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설산가의 뒤편, 신관들의 처소로 이어지는 회랑에서 설현암과 은소민이 마주 선 순간, 그 공기가 얼마나 팽팽했는지는 나중에 진서라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그날 밤 진서라는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손끝을 떨었는데, 그녀조차 회랑의 모퉁이에 숨어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앞으로의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진서라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진 그 장면이 마치 내가 직접 본 것처럼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어디로 보냈습니까."
은소민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감정은 결코 낮지 않았다고 했다. 진서라 말로는, 그 목소리가 회랑의 돌벽을 타고 울릴 때 자기도 모르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고 했다.
설현암은 처음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지팡이를 짚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자신을 따라오는 은소민의 존재를 무시하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나이가 든 만큼 걸음도 무겁고 느렸을 텐데, 그 느린 걸음이 도리어 상대를 자극하려는 계산처럼 보였다는 게 진서라의 평이었다.
"신관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 이미 말했소."
"저는 그 아이의 어미입니다."
"혈연도 없는 신관이 대체 언제부터 그런 말을 할 권리를 가졌지."
설현암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 눈빛에 짜증과 함께 또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는데, 그 감정의 정체를 은소민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건 애정이라기보다는 소유욕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고, 진서라는 그렇게 표현했다. 늙은 남자가 젊은 신관을 붙잡아두려는 그 낡고 추한 욕망을, 이미 저택의 시녀들도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는 것이다.
"금원가로 보내셨겠죠."
은소민이 담담하게 그렇게 말하자, 설현암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어떻게 알았소."
"십 년 전 서명하신 문서를 저도 봤으니까요."
금원가와 설산가의 혼약 문서가 성립되던 당시, 두 당주 외에도 몇몇 고위 신관들이 목격자로 참관했다. 은소민 역시 그 자리에 있었으며, 서류의 존재를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이 사실을 오랫동안 발설하지 않은 채 지내왔는데, 이는 설현암이 이 계약을 자신의 다른 목적에 활용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관의 위계는 가문의 위계와는 별개로 운영되는 체계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각 가문에 소속되어 그 가문의 뜻을 따르는 게 관례였고, 그 관례 안에서 신관 개인의 의사는 종종 무시되기 마련이었다. 은소민 같은 고위 신관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당주님은 애초에 인우를 결함체로 만들 생각조차 없으셨겠죠."
은소민이 그렇게 말하며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냥 그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제 곁에서 떨어뜨려 놓을 방법이 필요했던 것뿐이잖아요."
설현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진서라의 말에 따르면, 그 순간 설현암의 지팡이를 짚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고 했다. 늙은 손등에 힘줄이 불거지고, 그 위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리는 걸 봤다는 것이다.
"저를 붙잡아 두려고, 그 아이를 팔아넘긴 겁니까."
은소민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그건 분노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던 추측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의 떨림이었다.
설현암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신관, 그대는 이 가문에 필요한 사람이오."
그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진서라는 그 목소리를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늙은 짐승이 먹잇감을 어루만지는 듯한 말투였다고.
"그대가 그 아이를 데리고 이 가문을 떠날 생각이라면, 나는..."
"그만하시죠."
은소민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의 담청색 눈동자에 서서히 서늘한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당주님이 저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저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 늙은 욕망을 위해 그 아이의 인생을 이용하셨다는 것도."
크르르르-
낮게 울리는 소리가 은소민의 몸 주변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술식이 발동하는 전조였고, 신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그 파동이 회랑의 벽에 걸린 술식 인장들을 미세하게 흔들리게 할 정도로 강했다. 회랑 곳곳에 새겨진 인장들은 원래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결계용이었는데, 그 결계용 인장들조차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희미하게 빛을 뿜어냈다고 하니, 은소민이 얼마나 격렬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는지 짐작이 갔다.
설현암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두려움 비슷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평생 위계 위에서 명령만 내려온 늙은 당주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신관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저택의 오래된 균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 아이를 팔아넘긴 서류, 지금 당장 무효로 하십시오."
"이미 계약은 성립되었소. 되돌릴 수 없소."
"그럼 저는."
은소민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그렇게 말했고,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냉기가 회랑의 바닥을 얇게 얼려가고 있었다. 진서라는 그 냉기가 자신의 발끝까지 닿아 신발 밑창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고 했다. 얼마나 지독한 냉기였는지, 회랑에 걸려 있던 등불의 심지마저 파삭하게 오그라들었다는 것이다.
"금원가로 갈 것입니다. 당주님께서 저를 붙잡아 두시겠다면, 이 가문에 남을 이유가 사라지는 걸 감수하셔야 할 겁니다."
설현암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소민의 살기가 실체 없는 위협이 아니라는 걸 그는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 신관의 등급 체계에서 은소민은 최상위 서열에 속하는 인물이었고, 그 술식의 위력은 설산가 전체의 결계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수준이라는 걸, 당주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서신을 하나 써주겠소."
마침내 그가 그렇게 말했다.
"금원가 당주에게 보내는 것으로,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 아이를 만나러 갈 수 있도록."
은소민은 그 대답을 듣고도 술식의 파동을 완전히 거두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엇을 더 원하시오."
은소민이 담청색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당주님의 그 늙은 욕망이 다시는 그 아이를 향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하십시오."
설현암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그 침묵이 길게 이어지는 사이, 회랑의 바닥을 뒤덮은 냉기가 점점 더 넓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진서라는 그 침묵이 어찌나 길었던지,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고 했다. 결국 그 침묵의 끝에서 설현암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진서라도 정확히 듣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은소민이 회랑을 떠날 때, 그녀의 발밑에 얼어붙었던 냉기가 서서히 녹아내리며 남긴 물기가 마치 눈물 자국처럼 보였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한편, 그날 밤 금원가의 저택에서는 하린이 자신의 방 창문 앞에 서서 어둠이 내린 정원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안에는 낮에 읽었던 서신의 사본이 접힌 채로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서신 원문에는 없던 짧은 문장 하나가 별도로 덧붙여져 있었다.
'설현암 당주가 은소민 신관의 신변을 담보로 삼아 인우를 축출시켰다는 사실이, 조만간 밝혀질 것이다.'
그 문장을 누가, 언제 이 사본에 적어 넣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린은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자신이 지금 성립시키려는 혼약이 단순한 가문 간의 약속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된 훨씬 더 크고 위험한 계획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원의 나뭇가지들이 밤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창틀을 타고 들어올 때마다, 그녀는 사본을 접었다가 다시 펴기를 반복했다. 그 손끝이 몇 번이나 종이의 접힌 자국을 문질렀는지, 그녀 자신도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다. 금원가라는 이름이 짐작보다 훨씬 더 무거운 그림자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 듯했다.
그리고 그 시각, 나는 진서라가 안내해준 좁은 방 안에서 낯선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도저히 정리할 수 없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낯선 향으로 가득했는데, 익숙하지 않은 그 향이 오히려 이곳이 더 이상 내가 알던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켰다. 창밖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밤새 울음소리조차 설산가에서 듣던 것과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설현암은 어머니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나는 그 답을 알 방법이 없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웠다. 천장의 나뭇결을 몇 번이나 눈으로 더듬으며, 나는 오늘 낮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보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눈앞이 흐릿해지고 생각들이 뒤엉킬 뿐이었다.
내일부터 이 저택에서 어떤 삶이 시작될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이 낯선 침대에 누운 첫날 밤, 어딘가에서 나를 둘러싼 계획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어렴풋하게라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느낌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그날 밤의 나로서는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