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협회 건물을 나서면서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60일 후 나는 다시 취업 준비생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도 자격 박탈이라는 낙인과 환수된 생계지원금이라는 마이너스 잔고까지 짊어진 채로.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라는 건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거기에 '전직 탐험가'라는 딱지까지 붙는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럴 순 없지' 하는 오기가 슬며시 올라왔는데, 이게 절박함인지 자존심인지는 나조차 헷갈렸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결과만 같으면 되는 거니까.
집으로 돌아와 상태창을 다시 열어놓고 마물사 관련 정보를 하나씩 훑어봤다. 협회 공용 게시판에 올라온 마물사 가이드는 딱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포획한 마물을 앞세워 소규모 전투를 대리하게 하고, 그 전투 결과의 일부 경험치를 소유자가 나눠 받는다." 요컨대 마물사는 직접 싸우는 직업이 아니라 마물을 부려서 싸우게 만드는 직업이었는데, 그렇다면 관건은 얼마나 좋은 마물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부리느냐는 것이었다. 게시판 댓글들은 대부분 하급 등급 마물사들의 하소연으로 가득했다. "슬라임 열 마리 잡아서 경험치 100도 안 나옴", "이 직업으로 F등급 딴 사람 실존 인물인가요?" 같은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점점 표정이 굳어갔다. 남들도 다 이 짓을 해봤고, 대부분 실패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몇몇 오래된 글 중에는 "마물 조합에 따라 대리전 승률이 크게 달라진다"는 식의 팁도 섞여 있었는데, 구체적인 수치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직접 부딧혀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내일부터는 진짜 몸을 굴려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다짐이라기보다는 반쯤 포기 상태의 각오였지만.
다음 날, 나는 다시 협회를 찾아 한소연에게 초심자용 던전 목록을 요청했다.
"혼자 가시는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 하고 그녀가 미리 못을 박듯 말했다. "마물사 초기 등급은 전투 지속력이 거의 없어서, 마물이 없는 상태에서 위협을 맞닥뜨리면 사망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래도 파티를 짤 시간도, 돈도 없어서요" 하고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한숨을 삼키더니 서류철에서 안내문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그럼 최소한 이 저층 던전으로 시작하세요. '초록 골짜기'라는 곳인데, 등장하는 마물 대부분이 슬라임 계열입니다. 위협도가 낮은 편이에요."
"슬라임이면... 안전하다는 거죠?" 하고 내가 확인차 되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고 덧붙였다.
"안전하다기보다, 죽을 확률이 낮다는 거예요. 그 차이는 분명히 알아두시길 바랍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안전과 '죽을 확률이 낮음'은 확실히 다른 문장이었고, 그녀가 굳이 그 차이를 짚어준 데에는 어떤 경고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어차피 죽을 확률이 0%인 곳은 없겠지' 하고 대충 넘겼다.
그 말투에서 어떤 진심 같은 걸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녀가 걱정해주는 게 나 개인이라기보다는 협회 통계에 사망자 하나 추가되는 걸 막고 싶은 것뿐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 순간엔 고맙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이 사람,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나는 그 생각을 곧바로 실없는 방향으로 발전시켼다. 접수원이랑 탐험가가 사귀는 클리셰 같은 게 있지 않던가, 하고. 물론 그런 헛생각은 그녀의 서늘한 눈빛 한 번에 곧바로 접어버렸다.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안내문을 한 번 더 톡톡 두드렸다.
"가시는 길에 초기 물자 지급소도 들르세요. 무기랑 방어구, 기본형으로 하나씩 받을 수 있습니다."
"기본형이면... 좋은 거예요?"
"싼 거예요."
그 대답이 너무 정직해서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녀는 내가 웃는 걸 보고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더 웃겼다.
물자 지급소에서 받은 물건들을 챙겨 초록 골짜기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스스로가 얼마나 초라한 장비를 갖췄는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무기라고 할 만한 건 협회에서 기본 지급한 녹슨 단검 하나뿐이었고, 방어구는 가죽 조끼가 전부였다. 단검 손잡이는 오래 써서 그런지 미끄덕거렸고, 가죽 조끼는 어깨 부분이 살짝 뜯어져 있었다. 이걸로 뭘 어떻게 싸운다는 건지 스스로도 의문이었지만, 애초에 마물사는 싸우는 직업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며 골짜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골짜기 초입은 이름과 달리 그리 푸르지 않았다. 오히려 누런 흙바닥에 듬성듬성 이끼가 낀 정도였고, 공기는 축축하고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발밑에서 흙이 부드럽게 꺼지는 느낌이 났는데, 그게 어쩐지 슬라임의 서식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나는 그 소리가 내 심장 소리보다 크게 들린다는 걸 깨닫고 조금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첫 번째 슬라임을 발견한 건 십 분쯤 지났을 때였다. 바위 뒤편에 몸을 반쯤 숨긴 채로 흔들거리고 있는 초록빛 덩어리였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표면이 미세하게 파동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나는 몸을 낮추고 접근하다가 단검으로 몇 차례 찔러 체력을 깎았는데, 슬라임이라는 게 생각보다 물컹거리는 저항력이 있어서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다. 칼을 찔러 넣을 때마다 슬라임은 몸을 움츠렸다가 다시 부풀어 오르길 반복했고, 그게 마치 나를 놀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은근히 짜증이 났다.
푸슉... 푸슈슉...
칼끝이 슬라임 표면을 뚫고 들어갈 때마다 나는 소리가 그랬는데, 그 축축한 소리를 들으면서 '이게 무슨 청춘 낭비인가' 싶은 자괴감이 살짝 들었지만 억지로 무시했다. 대학 졸업하고 이런 골짜기에서 슬라임을 찌르고 있을 거라고는, 스무 살의 나는 상상도 못 했을 거다. 그래도 지금은 이게 밥줄이니 어쩔 수 없었다. 체력이 30% 이하로 떨어지자 스킬이 자동으로 발동했다.
[스킬 '포획의 손길'이 발동했습니다.]
[포획 확률 계산 중...]
[포획에 성공했습니다.]
슬라임이 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고, 상태창의 '보유 마물' 항목에 슬라임 한 마리가 추가됐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저 이걸로 뭘 하면 되지, 하는 실용적인 의문만 들었을 뿐. 상태창을 한 번 더 열어 슬라임의 정보를 확인해봤는데, 이름도 없이 그냥 '슬라임 개체 001'이라고만 표기돼 있었다. 정 붙일 이름조차 안 붙여준다는 게 이 직업의 냉정함을 보여주는 것 같아 조금 서글퍼졌다.
두 번째 슬라임을 만났을 때, 나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포획한 첫 슬라임을 상태창에서 소환해 이 두 번째 슬라임과 싸우게 시켜본 것이다. 대리전 방식대로 마물끼리 부딧치게 만드는 게 이 직업의 정석적인 운용법이었으니까. 소환하는 순간 내 그림자에서 슬라임이 다시 튀어나왔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물웅덩이가 솟아오르는 것 같아서 신기하기도 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내 슬라임이 상대 슬라임에게 몸통 박치기 한 번 하고 나서 그대로 터져버렸다.
퍽!
젤리처럼 흩어지는 잔해를 보며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상태창에 뜬 문구를 확인했다.
[아군 슬라임이 전투 중 소멸했습니다.]
[경험치 12를 획득했습니다.]
숫자가 너무 초라해서 웃음도 안 나왔다. 12경험치라니, 이걸로 60일 안에 F등급을 딴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소린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하루에 이런 슬라임을 백 마리씩 잡아도 겨우 1200이었고, 그마저도 등급 승급에 필요한 경험치 총량을 모르니 감이 안 잡혔다. 나는 잠시 주저앉아 흙바닥에 손가락으로 숫자를 끄적여봤는데, 아무리 계산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곧 지워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문득 이상한 걸 하나 발견했다. 슬라임이 '싸우다가' 죽은 게 아니라, 몸통 박치기 한 번을 하자마자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몸통 박치기 한 번에 저렇게 죽을 마물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확인해보니 슬라임의 기본 체력이 낮은 게 아니라, 애초에 내가 시킨 행동이 '전투'가 아니라 '충돌'로 인식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즉 마물이 마물을 향해 몸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시스템상 어떤 특수한 처리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게시판에서 봤던 "조합에 따라 승률이 달라진다"는 말이 이거였을까, 하는 짐작도 들었다. 조합이 아니라 '방식'의 문제였다면, 애초에 다들 잘못된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손에 남은 세 번째 포획 슬라임을 꺼내, 이번에는 싸우게 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들어 상대 슬라임을 향해 냅다 던져보았다. 손바닥에 닿는 슬라임의 감촉은 미묘하게 미끈거렸고, 무게감은 젤리봉투 하나 정도였다. 힘껏 던지자 슬라임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상대 슬라임의 몸통에 정확히 부딧쳤다.
퍼억!
[아군 슬라임이 소멸했습니다.]
[경험치 47을 획득했습니다.]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47. 조금 전 12보다 거의 네 배에 가까운 수치였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 숫자를 세 번 더 확인했다. 혹시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봤는데, 여전히 47이었다.
'...이게, 뭐지?'
뭔가 잘못 눌린 버튼을 찾은 기분이었는데, 그게 정말 버그인지, 아니면 그냥 우연히 좋은 판정이 하나 걸린 건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직접 던졌다'는 행위 자체가 시스템상 별도의 스킬 판정으로 잡히는 걸지도 몰랐다. 아니면 던지는 각도나 속도가 특정 임계값을 넘으면 추가 보너스가 붙는 구조일 수도 있었고. 확인하려면 더 던져봐야 했다. 더 많이, 더 계속. 나는 남은 슬라임들을 하나씩 상태창에서 불러내며, 이번엔 좀 더 세게, 좀 더 다른 각도로 던져볼 생각으로 팔을 풀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는데, 그게 긴장인지 기대인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