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오전 3시 51분.
방 안의 냉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겨울 공기가 어느새 미열을 품고 있었다.
아니, 미열이 아니었다.
내 몸에서 뭔가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천랑은 여전히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대답 없는 침묵이 계속됐다.
짐승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살아있는 존재라면 있어야 할 소리가,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소환진의 흔적을 내려다봤다.
검은 자국이 마룻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불로 지진 것처럼 선명했다.
손끝으로 만져보니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계약을 파기할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그 선택 하나가 모든 걸 결정할 것 같았다.
식신전서를 다시 펼쳤다.
낡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계약 파기에 대한 항목을 찾았다.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떨렸다.
[계약 파기 시, 식신은 소멸한다. 그러나 소환자가 얻은 힘의 일부도 함께 상실된다.]
힘의 일부.
무엇을 얻었는지도 아직 모르는데, 무엇을 잃을지 먼저 알아야 했다.
나는 손바닥을 봤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그런데 몸 안에서 뭔가 다른 게 흐르는 감각이 있었다.
피가 도는 방향이 바뀐 것 같았다.
심장에서부터 손끝까지, 낯선 무언가가 흘러갔다.
마력.
요력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었다.
요력은 늘 뜨겁고 답답했는데, 이건 차갑고 매끄러웠다.
얼음물 속에 손을 담근 것 같은데, 얼지는 않았다.
측정기에 대면 뭐라고 나올지 궁금했다.
0.3이 아닐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확신이 어디서 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알았다.
"네가 유겸이라면."
나는 다시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나를 죽였어."
천랑은 눈을 감았다.
붉은 눈동자가 사라지자 방 안이 조금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저는 유겸이 아닙니다."
"방금 대답 안 했잖아."
나는 다그쳤다.
짐승의 앞발이 살짝 움직였다.
대답을 준비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자세를 바꾸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는 당신의 식신입니다."
짐승은 또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제게 남은 것은 그것뿐입니다."
남은 것.
그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뭔가 있었는데 지금은 남은 것만 있다는 뜻이었다.
원래의 유겸은 이미 없다는 걸까.
아니면, 유겸이라는 존재의 일부만 이 짐승 안에 녹아들어 있는 걸까.
나는 다시 물었다.
"기억은 있어?"
"단편적으로."
"뭘 기억해."
천랑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침묵이 대답보다 더 무거웠다.
"칼."
짐승이 말했다.
"그리고 당신의 눈."
내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 짧은 대답 안에 얼마나 많은 게 압축되어 있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천랑을 바라봤다.
짐승도 나를 바라봤다.
붉은 눈에는 감정이 없었다.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오히려 안심이 됐다.
감정이 없다면, 복수심도 없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 나를 해치려는 의도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는 게 이상했다.
죽였던 사람의 잔재를 곁에 두고, 안심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는 다시 식신전서를 내려다봤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같은 문장을 세 번, 네 번 다시 읽었다.
[소환자가 얻은 힘의 일부도 함께 상실된다.]
그 문장만 계속 맴돌았다.
오전 4시 2분.
나는 천랑에게 물었다.
"파기하면 넌 어떻게 돼."
"소멸합니다."
"완전히?"
"완전히."
간단한 대답이었다.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소멸.
그 단어가 사람의 죽음보다 더 가볍게 들렸다.
나는 손등을 내려다봤다.
아직 아무 문양도 없었다.
그런데 벌써 그 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있지도 않은 걸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게 우스웠다.
오전 4시 12분.
나는 결정을 내렸다.
"파기 안 해."
천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처음 보인 반응이었다.
그 작은 변화가 방 안의 공기를 흔들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복수는 나중에 해도 돼."
나는 짧게 말했다.
"지금은 가문이 먼저야."
그건 반쪽짜리 진실이었다.
진짜 이유는, 이 힘을 놓을 수 없다는 거였다.
십이 년 동안 아무것도 아니었던 내가, 처음으로 뭔가가 될 기회를 잡았는데.
유겸의 잔재가 그 대가로 붙어 있다는 이유로 놓을 수는 없었다.
이기적인 선택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손이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천랑은 고개를 숙였다.
"명 받겠습니다, 주인님."
그 말과 동시에, 짐승의 몸이 빛으로 흩어졌다.
은빛 입자들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공기 중에 남은 잔광이 눈에 스며들어 눈이 시렸다.
빛은 작은 문양으로 변해 내 손등에 새겨졌다.
뜨거웠다.
아니, 차가웠다.
둘 다 맞고 둘 다 아니었다.
그 순간의 감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은빛으로 빛나는 발톱 자국 같은 문양이었다.
피부 속에서 빛이 스며 나오는 것처럼 은은했다.
계약이 완성됐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문양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손등을 만져봐도 아무 이물감이 없었다.
그냥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 같았다.
방 안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소환진의 검은 자국만 마룻바닥에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이 아침이 되면 사라질지, 계속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날이 밝아올 때까지 손등의 문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음 날, 조부님이 나를 처음으로 사당 앞에 불렀다.
사당 안은 향냄새가 짙었다.
조상들의 위패가 줄지어 놓여 있었고, 그 앞에 낡은 측정기가 놓여 있었다.
요력 측정기를 다시 손목에 채우라 했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았다.
측정기의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0.3.
0.3에서 시작한 숫자가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0.9.
1.4.
숫자판의 바늘이 떨리며 계속 우측으로 움직였다.
조부님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게 무슨."
조부님은 측정기를 다시 확인했다.
고장 난 게 아닌지 손으로 두드려보기까지 했다.
숫자는 여전히 올라갔다.
2.1.
그리고 멈췄다.
조부님은 나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게 놀라움인지, 의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등의 문양을 소매로 가렸다.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열흘 뒤, 명가들의 사교 모임에서 차가의 당주 차명훈이 황가를 향해 공개적으로 비웃음을 던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저 요력의 핏줄로 명가 행세를 하다니."
그 말이 여러 사람의 입을 거쳐 내 귀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 말을 전할 때마다 묘한 표정을 지었다.
동정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얼굴들이었다.
그 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 나는 웃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입꼬리가 올라갔다.
십이 년 동안 그런 비웃음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때는 매번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지금은 웃음이 나왔다.
손등의 문양이 은은하게 빛났다.
마치 대답하듯이.
나는 그 모임에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옷장을 열고, 가장 단정한 옷을 골랐다.
거울 앞에 서서 손등을 다시 확인했다.
차명훈.
그 이름을 입 안에서 조용히 굴려봤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