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능 0, 노비가 된 정혼자

1화

대전 바닥의 냉기가 무릎을 뚫고 올라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이 순간이 오늘로 끝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설산가의 본전은 언제나 이렇게 서늘했다. 겨울에도 여름에도 온도가 변하지 않는, 사람의 체온이 스며들 자리가 없는 방이었다. 벽마다 걸린 문양들, 대대로 내려온 술식의 인장들이 은은한 빛을 내며 방 안의 온도를 낮추고 있었는데, 그 빛이 나를 향해서만은 단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릴 때는 저 문양들 앞에 몇 시간씩 서서 뭐라도 반응이 오길 기다린 적도 있었다. 손끝을 대보고, 이마를 대보고, 심지어는 혀를 대본 적도 있었는데—그때 나를 발견한 유모가 얼마나 기겁을 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웃긴다—결과는 늘 같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설인우." 증조부, 설현암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마치 오래전에 다 정해놓은 판결문을 그저 읽어 내리는 사람의 어조였다. 나는 그 목소리를 몇 번이나 들어봤을까. 명절마다, 제사마다, 가문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저 늙은이는 나를 향해 딱 그 정도의 온도로만 말을 걸었다. 손자의 손자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서류 뭉치 속 하나의 항목을 확인하는 태도였다. "열다섯이 되었는데도 구멍 하나 열리지 않았다." 영능력자의 몸에는 저마다 술식을 받아들이는 '구멍'이라 불리는 통로가 존재한다. 명문가의 혈통일수록 구멍의 수가 많고 그 크기가 커서 강력한 술식을 다수 운용할 수 있으며, 통상 십 세 전후로 첫 구멍이 열리는 것이 정상이다. 열다섯까지 단 하나도 열리지 않은 경우는 가문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고, 이는 곧 술식 계승이 불가능한 '결함체'로 분류된다는 뜻이었다. 결함체로 분류되는 순간 그 사람은 가문의 호적에서 지워지고, 이름 대신 처분 대상이라는 항목으로 재분류된다. 나는 이미 그 절차를 몇 번이나 남의 일처럼 지켜본 적이 있었다. 먼 친척 중 하나가, 또 다른 방계의 아이가—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안도했었다. 다음은 내가 아니라고. 그런데 결국 다음은 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된 사실 앞에서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열다섯 해를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몸속에서 뜨거운 게 끓어오르는 감각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까. 다른 애들은 구멍이 열리는 순간 몸이 타는 듯 뜨거웠다고, 뼈마디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렸는데, 나는 그 고통조차 가져보지 못한 채로 열다섯이 되어 있었다. 남들은 통증을 자랑했고 나는 통증조차 없어서 부끄러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프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인생이라니. "결함체를 이 가문 안에 둘 수는 없다." 설현암이 그렇게 말하며 손끝으로 탁자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 소리가 신호였는지, 대전 양옆에 서 있던 가솔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들 안에 동정 같은 건 없었고, 그저 오래전부터 준비된 절차를 지켜보는 무심함만 있었다. 몇몇은 아예 하품을 참는 듯한 얼굴이었다. 십오 년을 이 집에서 자랐는데, 저들에게 나는 그냥 예정된 순서 하나였을 뿐이구나 싶었다. 마치 계절이 바뀌는 걸 지켜보는 표정으로, 사람 하나가 버려지는 걸 보고 있었다. 하-. 이 씨발, 진짜로 오늘 하는구나. 겉으로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저 늙은이의 목을 몇 번이나 비틀어놓은 뒤였다. 물론 실제로 그럴 힘이 나한테는 없다는 게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었으므로, 나는 그저 주먹을 쥔 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각으로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손바닥에 반달 모양의 자국이 남는 게 느껴졌다. 피가 날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아프지가 않았다. 어쩌면 나는 통증을 느끼는 부위가 애초에 고장 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실없이 웃음이 나올 뻔했다. "당주님." 그 순간 뒤편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 있었다. 백은색으로 물든 삼단으로 묶인 머리카락이 걸음마다 살짝 흔들렸고, 담청색 눈동자는 이미 설현암을 향해 얼음보다 차가운 빛을 뿜고 있었다. 은소민이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언제나 그랬다. 소리가 나지 않는데도 존재감이 뚜렷했고, 대전 안의 공기 흐름 자체가 그녀를 중심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이 아이는 제 아들입니다." 혈연이 없다는 걸 이 대전 안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은소민은 설산가의 신관으로, 인우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라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 그냥 그녀가 그렇게 살기로 결정한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은소민에게 나는 서류상의 관계 같은 건 상관없이 그냥 아들이었다. 아마 그녀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그런 눈으로 봐준 사람이었을 거다. "신관, 오늘의 결정에 관여할 자격은 없소." 설현암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건 화가 났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조심스러워졌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미세한 낙차를 알아챘고,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받았다. 저 늙은이가 누군가의 앞에서 목소리를 낮추는 모습을, 나는 이 십오 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아이를 내치면." 은소민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말했다. 그 걸음이 특별한 것도 없는 평범한 발걸음이었는데도, 대전 안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벽에 걸린 문양들의 빛이 잠깐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건 아마 내 착각이었을 것이다. "저도 이 가문을 떠날 겁니다." 대전 안의 누구도 그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 가솔들 몇몇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시선을 교환했고, 누군가는 숨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오직 설현암만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 짧은 흔들림이 나에게는 대전 안에서 벌어진 그날의 가장 이상한 장면이었다. 왜 저렇게까지 동요하는 거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저 늙은이가 은소민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신관으로서의 능력만은 아닐 거라는 어렴풋한 의심이, 그때 처음으로 내 안에 생겨났다. 신관 하나 잃는다고 저렇게 동요할 사람이 아니었다. 설현암은 필요하면 신관 열 명이라도 새로 구해올 사람이었으니까. "결정은 이미 끝났소." 설현암은 은소민의 눈을 피하며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회피의 방식이 협박당한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를 감추려는 사람의 태도라는 걸 눈치챘다. 시선을 피하는 각도, 탁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갑자기 멈추는 타이밍, 그 모든 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의 몸짓이었다. "이 아이는 오늘 밤 안으로 가문을 떠난다. 이미 매입 의사를 밝힌 곳이 있으니, 그쪽으로 넘겨질 것이오." 매입.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사람을 사고파는 게 아직도 가능한 세상이라니, 씨발, 명문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그런 것도 합법이 되는구나 싶어서. 어디 가서 이런 얘기를 해도 아마 아무도 안 믿을 거다. 결함체로 낙인찍힌 명문가의 자제가, 마치 가구나 골동품처럼 다른 가문에 팔려나간다는 얘기를. "어디로." 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낼 수 있는 말은 그거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설현암은 나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금원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아주 오래전에 잊었던 기억 하나가 갑자기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작은 손, 나보다 조금 더 큰 손을 잡고 걷던 정원, 볕이 좋았던 오후, 그리고 누군가 웃으며 했던 말. "우리 나중에 결혼하는 거지?" 어릴 적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웃었던 것 같다.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그 손을 잡고 있는 게 좋아서. 은소민이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무릎을 굽혀 나와 눈을 맞췄다. 그 담청색 눈동자 안에 슬픔이 가득 차 있었는데, 그녀는 그걸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슬픔을 나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게, 그녀 나름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거짓으로 웃어 보이는 대신. "인우야."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방식은 언제나 조금 특별했다. 성이 없이, 그냥 이름만. 이 가문 안에서 나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그녀 하나뿐이었다. "금방 찾아갈게." 나는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 약속인지 그때는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대전을 나서는 내 등 뒤로, 설현암과 은소민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침묵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복도를 지나 대문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나는 그동안 스쳐 지나갔던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십오 년을 이 집에서 살았는데, 배웅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다못해 나와 같이 밥을 먹던 하인 아이 하나도, 문 앞에 서 있지 않았다. 그게 서러운가 하면, 놀랍게도 별로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담담해졌다. 이 집에 미련을 둘 이유가 그만큼 없었다는 뜻이었을 테니까. 밖으로 나오자 이미 마차 한 대가 대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검은 칠이 된 마차였는데, 문양 하나 새겨져 있지 않은 게 오히려 눈에 띄었다. 명문가끼리의 거래에 쓰이는 마차치고는 지나치게 수수했다. 마부는 나를 짐짝처럼 쓱 훑어보고는 별다른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그 문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설인우라는 이름이 더 이상 나를 부르는 이름이 아니게 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마차에 오르며 나는 마지막으로 대전이 있던 방향을 돌아봤다.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그 건물이, 이제는 완전히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닫히기 직전 아주 짧게, 저 멀리서 은소민이 나를 향해 뛰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다급하게 외치는 것 같았는데, 마차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 목소리는 끝내 나에게 닿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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