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던전이 처음 열렸을 때 사람들은 세계가 끝난다고 했다. 정확히는 세계는 안 끝났고 대신 부동산값이 끝났다. 던전 인근 땅값이 폭락하고, 던전 앞에 편의점이 생기고, 던전 몬스터 부산물을 파는 노점이 생겼다. 뉴스에서는 매일같이 '인류 최대의 위협'이라는 자막을 붙였는데, 정작 그 인류는 던전 앞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으며 출근을 했다. 그리고 십 년쯤 지나자 다들 이걸 그냥 출퇴근길 공사장처럼 여기게 되었다. 공사장 옆으로 지나가면서 안전모 쓴 인부들을 신기해하지 않는 것처럼, 던전 앞을 지나가면서도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만 빼고.
나는 열다섯이다. 국가헌터관리국에 등록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등록하려면 부모 동의서가 필요한데, 우리 부모님은 삼 년 전에 사업이 망해서 빚만 남기고 잠적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외국으로 튄 게 아닌가 싶다가도, 외국 갈 돈이 있었으면 빚을 왜 남겼을까 싶어서 그 생각도 접었다. 빚은 나한테 상속됐다. 상속세는 안 내도 되던데 빚은 왜 상속이 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법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편의적으로 만들어진 건가 싶기도 하다.
아침 일곱 시,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저장 안 해놨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알았다. 삼 년째 듣는 목소리라 이제는 성문 분석 없이도 구별할 수 있다.
"도훈 학생, 이번 달 이자 밀린 거 알죠?"
"네, 알아요. 오늘 던전 뛰고 바로 넣을게요."
"우리도 계속 봐줄 수가 없어요. 다음 주까지 삼십만 원 안 들어오면—"
"넣는다고요."
"학생, 우리가 자선단체가 아니에요."
"저도 자선사업 받는 거 아닌데요."
전화기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아마 뭐라고 쏘아붙이려다가 그냥 끊는 게 더 편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통화가 끝났다.
전화를 끊고 라면을 끓였다. 냄비에 물을 올리면서 옆에 쌓아둔 잡동사니 더미를 뒤적였는데, 그 안에서 손톱만 한 유리병 하나가 잡혔다. 던전에서 주운 물건들은 일단 다 그 더미에 던져놓는 게 습관이었다. 뭔지 몰라도 팔면 돈이 될 수도 있으니까. 국물에 뭘 넣었더니 색이 이상하게 반짝였는데, 알고 보니 며칠 전 던전에서 주운 '만능약'을 냄비 옆에 뭐가 있나 하고 놔둔 걸 국물에 흘려 넣은 거였다. 만능약이 뭔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그냥 이름이 그럴싸해서 라면에 타 먹었다. 맛은 딱히 안 좋아졌다. 오히려 좀 씁쓸한 향이 나서 계란이라도 넣었어야 했나 후회했을 뿐이었다. 나중에 던전갤에서 그게 어느 정도 물건인지 알았을 때 나는 진심으로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시세로 육백만 원짜리를 라면 국물에 타 먹은 셈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뭔가를 주우면 반드시 이름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던전갤. 정식 명칭은 '던전 정보 공유 갤러리'인데 아무도 그렇게 안 부른다. 내가 열두 살 때, 처음으로 던전에 강제로 끌려 들어가 죽을 뻔했을 때 우연히 알게 된 커뮤니티다. 그날 어른들 몇 명이 나를 미끼로 쓰고 도망갔는데, 던전갤에 실시간으로 상황을 중계하듯 글을 올렸더니 누군가 검을 어떻게 쥐어야 하는지,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날 이후로 삼 년간, 나는 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익히고 몬스터를 썰었다. 스파르타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지금 내가 살아있는 이유의 절반은 그들 덕분이라는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순전히 운이고. 가끔은 그 비율이 반대인 것 같기도 하다.
렌즈를 꼈다. 던전갤 조언대로 개조한 값싼 스마트 렌즈인데, 음성으로 게시글을 올릴 수 있게 되어 있다. 손이 바쁠 때—예를 들어 몬스터 목을 썰고 있을 때—도 실시간으로 글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처음 이걸 개조해준 사람은 던전갤에서 '땜장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이었는데, 얼굴 한 번 본 적 없이 부품 값만 계좌로 부치고 받았다. 왜 이런 걸 만들었냐면, 던전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하니까. 나 혼자 죽으면 아무도 모르지만, 던전갤에 '나 죽을 것 같음ㅋㅋ'이라고 올리면 최소한 누군가는 조롱이라도 해줄 것이다. 조롱도 관심의 한 형태라고 나는 믿는다.
오른손 약지에는 낡은 반지가 끼워져 있다. 이름도 모르는 물건인데, 던전 어느 구석에서 주웠을 때부터 말을 걸어왔다. 처음엔 미쳤나 싶어서 반지를 빼서 던지려고 했는데, 그날 밤 잠자리에서까지 잔소리가 이어지길래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도 그 브로커 놈 만나러 가는 게냐.'
"영감, 아침부터 잔소리야?"
'네가 그 반지를 낀 지 반년이 다 됐는데, 아직 내 힘을 한 번도 써보지 않았지. 팔면 얼마 못 받는다고 계속 우기던 게 누구더냐.'
"어차피 감정도 안 되잖아. 감정소 아저씨가 그냥 장식용 반지랬어."
'그 감정사가 눈이 삔 것이지.'
"그럼 영감이 직접 팔릴 곳을 찾아주든가."
'…내가 팔릴 물건이더냐, 인간아.'
영감이라 부르는 이 목소리는 처음엔 무서웠는데, 반년쯤 같이 살아보니 그냥 잔소리 심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존재라는 걸 알았다. 물론 가끔 위험한 순간에 뭔가 알려주긴 하는데, 그때마다 대가로 뭘 요구할지 몰라서 최대한 안 부른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건 내가 열두 살 때 이미 배웠다. 영감도 그걸 아는지, 자기 힘을 쓰라고 할 때마다 대가에 대해서는 묘하게 말을 흐렸다.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라면 국물이 담긴 냄비를 그대로 놔뒀다. 설거지는 나중에 하면 된다. 어차피 오늘 저녁까지 살아 돌아올지도 확실하지 않은 마당에 설거지 순서를 걱정하는 건 사치였다.
오늘 의뢰는 필구 삼촌한테서 받았다. 필구 삼촌은 뒷골목에서 무면허 헌터한테 일 물어주는 브로커다. 국가헌터관리국이 정식 등록 헌터한테만 의뢰를 뿌리다 보니, 나 같은 애들은 이런 사람 통해서 일을 받는다. 수수료 이십 퍼센트를 떼가지만 어쩔 수 없다. 불법 취업엔 항상 뒷돈이 낀다. 필구 삼촌은 늘 편의점 앞 파라솔 아래에 앉아서 담배를 태우며 사람을 기다렸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좀 쉬운 거다. 미노타우로스 소굴, D등급. 사설 던전이라 관리국 눈치 볼 필요도 없어."
"D등급이면 얼마 줘요?"
"오십만 원."
"D등급에 오십이나 줘요? 좀 이상한데."
"의뢰인이 급하대. 원래 파티 꾸려서 갈 던전인데 파티가 깨졌다나. 너 혼자 가도 충분하다니까."
"파티가 왜 깨졌는데요?"
"몰라. 나야 심부름꾼이지 탐정이냐?"
필구 삼촌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웃었다. 저 웃음이 뭘 숨기고 있는지 나는 삼 년 동안 배웠다. 하지만 그 웃음을 캐물을 여유가 나한테는 없었다.
의심스러웠지만 오십만 원이면 이번 달 이자를 넣고도 라면값이 남는다. 계좌 앱을 열어 잔액을 확인했다. 이자 낼 돈도 간당간당한 판에 무슨 여유를 부리겠나. 나는 그날 오후 사설 던전 입구 앞에 섰다.
입구는 낡은 컨테이너 두 개를 겹쳐 세워둔 것처럼 초라했다. 사설 던전은 대개 이런 식이다. 관리국이 관리 안 하니까 시설 투자도 없다. 대신 등급 표지판만 형식적으로 하나 세워둔다.
입구 옆에 등급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D라고 적힌 부분이 스프레이로 대충 칠해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원래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표지판 아래쯤 누군가 뜯어낸 자국도 보였다. 나사 구멍만 남아 있고 원래 있어야 할 부속 안내판이 사라진 흔적이었다.
'이상하구나.'
영감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표지판을 한 번 더 보고,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등급 표지판이 낡아서 그런 거겠지."
'그게 낡아서 저렇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너도 알 텐데.'
"그럼 뭔데?"
'누군가 등급을 바꿔치기했을 게다. 원래 있던 표지를 뜯어내고 새로 스프레이질을 했겠지.'
"D보다 위였다는 거야, 아래였다는 거야?"
'그건 나도 모르지. 다만 아무도 위험한 던전을 낮은 등급으로 속이지는 않는 법이다.'
알긴 알았다. 그런데 오십만 원이 눈앞에 있는데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여유가 나한테는 없었다. 이자는 매달 착실히 불어났고, 나는 매달 착실히 던전에 들어갔다. 세상 이치가 그런 거였다. 손끝이 살짝 시렸다. 긴장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는데, 그 시린 느낌마저 이제는 무시하는 법을 배웠다.
던전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습한 바람이 밀려 나왔는데, D등급 던전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었다. D등급이라면 흙냄새나 몬스터 특유의 누린내가 나야 하는데, 이건 뭔가 더 깊고 축축한, 지하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냄새였다. 나는 그걸 알아챘지만, 이미 문턱을 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