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
박정호는 그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천장의 얼룩을 오래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룩이었다.
40년 동안 이 방에서 살았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어깨가 뻐근했다.
허리도 뻐근했다.
이제는 눈을 뜨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옷장을 열었다.
안에는 옷이 몇 벌 걸려 있지 않았다.
갑옷 두 벌.
낡은 외투 하나.
그리고 저 안쪽, 늘 같은 자리에 걸려 있는 장검.
그는 손을 뻗어 검을 잡았다.
손잡이의 가죽이 닳아 있었다.
손바닥의 굳은살과 딱 맞물리는 자리였다.
그는 검을 뽑지 않고 그대로 허리에 찼다.
가죽 갑옷을 걸쳤다.
어깨에 닿는 무게가 예전 같지 않았다.
20년 전에는 이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
10년 전에는 무게를 느꼈지만 무시할 수 있었다.
지금은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고,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거울 앞에 잠시 섰다.
거울 속에는 55세의 남자가 있었다.
흰머리가 절반은 넘었다.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그대로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문을 나섰다.
골목은 조용했다.
가로등 아래로 안개 같은 것이 낮게 깔려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안개를 뚫고 노랗게 번져 있었다.
그는 잠시 그 불빛을 바라보았다.
40년 전, 그가 처음 이 골목을 걸었을 때도 가로등은 같은 자리에 있었다.
전구는 여러 번 바뀌었을 것이다.
가로등 기둥도 몇 번은 새로 세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 그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서울 중심가로 가는 길은 익숙했다.
40년 동안 걸은 길이었다.
걸음마다 몸이 기억하는 길이었다.
어느 골목에서 좌회전을 해야 하는지, 어느 계단에 턱이 있는지, 몸이 먼저 알고 움직였다.
길을 걷는 동안 그는 지나간 얼굴들을 떠올렸다.
함께 던전에 들어갔던 동료들.
살아남은 자들과 살아남지 못한 자들.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이름을 그는 아직도 하나씩 기억하고 있었다.
이명수.
강태식.
윤재복.
이름을 하나씩 되짚을 때마다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러다 다시 속도를 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과 걸음을 멈추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3구역 저층 게이트였다.
등급으로 치면 가장 낮은 던전.
초심자들이 처음 발을 들이는 곳이었다.
한때는 박정호도 저곳에서 시작했다.
그가 처음 그 게이트를 통과했을 때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때는 갑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동네 철물점에서 구한 방패 하나, 녹슨 검 하나가 전부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허름한 준비였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40년을 더 살아남았다.
게이트 앞에 다다르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철.
습기.
마석이 타는 듯한 옅은 유황 냄새.
40년 동안 맡아온 냄새였다.
그는 코로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눈을 감고도 이 냄새만으로 게이트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냄새에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소독약 냄새였다.
새로 깐 바닥재 냄새.
그는 눈을 떴다.
게이트 주변이 달라져 있었다.
바닥에는 매끈한 타일이 새로 깔려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안내판이 여러 개 세워져 있었다.
글씨는 크고 선명했다.
색색의 화살표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게이트 입구에 걸린 표지판을 보았다.
[3구역 저층 던전 - 초급 등록자 전용 - 50세 이상 출입 제한]
표지판은 어제까지 없던 것이었다.
아니, 있었어도 그는 못 본 척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표지판 가까이 다가가 글씨를 다시 읽었다.
같은 문장이었다.
읽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입구에는 경비원이 서 있었다.
젊었다.
제복도 새것이었다.
허리에는 진압봉과 단말기가 걸려 있었다.
그의 뒤로 게이트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박정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가갔다.
발걸음 소리가 새 타일 위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경비원이 손을 들었다.
"등록증 확인하겠습니다."
박정호는 목에 걸린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는 오래된 것이었다.
표면이 매끈하게 닳아 있었다.
경비원이 그 카드를 받아 들 때, 잠시 손끝에서 낡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경비원이 단말기에 카드를 갖다 댔다.
삐, 하는 소리가 났다.
경비원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박정호 님. 55세시네요."
"그렇소."
"신인 보호 규정으로 출입이 제한된 상태입니다."
"어제부터 그런 건 알고 있소."
"그럼 돌아가 주셔야 합니다."
박정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 번만 들여보내 주시오."
"규정입니다."
"저층이오. 초급 던전이오. 위험할 것도 없소."
"저층이라도 규정은 규정입니다."
경비원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젊은 목소리였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매끈한 톤이었다.
박정호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신인 보호 규정이라는 게 뭐요."
"몬스터 강도 대비 안전 조치입니다. 신체 능력 저하로 인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사고를 낸 적이 있소?"
"기록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막소."
경비원은 잠시 단말기를 내려다보았다.
화면에 뜬 것을 읽는 듯한 몸짓이었다.
"규정은 개인 기록과 상관없이 적용됩니다."
"그럼 내가 뭘 해도 소용없다는 거요."
"이 게이트에서는 그렇습니다."
박정호는 허리에 찬 장검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40년 동안 이 검으로 살았다.
이 검이 이제는 문 앞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검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가만히 만졌다.
차가웠다.
아침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소."
경비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짧게 대답했다.
"나이가 많으신 것 외엔 없습니다."
그 말에 박정호는 숨을 삼켰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스스로에게도 크게 들렸다.
"그게 죄요?"
"죄가 아닙니다. 규정입니다."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었다.
박정호는 그것이 벽이라는 것을 알았다.
말로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게이트 앞 광장에 젊은 모험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의 장비는 반짝였다.
갑옷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허리춤에는 소형 단말기가 달려 있었다.
실시간으로 던전 내부 정보를 전송받는 기계라고 들었다.
그중 몇몇이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 장비를 자랑하듯 팔을 들어 보였다.
갑옷의 팔 부분에 새겨진 문양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박정호가 처음 던전에 들어갈 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지도도 없이, 감으로 들어갔다.
길을 잘못 들면 죽었다.
몬스터를 잘못 판단하면 죽었다.
죽은 동료들도 많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40년이었다.
그 40년이 지금, 이 문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있었다.
"비켜주십시오."
경비원이 다시 말했다.
목소리에 처음으로 미묘한 짜증이 섞였다.
박정호는 발을 떼지 않았다.
"한 번만."
"안 됩니다."
"내가 여기서 40년을 벌었소."
"그건 제가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박정호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누가 아는 부분이오."
"본사에 문의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본사가 어디에 있소."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대답은 담담했다.
어디에도 화낼 곳이 없다는 것을, 그 대답이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경비원은 단말기를 다시 들어 올렸다.
버튼을 누르는 손짓이 보였다.
"강제 조치가 필요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박정호는 그 말에 무릎이 살짝 꺾이는 것을 느꼈다.
분노도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한 무력감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 있었다.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들의 장비를, 자신들의 단말기를, 자신들의 앞날을 보고 있었다.
박정호는 문득 생각했다.
이 광장에 서 있는 자신이, 마치 이 시대에서 지워진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40년을 걸어온 길 위에서, 하루아침에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그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음마다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광장의 젊은 모험가들이 그를 잠깐 쳐다보았다.
그러다 곧 시선을 거두었다.
관심이 없다는 눈빛이었다.
아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눈빛이었다.
박정호는 광장 끝에 멈춰 섰다.
게이트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웅— 하는 낮은 진동음이었다.
그 소리는 40년 동안 그를 살게 한 소리였다.
오늘은 그 소리가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는 그 진동음에 귀를 기울였다.
익숙한 파장이었다.
몸속 어딘가가 그 파장에 반응하며 작게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울림은 이제 그를 안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는 게이트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경비원의 손이 진압봉에 닿았다.
그 순간, 그는 걸음을 멈췄다.
몸이 알고 있었다.
지금 한 발만 더 내디디면, 이 문제는 더 커진다는 것을.
40년 동안 던전에서 살아온 감각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었다.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
다만 그 위험이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는 돌아섰다.
등 뒤로 게이트의 진동음이 계속 울렸다.
웅—
웅—
그 소리를 뒤로하고, 그는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걸음마다 발끝이 무거웠다.
걸으면서 그는 자꾸 뒤를 의식했다.
등 뒤에서 무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는 순간 무너질 것 같았다.
골목 끝에서 그는 잠시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았다.
게이트는 여전히 열려 있었고, 젊은 모험가들이 하나둘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빛이 그들을 삼키듯 밝게 번쩍였다.
박정호는 그 빛을 오래 바라보았다.
40년 동안 저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 빛 속에서 몬스터를 베었고, 동료를 잃었고, 살아남았다.
그 모든 시간이 지금 이 골목 끝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손끝의 굳은살이 서로 맞닿았다.
그 감촉만은 여전했다.
4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감촉이었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골목은 여전히 조용했다.
가로등 불빛도 여전히 안개 속에서 노랗게 번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과는 다른 골목처럼 느껴졌다.
돌아가는 길, 그는 낡은 장검을 다시 허리에서 풀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확신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풀 힘조차 없었기 때문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잠시 멈춰 섰다.
등 뒤에서, 멀리서, 여전히 그 진동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웅—
착각인지 실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로 두꺼워진 손.
40년 동안 검을 쥔 손.
그 손이 오늘은 아무것도 쥘 수 없었다.
박정호는 문득 깨달았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이 손은 다시는 검을 쥐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생각이 그의 발걸음을 다시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