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삼킨 영혼의 무게

3화

동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졌다. 천장이 높아지고 붉은 안개가 짙어졌다. 발밑에서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뼛조각인지 낙엽인지 구별이 안 됐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피 냄새 같기도 하고, 썩은 흙냄새 같기도 했다. "전투 대비." 강민석이 손을 들어 신호했다. 다섯이 그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섰다. 나는 맨 뒤에서 단검을 다시 고쳐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온다. 앞쪽에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 고블린들이 있었다. 하나, 둘, 셋... 눈으로 세다가 그만뒀다. 열은 넘었다. 녹색 피부에 뒤틀린 이빨, 손에는 각자 조잡한 무기를 들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저것들 진형 짜는 거 맞죠." 오태준이 목소리를 낮췄다. 일반 고블린은 무리를 이뤄도 흩어져서 덤빈다고 배웠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고블린들은 정렬해 있었다. 앞줄, 뒷줄이 나뉘어 있고, 뒤쪽에 있는 몇 마리는 창을 들고 있다. "패턴 데이터가 부족하다던 게 이거였네요." 내가 중얼거렸다. 튜토리얼에서 본 자료 화면에는 분명 저런 진형 얘기가 없었다. 그럼 저건 뭐지. 강민석이 대답 없이 검을 뽑았다. 칼날이 붉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제가 앞을 맵니다. 서연 씨, 태준 씨는 좌우로. 하늘 씨는 후방에서 원거리, 윤성 씨는 후방 지원. 도현 씨는—" 그가 잠깐 나를 봤다. "제 뒤에서 상황 보다가 틈 생기면 들어와요." 틈이 생기면. 그 틈이 어떤 모습일지, 나는 짐작도 못 했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도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다. "간다." 강민석이 먼저 달려나갔다. 콰앙! 검과 창이 부딪치는 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박서연이 좌측으로 붙어 단검을 휘둘렀다. 서걱. 고블린 하나가 팔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됐어!" 그녀가 소리쳤다. 하지만 넘어진 고블린 자리에 다른 두 마리가 곧바로 채워졌다. 숫자가 줄기는커녕 그대로다. 아니, 오히려 늘어난 것 같기도 했다. 오태준은 방패로 앞을 막으며 버티고 있었다. 창이 방패를 찍는 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카앙, 카앙, 카앙. 세 번째 타격에 그의 무릎이 흔들렸다. 저러다 무너지겠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여전히 발이 안 떨어졌다. "버텨야 해요!" 김하늘이 화살을 날렸다. 퍼억. 창을 든 고블린 하나가 목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하지만 화살통은 무한하지 않다. 그녀가 화살을 뽑을 때마다 통 속을 뒤지는 손이 점점 급해졌다. 나는 뒤에서 그 모든 걸 보고 있었다. 칼을 쥔 손이 떨렸다.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발이 안 떨어졌다. 겁쟁이. 스스로 그렇게 불러봤지만 그래도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다시 그 뜨거운 감각이 가슴에서 꿈틀거렸다. 이번엔 더 강했다. 마치 누군가 내 안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심장 근처가 뜨겁다기보다, 뭔가 안쪽에서 밀고 나오려는 느낌이었다. "으윽!" 오태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터졌다. 방패가 밀리며 창끝이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피가 튀었다. 붉은 안개 속으로 붉은 피가 섞여 든다. 색이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태준 씨!" 박서연이 소리치며 달려갔다. 강민석이 앞에서 세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검이 번쩍일 때마다 고블린 하나씩 쓰러졌지만, 그 자리를 다른 놈들이 채웠다. 숫자가 줄지 않는다. 아니, 줄고는 있는데 너무 느리다. 이대로면 체력이 먼저 바닥난다. 그 계산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돌아갔다. "윤성 씨! 태준 씨 좀!" 강민석이 소리쳤다. 최윤성이 달려가 오태준의 상처에 손을 얹었다. 초록빛이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회복 스킬: 소생의 손길 - 발동]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한다. 완전히는 아니었다. 최윤성의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마나를 얼마나 쓴 건지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뒤에 서 있었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단검을 쥔 손이 무겁게 느껴진다. 다섯 명 중에 나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사실이 더 발을 무겁게 만들었다. "도현 씨, 뭐 하세요!" 박서연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녀 옆으로 고블린 하나가 접근하고 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생각할 틈도 없이 달려나갔다. 머리로 판단하기 전에 다리가 이미 땅을 박차고 있었다. 한 번. 칼끝이 고블린의 팔을 스쳤다. 얕은 상처만 남겼다. 두 번. 다시 휘둘렀지만 놈이 몸을 틀어 피했다. 세 번. 마지막 시도가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서걱. 놈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처음으로 내 손으로 하나를 쓰러뜨렸다. 기뻐할 틈이 없었다.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다른 고블린이 창을 내질렀다. "피해요!" 박서연이 나를 밀쳤다. 창끝이 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옷이 찢어지고 살갗이 갈렸다. 뜨거운 통증이 늦게 따라왔다. 숨이 턱 막혔다. 이게 진짜구나. 죽을 수도 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괜찮아요?" 박서연이 물었다. 그녀 자신도 팔에 상처가 있다. "네, 별거 아니에요." 거짓말이었다. 옆구리가 불타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상황에서까지 괜찮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지 모르겠다. 습관인가. 전황을 둘러봤다. 쓰러진 고블린은 넷. 남은 건 아직 여덟 이상. 오태준은 최윤성의 회복으로 겨우 일어나 다시 방패를 들었지만,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이 붉은 안개와 섞여 얼굴을 타고 흘렀다. 강민석은 여전히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의 갑옷에도 여러 군데 긁힌 흔적이 보인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게 여기서도 들렸다. "생각보다 개체가 강합니다!" 그가 소리쳤다. "이거 일반 고블린 아닌 것 같아요!" 일반이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곧 알게 됐다. 뒷줄에 있던 고블린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체구가 다른 놈들보다 크고, 뿔 같은 게 이마에 나 있었다. 놈이 손을 들자, 주변 고블린들의 움직임이 한층 빨라졌다. 아까까지 흩어져 있던 놈들의 동선이 순식간에 하나로 맞춰졌다. 마치 누가 지휘를 하는 것처럼. "저건 뭐예요?" 김하늘이 화살을 뽑으며 물었다. 강민석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고블린 챔피언입니다. 지휘 개체예요." 그가 검을 고쳐 쥔다. "이건 E급이 아니에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되물을 시간도 없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챔피언이 포효했다. 동굴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남은 고블린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그 순간, 가슴 속에서 두드리던 그 뜨거운 것이 마침내 무언가를 향해 문을 열어젖히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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