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쫓겨났더니 미소녀 유튜버라니

2화

카운트다운이 0에 도달했다. 삐리릭. [구여신의 성소 - 5월 인기투표 최종 결과] [1위 강리아 / 2위 이한결 / 3위 박강철 / 4위 장서윤 / 5위 블랙폭스] 대기실 안의 조명이 결과창 색깔에 맞춰 은은하게 붉게 물들었다. 다들 화면만 쳐다봤다. 예상한 순위 그대로였다. 도현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지. 도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결이 노트북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에 미묘한 결단이 실려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지난달 정기 회의에서 결정한 벌칙게임 있지. 한결이 담담하게 말했다. 도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벌칙게임, 원래 자기가 제안한 룰이었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던진 룰이었다. 꼴등할 사람이 자기가 될 줄은 몰랐으니까. 인기투표 최하위는 파티에서 나가고, 2개월 안에 구독자 백만 못 찍으면 영구 은퇴. 채우면 복귀 심사. 그거 맞죠. 도현이 자기 입으로 정리해줬다. 맞아. 아이러니하지. 네가 만든 룰인데 네가 걸렸어. 리아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키는 리아가 도현보다 1cm 더 컸다. 도현이 그걸 지적할 때마다 리아는 무시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도현이 눈을 흘겼다. 중요하지. 내가 너보다 크다는 사실은 영원하니까. 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됐고. 통보할게. 오늘부로 블랙폭스, 구여신의 성소에서 제명. 리아가 태블릿을 내밀며 서류를 보여줬다. 화면에 뜬 제명 통보서. 글자 하나하나가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장서윤은 눈을 피하며 손톱을 만졌다. 박강철은 아무 말 없이 근육을 폈다. 한결은 안경을 고쳐 쓰며 화면만 보고 있었다. 다들 조용하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끄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네가 낸 룰이니까 억울해할 것도 없잖아. 리아가 팔짱을 풀며 말했다. 억울하진 않아. 다만 궁금한 게 있는데. 도현이 한결을 똑바로 봤다. 아까 게이트 얘기 진짜 안 믿을 거예요? 한결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네 사정이 급한 거 아니야? 한결이 되받아쳤다. 제 사정 급한 건 맞는데. 곧 님들도 급해질 거란 얘기죠. 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박강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몰라도 돼요. 지금은. 도현이 짧게 잘랐다. 리아가 서류를 도현 손에 쥐여줬다. 서명해. 정식 절차 밟아야지. 리아가 무심하게 말했다. 도현은 서류를 훑어봤다. 제명 조건, 채널 분리, 유예 기간 2개월.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복귀 심사 규정까지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 펜을 꺼내 서명란에 이름을 썼다. 이도현. 필체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로 흔들릴 거면 처음부터 이 판에 안 왔겠지. 도현이 속으로 생각했다. 서류를 다 정리한 뒤 대기실을 나섰다. 복도의 조명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복도 끝에서 서윤이 따라붙었다. 발소리가 다급했다. 미안해, 도현아. 서윤이 작게 말했다. 뭐가 미안해요. 투표한 사람이 잘못한 거지. 도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너 진짜 실력 있는 거 아는데. 왜 매번 캐릭터를 그렇게 잡아. 서윤이 조심스레 물었다. 음지형 중2병 흑마법사 컨셉, 그거 제가 잡은 거 아니에요. 제작팀이 잡은 거지. 도현이 짧게 대답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서윤이 걱정스레 물었다. 뭘 어떻게 해요. 2개월 안에 백만 찍어야죠. 도현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게 쉬운 줄 알아? 서윤의 눈이 커졌다. 지금 구독자 수 알아요? 백만이란 숫자가 무슨 로또번호처럼 들리죠, 그쪽한테는. 서윤이 말을 잇지 못했다. 쉬운 건 원래 재미없잖아요. 도현이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짧게 울렸다. 집으로 돌아온 건 밤 11시였다. 작은 원룸, 벽 한쪽에 화장품과 가발이 쌓여 있었다. 예전부터 취미로 만지던 물건들이었다. 실전에 쓸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방 안에는 짙은 원두 냄새가 남아 있었다. 아침에 내린 커피가 아직 식지 않은 채였다. 도현은 가방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곧장 거울 앞에 앉았다. 가발을 들어 머리에 얹었다. 검은 생머리, 어깨 아래까지 오는 길이. 메이크업 도구를 하나씩 꺼냈다. 파운데이션, 아이라이너, 립틴트. 줄줄이 늘어놓는 손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블랙폭스로는 안 되겠고. 도현이 거울 속 자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다들 실력보다 이미지 보는 거잖아. 그럼 이미지로 승부 봐야지. 손이 이미 파운데이션을 펴 바르고 있었다. 눈매를 부드럽게 그리는 손끝이 흔들림 없었다. 생각보다 익숙했다. 이상하게 재밌기도 하고. 도현이 피식 웃었다. 거울 속 얼굴이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있었다. 각진 턱선은 그대로였지만 눈매와 입술이 완전히 다른 인상을 만들어냈다. 삐리릭. [뒷세계 등급전 확대 정책 발표 - 개인 배포자 신규 등록 급증] 스마트폰 알림이 울렸다. 도현은 화면을 흘깃 봤다. 다들 발등에 불 붙었네. 도현이 피식 웃었다. 등급전 확대라니. 타이밍 한번 절묘하네. 도현이 화면을 손끝으로 넘겼다. 거울 속에 낯선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청순하고 여린 인상의 여고생. 립틴트를 살짝 두드리고 마지막으로 눈썹 라인을 손끝으로 다듬었다. 완성된 얼굴은 어디에도 이도현의 흔적이 남지 않았다. 이름은 벌써 정해뒀다. 윤하은. 도현의 눈이 거울 속 자신을 응시했다. 표정이 낯설게 진지해졌다. 2개월. 백만. 못 하면 진짜 끝이다. 머릿속으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채널 개설, 콘셉트 잡기, 초기 노출. 하나씩 순서를 그려보는 눈빛이 차분했다. 창밖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게이트 이상현상 관련 대응이 이미 시작된 모양이었다. 사이렌 소리가 길게 이어지다 뚝 끊겼다. 한결한테 경고했는데 무시할 줄 알았지. 도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곧 알게 될 거다. 게이트 얘기가 자기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걸. 도현은 화장품 케이스를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 내일부터 시작이다. 거울 속 윤하은의 얼굴이 조용히 도현을 마주 봤다.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이도현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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