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세 시간 뒤, 태민은 다시 판정대 위에 누웠다.
천장의 조명이 눈에 익었다. 하얀 벽. 차가운 공기. 소독약 냄새와 정전기 특유의 미묘한 쇳내가 뒤섞인 판정실. 몇 시간 전과 똑같은 자리였다. 그런데 이번엔 어딘가 달랐다. 방 안의 온도가 조금 더 낮게 느껴졌다.
미스터 박은 이전보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태블릿을 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아주 짧았지만, 태민의 눈에는 분명히 들어왔다.
"이번엔 중단 없이 끝낸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하려 했지만 목이 말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패드가 다시 붙었다. 차가운 젤 같은 것이 관자놀이와 손목에 닿았다. 심장 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렸다.
두근. 두근.
박자는 일정했다. 태민은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조금이라도 덜 긴장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도 심장 소리는 계속 울리고 있었다.
"시작한다."
스크린에 숫자가 다시 떠올랐다. 이번엔 처음부터 안정적이었다. 숫자는 천천히, 일정한 속도로 올라갔다. 미스터 박의 미간이 살짝 풀렸다.
"괜찮아 보이는군."
그의 목소리에 안도가 섞여 있었다. 다른 판정관 하나가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엔 별일 없이 끝나겠네요."
미스터 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숫자가 다시 흔들렸다. 이번엔 이전보다 격했다.
뜨거움이 몸을 휘감았다. 태민은 이를 악물었다. 눈앞이 하얘졌다. 팔다리 끝에서 시작된 감각이 순식간에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마치 몸속에서 전기가 튀는 것 같았다.
"으..."
태민은 소리를 삼켰다. 소리를 내면 판정이 중단될 것 같았다. 아까처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는 건 견딜 수 없었다.
미스터 박은 화면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의 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판정관들은 단순 오류라고 여겼다. 한 명이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또 저러네. 장비 문제인가."
그런데 미스터 박은 그 흔들림의 패턴을 하나씩 읽고 있었다. 무작위처럼 보이는 숫자의 요동에는 미묘한 규칙이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아주 오래된 기록과 겹치는 규칙이었다.
숫자가 오르고, 잠깐 멈추고, 다시 오르는 간격. 그 간격이 일정한 리듬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심장이 두 번 뛰는 것처럼.
"...설마."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태블릿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숫자가 마침내 하나로 고정되었다.
[측정 완료]
[스킬 확정 중...]
태민의 몸에서 열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뜨거웠던 감각이 물러가고 나니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천장의 조명이 눈부시게 밝았다.
"끝난 건가요?"
"거의."
미스터 박은 태블릿을 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놀람과 의심, 그리고 그 뒤에 숨은 무언가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뭔데요. 왜 그런 표정이세요."
"...보면 안다."
스크린이 완전히 검게 변했다가, 천천히 글자를 새겨냈다.
[스킬명: 손가락 스냅]
[등급: F]
[효과: 손가락을 튕겨 상대를 놀라게 함. 사용 시 자신의 체력 소모]
판정실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태민은 그 글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싶어서. 글자는 그대로였다. 손가락 스냅. 등급 F.
"이게... 전부인가요?"
미스터 박은 대답 없이 태블릿을 다시 두드렸다. 데이터를 확인하는 손길이 빨라졌다. 화면을 넘기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또 넘기는 동작이 반복되었다.
"등급 F. 확정입니다."
옆에 있던 다른 판정관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는 서류에 도장을 찍으며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F등급 중에서도 최하위권 스킬이군요. 이런 건 보통 등록도 안 하고 방류하는데."
태민은 몸을 일으켰다. 손끝이 여전히 저릿했다. 몸이 아직 완전히 식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방금 얻었다는 스킬은, 손가락을 튕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게 제 힘이라고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스스로도 그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그런 것 같군."
미스터 박이 짧게 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까와는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단순히 결과를 통보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른 판정관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낮게 킥킥거렸다.
"손가락 스냅이라니. 몬스터 앞에서 그거 쓰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놀라서 도망갈까요, 아니면 웃다가 갈까요."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도 피식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판정실 안에 낮게 퍼졌다.
태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과 억울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등록금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그 자리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까지 견뎌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거 취소 안 됩니까. 다시 판정받으면..."
"한 번 확정된 스킬은 바뀌지 않는다."
미스터 박이 잘라 말했다. 그 말투는 단호했다.
"세상에 어떤 이유가 있어서, 다시 판정을 받아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 그건 시스템의 규칙이야."
태민은 고개를 숙였다. 등록금을 잃은 날 밤, 이상한 신호를 느끼고 이곳까지 끌려와서 얻은 것이 손가락을 튕기는 스킬이라니. 이보다 어이없는 결말이 있을까 싶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그럼 저는 이제 뭘 해야 하나요."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보통은... 각성자로 등록하지 않고 그냥 살아간다. 이 등급으로는 던전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위험해."
미스터 박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안타까움이 섞였다.
"내가 다른 길을 추천해도 되겠나. 각성자 말고, 일반 직장을 알아보는 게..."
태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등록금을 잃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지금,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손끝이 여전히 차가웠다. 아니, 판정 중 뜨거웠던 몸이 식으면서 오히려 더 차갑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미스터 박은 태민의 표정을 오래 살폈다. 그 시선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낙담한 청년을 보았다. 서류를 정리하는 판정관도, 옆에서 킥킥거리던 직원도, 그들이 보는 것은 그저 F등급을 받고 실망한 흔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미스터 박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손가락 스냅이라는 스킬 등급 뒤편에, 여전히 남아 있는 그 희미한 빛. 판정 중 두 번이나 시스템을 흔들었던 그 이상 반응. F등급 스킬 하나가 그런 반응을 일으킬 리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미스터 박은 태블릿의 화면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숨겨진 로그를 확인하는 손길이었다. 화면을 넘기고, 검색창에 판정 시간을 입력하고, 다시 화면을 넘겼다. 손가락이 점점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화면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지운 것처럼, 판정 중 있었던 두 번의 이상 반응 기록이 사라져 있었다. 로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끄럽게,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었다.
"...누가 손댔군."
미스터 박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태민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스크린에 뜬 F등급이라는 글자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인증 절차는 옆방에서 진행한다. 담당자가 따로 있어."
미스터 박이 문을 가리켰다. 손끝이 여전히 태블릿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 가면... 뭘 하나요?"
"스킬을 정식으로 등록하고, 각성자 신분증을 받는다. 등급이 낮아도 절차는 똑같아."
태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몇 시간 사이 두 번의 판정을 받은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문을 열기 직전, 뒤를 돌아보았다.
미스터 박은 여전히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심각해 보였다. 화면에 뜬 무언가를 뚫어지게 노려보는 눈빛이었다.
"저기..."
"뭔가."
"제 스킬에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나요?"
미스터 박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아니다. 그냥 절차상 확인할 게 좀 있어서."
거짓말이라는 걸 태민도 어렴풋이 느꼈다. 말투와 시선이 어긋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더 캐물을 여력은 없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는 태민의 뒷모습을 보며, 미스터 박은 태블릿 화면을 다시 두드렸다.
지워진 로그 자리에, 아주 작은 글자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관측 대상 등록: 코드명 —]
코드명이 채워지기 전에, 화면이 다시 꺼졌다.
미스터 박은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태블릿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화면을 다시 켜려 했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같은 지점에서 꺼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누군가 그 이상의 정보를 보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 같았다.
창밖으로, 판정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인증 담당 직원의 구두 소리였다. 또각또각.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소리가 복도의 벽을 타고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미스터 박은 태블릿을 품에 안듯 감싸며,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발소리는 이제 문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