도착했다.
숨을 삼켰다.
몸을 비틀어 넣으려는 순간, 등 뒤에서 쇳소리가 났다.
철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