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직 전함사령관

2화

던전 입구는 예상보다 훨씬 초라했다. 나는 뭔가 거대한 성문이나 빛나는 포탈 같은 걸 기대했었는데, 실제로는 지하철 출구처럼 생긴 콘크리트 계단이 지하로 내려가는 게 전부였고, 입구 위에는 '3등급 게이트 - 초심자 전용'이라는 촌스러운 간판이 걸려 있었다. 심지어 그 간판 옆에는 누가 붙여놨는지 모를 '흡연 금지' 스티커까지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그 위화감이 묘하게 웃겼다. '이게 세계를 구할 영웅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는 실소가 절로 나왔지만, 나는 그 감상을 접어두고 접수처로 향했다. 반년 넘게 방구석에서 썩어가던 내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으니까, 사소한 초라함 정도는 그냥 넘겨주기로 했다. 접수처는 편의점 계산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였다. 유리 칸막이 너머로 앉아 있는 직원은 나를 힐끗 보더니 곧바로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신체 건강 확인서와 안전 교육 수료증 확인하겠습니다." 나는 서류를 내밀며 손이 떨리는 걸 애써 감췄다. 사실 떨리는 게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몸이 낯설어진 건지 나조차 헷갈렸다. 직원은 서류를 훑어보더니 무심하게 도장을 찍었다. "통과입니다. 입장 전에 마지막으로 스킬 각성 여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목에 팔찌 하나를 채워줬는데, 재질도 플라스틱인지 금속인지 애매한, 그야말로 저가형 티가 나는 물건이었다. "스킬 각성이요? 그게 뭡니까" 하고 물었더니, 직원은 지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던전에 처음 입장하면 시스템이 개인의 잠재력을 판별해서 스킬을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확률이 매우 낮아서, 대부분은 아무것도 안 받고 그냥 몸으로 싸우세요." "그럼 확률이 어느 정도인가요?" 나는 괜히 궁금해서 되물었는데, 직원은 서류를 다시 정리하며 대답했다. "통계상 십만 명 중 한 명 꼴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정확한 수치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그 설명이 너무 심드렁해서, 나는 '나한테도 그런 게 있으려나' 하는 기대조차 접었다. 십만 분의 일이라니, 로또보다야 낫겠지만 그렇다고 딱히 희망을 걸 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눈앞에 낯선 공간이 펼쳐졌다. 천장은 자연 암반처럼 울퉁불퉁했고, 바닥에는 이끼가 낀 것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은은하게 감돌았는데, 그 빛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공기 자체도 지상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습기가 많은 것도 아닌데 묘하게 축축한 감촉이 피부에 감돌았고, 어디선가 낮게 울리는 진동음이 벽을 타고 전해져왔다. 마치 거대한 생물의 뱃속에 들어온 듯한 감각이었다. 나는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다. 반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서 있는 다리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그 흔들림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눈앞에 낯선 문구가 떠올랐다. [미확인 잠재력이 감지되었습니다.] [분석을 시작합니다...] '뭐야, 이게' 싶어서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팔찌에서 뜨는 알림인가 싶었는데, 이건 시야 자체에 겹쳐서 나타나는 문자였다. 마치 게임 속 UI 같은 게 실제로 눈앞에 떠 있는 느낌이었는데, 나는 손을 뻗어 그 문자를 만져보려 했지만 당연히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손가락이 허공을 몇 번 휘저은 뒤에야 나는 이게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걸 인정했다. 그 사이 문구는 계속 깜빡이며 로딩 중임을 알렸는데, 마치 오래된 컴퓨터가 파일을 여는 것처럼 느릿느릿한 속도였다. '십만 분의 일이라며' 하는 생각이 스쳤다. 설마, 하는 기대와 에이 아니겠지 하는 자조가 동시에 밀려왔다. [분석 완료.] [스킬 '시공전함(時空戰艦)'이 각성되었습니다.] [등급 판정 불가 - 전례 없는 형태의 스킬입니다.] ...이게, 되네? 나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전례 없는 형태'라는 문구가 특히 마음에 걸렸는데, 그게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판단할 근거가 전혀 없었으니까 일단 감정을 유보하기로 했다. 등급 판정 불가라는 말이 최상위 등급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시스템조차 처리 못 하는 오류에 가까운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잠깐 그 자리에 서서 문구를 다시 읽고, 또 읽었다. 세 번쯤 반복해서 읽었을 때, 낯선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마스터,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시공전함의 관제를 담당하는 인공지능입니다" 하고 그 목소리가 말했는데, 성별을 특정하기 어려운, 그러나 명백히 여성적인 톤을 가진 음성이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통로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목소리는 분명 바깥이 아니라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고, 그 목소리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만, 마스터께서 편하신 대로 불러주셔도 됩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되는대로 뱉었다. "그럼... 아리아라고 부를게요." "좋은 이름입니다, 마스터." 그렇게 즉석에서 이름이 붙은 인공지능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앉았다. 이름 짓는 데 걸린 시간이 삼 초도 안 됐다는 게 좀 부끄러웠지만, 아리아는 딱히 불만이 없어 보였으니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데 시공전함이라는 게 정확히 뭡니까" 하고 나는 물었고, 아리아는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시공전함은 마스터께서 소환하실 수 있는 함선형 전투 유닛입니다. 다만 현재는 함선 본체의 강도가 극히 낮은 초기화 상태이며, 실전 데이터를 축적해야 단계적으로 잠금이 해제됩니다." 그 설명을 듣자마자 나는 '뭔가 대단한 걸 얻은 것 같긴 한데, 지금 당장은 별 쓸모가 없다는 소리군'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요컨대 치트키를 받았는데 그 치트키가 지금은 잠겨 있다는 뜻이었으니, 나는 살짝 김이 빠졌다. "그럼 지금 당장 소환은 안 되는 겁니까" 하고 재차 물었더니, 아리아는 사무적인 톤으로 답했다. "현재 소환 가능한 함선의 최대 크기는 소형 보트에 불과합니다. 전투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까지는 상당한 데이터 축적이 필요합니다." 소형 보트라니. 나는 순간 그 볼품없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져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전함이라는 이름값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초기 상태였다. "발동 조건은 뭡니까" 하고 재차 물었지만, 아리아의 대답이 묘하게 애매했다. "정확한 발동 조건은 마스터께서 실전을 통해 직접 체득하셔야 합니다. 저 또한 마스터의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기 전까지는 세부 로직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결국 몸으로 부딪혀서 알아내라는 거잖아' 싶어서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개사긴데, 하고 잠깐 기대했다가 조건부라는 말에 다시 원위치.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 곡선이었다. 십만 분의 일짜리 스킬을 받았는데 정작 쓸모는 미래형이라니, 이것도 나름 내 인생다운 전개라는 생각이 들어서 헛웃음이 자꾸 새어나왔다. 그때 저 멀리서 물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뿌글, 뿌그르...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통로 끝에서 반투명한 파란색 덩어리 하나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것이 서은채의 영상에서 봤던 슬라임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크기는 축구공 정도였고, 겉보기엔 딱히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표면 위로 미세한 기포들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모습이, 마치 끓기 전의 젤리 같아서 은근히 기분 나쁜 질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저게 슬라임이군요" 하고 나는 혼잣말을 뱉었고, 아리아가 곧바로 정보를 덧붙였다. "D등급 최하위 몬스터입니다. 초보자에게는 적합한 상대이나, 절대 방심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왜요, 저거 되게 약해 보이는데" 하고 나는 되물었다. "약한 몬스터라고 해도 마스터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 평균 이하로 측정됩니다. 상대적인 위협도를 재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이 뼈아프게 정확해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반년 동안 방구석에서 삭아버린 몸으로 뭘 어떻게 상대하겠다는 건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이상한 흥분도 함께 밀려왔다. 처음으로 몬스터라는 걸 눈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지난 반년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방구석에서 썩어가던 나에게는 낯설고도 짜릿한 감각이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르게 뛰고 있었는데, 그게 두려움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는 나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시공전함이 잠겨 있다면, 그냥 몸으로 부딪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접수처에서 받은 기본 장비라고는 짧은 목검 하나가 전부였다. 그것도 날이 서 있지도 않은, 그야말로 나무토막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나는 그 목검을 고쳐 쥐며 슬라임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두 걸음. 발밑에서 부드러운 흙바닥이 서걱거리는 감촉이 신발 밑으로 전해졌다. 슬라임은 나를 발견했는지 몸을 부풀리며 위협하듯 진동했다. 뿌구구구... 그 진동이 공기를 타고 내 고막까지 전해지는 순간, 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이론으로 알던 것과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나는 그 순간 숨을 크게 들이쉬며 목검을 들어올렸다. '한번 해보는 거지, 별거 아니라잖아'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목검을 쥔 손은 이미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리아의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에서 울렸다. "마스터, 전투 데이터 수집을 시작하겠습니다. 준비되셨습니까?" 나는 대답 대신 목검을 앞으로 내지르며 슬라임을 향해 몸을 던졌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 순간의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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