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처음 며칠은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얀 설산가의 풍경이 계속됐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새하얀 것들이 조금씩 옅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다른 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설산가 특유의 냉기 서린 회색빛 건물들이 사라지고 대신 짙은 녹음이 우거진 산길이 나타나기 시작할 즈음, 나는 이 여정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걸 실감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나무들을 보면서 나는 계속 생각했다. 설산가에서 보낸 열다섯 해. 결함체라는 낙인. 그 모든 것들이 이 마차 바퀴 아래로 하나씩 깔려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씨발, 실감이 안 나네. 사람이 이렇게 쉽게 팔려 가는 게 맞나 싶으면서도, 동시에 뭔가 후련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마부는 도착 직전 나에게 서류 한 장을 건넸다. 계약 노비 신원 증서라는 이름의 서류였는데, 거기 적힌 이름을 보고 나는 잠깐 멍해졌다.
강인우.
"설씨 성으로는 계약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마부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채찍을 든 손은 여전히 말고삐를 잡고 있었고, 시선은 나를 향하지도 않은 채였다.
"매입 절차상 원가문의 성은 지워지고, 매입가에서 새로 이름을 부여합니다. 규정입니다."
규정이라는 말이 참 편리하게도 쓰이는구나 싶었다. 사람 하나의 이름을 통째로 지우는 데 필요한 게 그저 도장 하나와 규정 조항 하나라니. 서류 위에 찍힌 붉은 인장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하-, 이 씨발 것들. 이름 하나 바꾸는 걸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처리하다니. 사람 목숨보다 도장이 더 무거운 세상이구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오히려 조금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설인우라는 이름 안에 갇혀 열다섯 해를 결함체로 살아온 시간을 그대로 벗어버릴 수 있다면, 그게 강인우든 뭐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이름이 뭐가 중요한가. 어차피 그 이름으로 얻은 거라곤 무시와 손가락질뿐이었으니까.
서류를 손에 쥔 채로 나는 창밖을 다시 바라봤다. 산길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고, 그 끝에 뭔가 거대한 게 보이기 시작했다.
금원가의 정문은 설산가와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냉기 대신 습기 어린 산의 기운이 가득했고, 건물의 외벽에는 나무와 이끼가 뒤섞인 오래된 흔적들이 남아 있어서, 마치 자연이 건물을 서서히 삼켜가는 중인 것처럼 보였다. 대문 자체도 거대한 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든 듯한 모양이었는데,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오래된 힘 같은 게 느껴졌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맞이한 건 넓은 정원과, 그 정원 한복판에 서 있는 한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으며, 흑발을 단정하게 넘겨 묶은 여자였다.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였는데도 이상하게 훨씬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나는 그 첫인상만으로도 이 사람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옷차림도 화려하다기보다는 절제된 느낌이었는데, 그 절제 안에 감춰진 위압감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다.
그녀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걸음걸이 하나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발끝부터 어깨까지, 마치 오래도록 훈련받은 사람처럼 절도 있는 움직임이었다.
"강인우."
서류에 적힌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목소리였다. 담담했지만 어딘가 시험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왜인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예."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훑어보는 방식이, 마치 오래전에 본 적 있는 무언가를 다시 확인하려는 사람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마치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감정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이름을 바꿨다고 얼굴까지 바뀌는 건 아니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걸 느꼈다.
뭐지, 이 여자. 나를 알고 있나. 설마.
"저를 아십니까."
내가 그렇게 묻자 그녀는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이 몇 초에 불과했는데도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바람이 정원의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만 들렸고, 나는 그 몇 초 사이에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혹시 결함체라는 낙인이 여기까지 따라온 건 아닐까, 아니면 뭔가 다른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금원하린."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 순간, 마차 안에서 떠올랐던 어릴 적 정원의 기억이, 작은 손을 잡고 나란히 걷던 그 기억이 다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작은 정원, 낮은 담벼락, 그리고 나보다 조금 큰 손을 가진 아이의 웃음소리.
"우리 나중에 결혼하는 거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그 목소리의 결이, 그 억양이 어딘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게 느껴져서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당신..."
내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하린은 이미 표정을 정리한 채 다시 냉랭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방금까지 흔들렸던 눈빛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지워져 있었다.
"어렸을 때 얘기다."
그녀는 그렇게 짧게 잘라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마치 방금의 흔들림이 없었던 것처럼. 그 전환이 너무 매끄러워서 나는 오히려 그게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사람이 저렇게 순식간에 감정을 지울 수 있나.
"지금 나는 금원가의 적녀이고, 너는 이 가문에 매입된 계약 노비다. 그 관계 안에서 다른 걸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그 안에 명확한 선이 그어져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혹은 다가올 생각도 하지 말라는 선이었다.
나는 그 냉랭한 선긋기가 오히려 이상하게 서글프게 느껴졌다. 어릴 적의 그 손, 그 웃음소리는 이제 이 사람 안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 웃음소리를 지운 게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지키려는 거였을까. 잘은 모르겠다.
그런데, 뭔가 다른 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의 목소리 끝에 아주 미세하게 남은 떨림 같은 것이, 그 냉랭함이 순전히 진짜는 아니라는 걸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손끝이 살짝 굽어 있는 것도, 시선이 나를 피하듯 옆으로 살짝 돌아가 있는 것도, 그 담담한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안으로 들어와라."
하린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 뒷모습에서는 더 이상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따라 걸으면서, 이 재회가 앞으로 얼마나 복잡한 일들을 몰고 올지 아직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원을 지나며 나는 주변을 살폈다. 정원 곳곳에 이끼가 덮인 석상들이 서 있었고, 그 석상들의 형태가 하나같이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애매한 모습이었다. 저게 뭘 상징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이 가문의 오래된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저택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는 정원보다 더 오래된 느낌이었다. 벽마다 걸린 장식들이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었고, 발밑에 깔린 마루는 밟을 때마다 낮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복도 저편에서 회색 장발을 늘어뜨린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빠르게 걸어오는 게 보였다.
걸음걸이가 사냥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거칠었고, 나는 그 순간 이 저택에서 벌써 두 번째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하린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이 사람이 예사롭지 않은 존재라는 걸 다시 한번 확신했다.
저 걸음걸이, 저 속도. 첫 만남부터 이렇게 살벌하게 시작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