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딱, 하루치의 기적

1화

강태민은 통장을 세 번 확인했다.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0원. 정확히는 1,240원. 커피 한 잔도 못 사는 돈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다시 켰다. 형에게 보낸 문자는 아직 읽지 않음이었다. 어제 오후에 보낸 문자였다. 등록금 200만 원, 잘 맡아줘. 절대 손대지 마. 나 대신 넣어줘야 돼. 그렇게 세 번을 강조했었다. 답장은 없었다. 태민은 방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거실에서 아버지 강만수가 뉴스를 보고 있었다. 어머니 이순자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저녁이었다. "형 어디 갔어요." 태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순자가 그릇을 헹구며 대답했다. "몰라. 어제 나가서 안 들어왔어." "제 등록금 통장, 형한테 맡겼는데." 강만수가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뭐? 왜 그걸 태호한테 맡겨." "형이 요즘 투자 잘한다고 해서... 코인으로 두 배 만들어준다고." 말을 하면서도 태민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형 강태호는 3년째 백수였다. 그런 사람에게 등록금 200만 원을 맡겼다는 사실이 지금에서야 실감났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강만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으로 들어가더니 서랍을 뒤졌다. 잠시 후 나온 그의 손에는 낡은 통장 하나가 들려 있었다. 태호의 이름으로 된 계좌였다. 은행 앱을 켜서 확인하자, 거래 내역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온라인 카지노. 스포츠 베팅. 코인 선물 거래소. 금액은 전부 빠져나가 있었다. 마지막 거래는 어제 밤 11시 47분. 잔액 0원. 태민은 휴대폰을 쥔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200만 원. 등록금 전액. 형이 하룻밤 사이에 전부 날려버린 것이다. "이 새끼가 진짜..." 강만수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이순자는 여전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물소리만 들렸다. 태민은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등록금은 사라졌다. 다음 학기 등록은 물 건너갔다. 취업 준비는 더 늦어질 것이다. 억만장자가 되겠다던 계획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흩어졌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형을 믿었을까. 왜 굳이 그 돈을 맡겼을까. 대답은 뻔했다. 그냥,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기기를 바랐던 것이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취업 준비를 하고 스펙을 쌓는 것 말고, 단번에 인생이 바뀌는 무언가를. 그런데 결과는 이거였다. 방으로 들어간 태민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빛이 눈을 찔렀다. 휴대폰이 울렸다. 형이었다. [미안. 갚을게. 시간만 좀 줘.] 태민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던져버렸다. 벽에 부딪힌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자정이 넘도록 태민은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아도 통장 화면이 떠올랐다. 0원. 그 숫자가 눈앞에서 계속 깜빡였다. 그때였다. 웅— 낮고 무거운 울림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태민은 몸을 일으켰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방문도 잠겨 있었다. 웅— 다시 울렸다. 이번엔 몸속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가슴 한복판이 뜨거워졌다. 숨을 멈췄다. 손끝이 저릿했다. 발끝부터 무언가가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었다. 태민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가슴에 갖다 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형광등 불빛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 것은 불빛이 아니라 태민의 시야였다. 점. 선. 물결. 탑. 네 개의 문양이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태민은 그것들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손끝이 허공을 갈랐다. 다음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방바닥이 사라지고 발밑이 텅 비었다. 태민은 추락하는 감각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등록금도, 형도, 취업 걱정도 전부 아득해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는 낯선 공간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얀 벽. 차가운 형광등 불빛. 정면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걸려 있었고, 그 위로 낯선 글자들이 떠올라 있었다. [각성 적성 판정 센터] 태민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여전히 차가웠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런 일이 매일 일어나는 것처럼. 한 남자가 태민에게 다가왔다. 백발에 근육질의 체형이었다.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눈빛만은 젊은이보다 날카로웠다. "신규 각성자군." 남자가 말했다. 태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이름은?" "강... 강태민입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에 든 태블릿을 몇 번 두드렸다. "미스터 박이라고 부르면 된다. 판정 시작 전에 몸 상태부터 확인하지." 태민은 그제야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까지 그는 등록금을 잃은 대학생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알 수 없는 판정을 앞두고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미스터 박의 시선이 태민의 몸을 훑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겁먹은 청년을 보았다. 그런데 미스터 박은 다른 걸 보고 있었다. 태민의 가슴 한복판, 옷 속에 가려진 그 자리에서 아주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미스터 박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좀 다르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태민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판정실 저편 스크린에서 붉은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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