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식신이 전생 원수라니

4화

"방금 그거 다시 보여줘." 나는 명령처럼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손끝이 차가웠다. 방금까지 분명 뜨거웠는데. 천랑은 고개를 기울였다.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이글거렸다. 그 눈이 나를 향할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억. 방금 나한테 보여준 기억." 짐승의 붉은 눈이 나를 잠시 응시했다. 대답이 없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2시 47분. 빗소리가 창을 두드리는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그 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한테 목소리를 들려줬잖아." "저는 아무것도 보여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니었다. 분명 들렸다. 다정한 웃음,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목소리. 낮고 부드러운 톤. 누군가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어조였다.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알아버렸다. "거짓말하지 마."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천랑의 털을 움켜쥐었다. 털은 부드러웠다. 그런데 그 부드러움 밑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흘러들지 않았다. 다시 시도했다. 손가락을 더 깊이 파묻었다. 또 아무것도 없었다. 세 번째 시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손톱이 살짝 파고들 정도로 힘을 줬는데도. 그런데 그게 더 무서웠다. 처음 만졌을 때는 분명 있었는데, 지금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우연이라면 있다가 없다가 할 수 없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문을 닫았다는 뜻이었다. 천랑이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너 안에 뭐가 있어." 천랑은 침묵했다. 붉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놓쳤다면 놓쳤을 정도로 짧았다. 그런데 나는 놓치지 않았다. "대답해." "저는 당신의 식신입니다." 짐승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말이 오히려 확신을 굳혔다. 뭔가를 숨기는 사람은 언제나 같은 말만 반복한다. 같은 문장, 같은 어조, 같은 속도로. 마치 대본을 외운 것처럼. 하람이었을 때, 유겸도 그랬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죽기 전날 밤, 유겸이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는데, 손이 떨렸다. 나는 그때 그 떨림을 걱정이라고 오해했다.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요즘 일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그렇게 넘겼다. 그게 마지막 밤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 말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왜 지금 그 기억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다시 천랑에게 물었다. 목이 말랐다. 입술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너, 전에 다른 주인이 있었어." 짐승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 몸짓이 대답이었다. 말보다 정직한 대답이었다. "있었지." 낮게 흘러나온 대답이었다. 거의 한숨처럼 들렸다. "누구야."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해." 나는 소리를 높였다. "나한테는 중요해."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빗소리가 더 커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실제로는 똑같았을 것이다. 내 심장이 빨리 뛰어서 그렇게 느껴진 것뿐이었다. 천랑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뭔가 다른 게 그 안에 있었다. 미안함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일까. 구분할 수 없었다.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짐승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제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순간 확신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등줄기부터 목덜미까지, 차가운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부정할수록 더 명확해졌다. 머릿속에서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고 있었다. 처음 계약했을 때 느껴진 이상한 익숙함. 가끔씩 짐승의 눈빛에서 스쳐가던, 사람 같은 표정. 그리고 방금 흘러들어온 그 목소리. 전부 하나로 이어졌다. 천랑의 몸 어딘가에, 그 존재의 뿌리 어딘가에, 유겸이 있었다. 어떤 형태로 있는지는 몰랐다. 영혼인지, 잔재인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재구성된 건지. 가능성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영혼이 짐승의 몸에 봉인되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영혼의 일부만 남아 짐승의 본능과 뒤섞였을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유겸이라는 존재 자체가 완전히 해체되어 천랑을 구성하는 재료 중 하나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끔찍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나를 죽인 사람이, 지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 손이 떨렸다. 이가 갈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유겸의 얼굴이 떠올랐다. 웃고 있었다. 다정하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리고 다음 순간, 칼이 있었다. 기억이 거기서 끊겼다. 언제나 그 지점에서 끊겼다. "계약을 파기할 거야." 나는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천랑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 눈이 나를 응시했다. 동요도, 두려움도 없었다. "계약을 파기하면 어떻게 되는데." 물으면서도 이미 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시면, 저는 사라집니다." 담백한 대답이었다. 감정도, 저항도 없었다. 너무 쉽게 나오는 대답이 오히려 이상했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말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평온할 수 있을까. 그 태도가 더 이가 갈리게 만들었다. 내가 아는 유겸이라면, 이렇게 순순히 자신의 소멸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유겸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죽기 전까지 다정했던 사람이, 마지막 순간 나를 찔렀다. 그 두 개의 모습 중 어느 쪽이 진짜였는지, 나는 여전히 몰랐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목이 잠겨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질문하십시오." 천랑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마치 이 순간을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네가, 유겸이야." 말을 내뱉은 순간,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방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침묵이었다. 창밖에서 빗소리만 들렸다. 똑, 똑, 똑.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오전 3시 02분. 15분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무너졌다. 천랑은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 걸린 침묵이었다. 10초. 20초. 30초가 넘어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침묵 자체가 이미 대답이었다. 부정도, 인정도 하지 않는 그 태도가. 오히려 어떤 말보다도 선명하게 나에게 답을 주고 있었다. 천랑의 붉은 눈이 나를 응시했다. 그 눈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다른 것을 보았다. 사람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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