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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강제 이행 명령서는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정도현이 얘기한 대로 회사는 더 이상 명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인사팀에서 결재란에 도장을 찍어 보내온 서류를 받았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삼 년치 감정이 서류 한 장의 도장으로 정리되는 게 이상했다. 도장 하나 찍는 데 몇 초나 걸릴까. 삼 년을 그 몇 초에 압축시킬 수 있다는 게, 회사라는 시스템의 무서운 점이었다. 서류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하는 동안 손끝이 유난히 차가웠다. 밖은 초여름이었는데도 그랬다. 마지막 출근 날, 자리를 정리하는데 짐이 별로 없었다. 삼 년을 다닌 회사인데 상자 하나에 다 들어갔다. 사무용품 몇 개, 명함 케이스, 누가 준 텀블러 하나. 그게 다였다. 사람이 회사에 쏟은 시간과 남는 물건의 양이 이렇게 비례하지 않는다는 게 씁쓸했다. 책상 서랍 맨 아래에서 삼 년 전 입사할 때 받은 사원증 케이스를 발견했다. 그때는 이 회사에서 십 년은 버틸 줄 알았다. 인간이 계획한 미래와 실제로 벌어지는 일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웃기게 벌어질 줄은 몰랐다. 정 대리가 다가와 상자를 같이 들어줬다. "진짜 나가는 거야?" "응." "뭐 할 건데." "당분간은 던전 모험가 자격증 딸까 해." 정 대리가 눈을 크게 떴다. 커피를 마시다 사레들릴 뻔한 표정이었다. "위험하지 않냐, 그거." "회사보다 덜 위험할 수도 있지." 농담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삼 년 동안 겪은 정치적 위험이, 던전에서 마주할 물리적 위험보다 덜 예측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적어도 던전에서는 위험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다가온다. 몬스터는 뒤에서 웃으며 다가와 등에 칼을 꽂지 않는다. 회사에서는 뒤통수를 언제 맞는지도 몰랐다. 인사평가 시즌마다 누가 나를 어떤 말로 씹었는지, 나는 끝까지 알지 못했다. "괜찮겠어? 몸도 안 만들어놨잖아." "만들어야지, 이제." 정 대리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상자를 엘리베이터까지 같이 옮겨줬다.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 때, 그 얼굴에 안도와 미안함이 반씩 섞여 있는 걸 봤다. 나를 대신해 남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국가던전관리청은 던전 입장 자격을 아무에게나 주지 않았다. 최소 체력 검정과 마석 감지 능력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고, 통과율은 삼십 퍼센트가 안 됐다. 다행히 마석 관련 업무를 오래 해온 덕분에 마석 감지 능력 쪽은 자신이 있었다. 체력은 문제였지만, 그건 시간을 들이면 될 일이었다. 삼 년 동안 야근으로 다져진 근성이라도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근거 없는 낙관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거라도 없으면 시작조차 못 할 것 같았다. 정도현이 던전관리청 사무실로 나를 다시 불렀다. "이런 일까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뭘 도와드렸다고. 그냥 규정대로 처리한 건데요." 정도현은 서류를 정리하며 웃었다. 그러다 표정을 조금 바꿔 말했다. "강태윤 씨, 마석 관련 업무 오래 하셨으니 아실 텐데. 던전 모험가는 회사원보다 훨씬 냉정한 세계예요. 여기는 인사평가로 안 자르고, 그냥 죽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시겠다는 거죠?" "네. 1년만 벌어서 인생 다시 설계하려고요." 정도현은 잠깐 나를 쳐다보다가, 서류철에서 입장 자격 신청서를 꺼내 건넸다. 종이를 넘기는 손끝이 사무적이면서도 어딘가 신중했다. "신청서 작성해서 다음 주까지 제출하세요. 체력 검정 일정도 같이 잡아드릴게요. 그리고—" "네?" "아뇨. 그냥, 잘 살아 돌아오시라고요." 그렇게 새로운 시작이 형식적으로 확정됐다. 서류에 서명하는 손이 이번엔 떨리지 않았다. 대신 펜 끝에 힘이 좀 과하게 들어갔는지, 이름 석 자가 유난히 진하게 찍혔다. 회사를 완전히 나온 지 사흘째 되던 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선배, 잠깐 볼 수 있어요?] 서연이었다. 회사 관련 일이 다 정리된 지금, 그녀가 다시 연락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동시에 걱정도 됐다. 마지막으로 복도에서 짧게 나눈 대화 이후로 그녀가 어떤 처지에 놓였을지 짐작이 갔다.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세 마디짜리 문장에 담긴 무게가 어울리지 않게 무거웠다. 약속 장소는 회사 근처가 아니라 시내 외곽의 조용한 카페였다. 서연이 굳이 이런 곳을 고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회사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뜻일 테고, 그건 곧 그녀가 지금 얼마나 조심스러운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먼저 도착해 있던 서연은 예전보다 더 초췌해 보였다. 화장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피로가 눈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손톱이 짧게 다듬어져 있었는데, 예전에는 항상 단정하게 기르고 다니던 그녀였다. "괜찮아?" "괜찮아요." 대답은 짧았고, 눈빛은 그 대답을 부정하고 있었다. "부사장님이랑 혼약, 그거 진짜로 진행되는 거야?" "네. 다음 달에 정식 발표할 거예요." "원해서 하는 거야?" 서연이 잠깐 침묵했다. 카페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그런 질문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의미 있지. 원하지 않는 결혼이면 도망칠 수도 있는 거잖아." "도망 못 쳐요.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랑, 못 치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못 치는 쪽이고요." 그 말에 담긴 무게가 느껴져서 더 묻지 못했다. 서연의 가족 사정이 어땠는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짧게 사귀던 시절 그녀가 흘렸던 말들을 조합해보면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빚, 병원비, 그런 것들이 그녀를 이 회사에, 그리고 이 혼약에 묶어두고 있었다. 한때는 저 조용한 목소리가 좋았다. 지금은 그 조용함이 뭔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걸 알아서, 듣는 게 더 불편했다. "저 도와주려고 하지 마세요." 서연이 먼저 그렇게 말했다. "내가 뭘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냥 걱정돼서." "걱정도 하지 마세요. 그게 더 위험해요." "뭐가 위험해." 서연은 대답하지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잠깐의 침묵 뒤,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던전 모험가 하신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 "회사에 소문 다 났어요. 부사장님도 알고 있고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회사를 완전히 나왔는데, 왜 내가 뭘 하는지가 아직도 그 회사 안에서 소문거리가 되는 건가. 퇴사한 직원의 근황까지 챙길 만큼, 그 회사가 나한테 관심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부사장님이 왜 그런 걸 궁금해해." "모르죠. 근데 요즘 부사장님이 던전 관련 사업에 관심이 많아지셨어요. 마석 채굴 사업 접고, 던전 원정 관련 투자 쪽으로 방향 트신다는 얘기도 있고요."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던전 원정 사업이라니, 그건 우연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내가 던전 모험가로 나선다는 걸 알고, 차경훈이 그쪽 사업에 관심을 갖는다는 게 단순한 시기적 일치일 리 없었다. 손끝이 갑자기 시려왔다. 카페 안이 그렇게 추운 곳도 아니었는데. "서연아, 그거 진짜야?" 서연은 시계를 흘끗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제 가야 해요. 부사장님이 곧 찾으실 거라." "잠깐만, 방금 그 얘기." 서연이 나를 내려다보며 잠깐 멈춰섰다. 표정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예전에, 우리가 아직 뭔가 애매한 관계였을 때 짓던 그 표정과 닮아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삼 년 전의 시간이 겹쳐 보였다. "선배, 던전 들어가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대요. 살아 돌아오는 사람들 보면요." "무슨 뜻이야." "그냥, 조심하라는 뜻이에요. 던전도, 그리고 던전 밖의 사람들도."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카페를 나갔다.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손에 든 커피가 완전히 식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녀가 나간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유난히 차게 느껴졌다. 일주일 뒤, 체력 검정과 마석 감지 테스트를 모두 통과했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체력 검정에서는 예상보다 훨씬 고전했다. 삼 년 동안 앉아서만 일한 몸이 오 킬로 달리기 앞에서 순순히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반면 마석 감지 테스트는 예상대로 여유 있게 통과했다. 사람 몸은 이렇게 불공평하게 훈련되는구나, 실감했다. 정도현이 직접 전화로 축하해줬다. "입장 자격 나왔어요. 첫 던전 배정은 다음 주 월요일이고요." "감사합니다." "참고로, 던전 원정 관련해서 요즘 큰 기업들이 투자 많이 하고 있어요. 자격 갓 딴 신입 모험가들 스카우트하려고 접근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조심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연이 했던 경고가 다시 떠올랐다. 던전 밖의 사람들도 조심하라던 말. 우연이 겹치면 그건 이미 우연이 아니었다. 포탈 입장일인 월요일, 나는 국가던전관리청 지정 포탈 앞에 섰다. 거대한 원형 게이트가 푸른빛을 내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너머로 뭐가 있을지, 아무도 완전히 알지 못했다. 게이트 주변에 서 있는 다른 신입 모험가들의 얼굴에도 비슷한 긴장이 어려 있었다. 다들 뭔가를 걸고 이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배정받은 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방어구는 대여품이었고,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이걸 입고 하루를 버틸 수 있을지,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강태윤 씨." 돌아보니 낯선 남자 셋이 서 있었다.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옷깃에 낯익은 로고가 박혀 있었다. 동방에너지 마크였다. "저희 부사장님이 뵙고 싶어 하십니다." 포탈이 뒤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제 겨우 회사와 완전히 끝냈다고 생각한 순간, 그 회사가 다시 나를 붙잡으러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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