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늑대를 품은 정원

1화

새벽 공기가 찼다. 강태민은 우물가에 서서 두레박을 끌어올렸다. 손끝이 시렸다. 겨울이 다 가지 않은 탓이었다. 두레박 줄을 잡은 손등에 서리 같은 것이 하얗게 얹혀 있었다. 열다섯, 오늘은 그가 왕도에서 나고 자란 지 꼭 열다섯 해가 되는 날이었다. 부모는 그가 여섯 살 때 역병으로 죽었다. 그해 왕도 하급 구역에서만 삼백 명이 넘게 죽어나갔다고 했다. 태민은 그 숫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부모의 얼굴이 점점 희미해진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로 그는 주막 박씨 아주머니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자랐다. 밥값 대신 몸을 굴렸다. 그것이 아홉 해 동안 그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태민아, 물 다 길었으면 이리 가져와라." 부엌에서 박씨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네, 아주머니." 그는 짧게 대답하며 두레박을 어깨에 걸쳤다. 물지게가 무거웠다. 하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불평은 배를 채워주지 않는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게 세워라. 그래야 오래 버틴다.' 그것은 박씨가 처음 그에게 물지게를 지웠을 때 해준 유일한 조언이었다. 태민은 그 말을 아직도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주막 안은 이미 손님을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 태민은 물을 항아리에 붓고, 아궁이에 장작을 더 넣었다. 불씨가 튀었다. 탁, 탁— 소리를 내며 장작이 타올랐다. 그 불빛이 그의 얼굴을 잠시 붉게 물들였다. 오늘은 다른 날이었다. 왕립 던전 관리국에서 각성식이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왕도의 법은 간단했다. 열다섯이 된 아이는 누구든 관리국에 가서 스킬을 감정받아야 한다. 그 판정이 곧 앞날을 결정했다. 전투형 스킬을 받으면 탐험자가 되어 던전에서 부를 쌓을 수 있었고, 생산형이면 장인 길드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반대로 아무런 스킬도 발현되지 않거나 등급이 지나치게 낮으면, 그저 평생 남의 밑에서 몸을 굴리며 살아야 했다. 왕도에서 이 각성식보다 중요한 행사는 없었다. 심지어 왕실의 대소사보다도 이날을 두고 벌어지는 소문이 더 많았다. 어느 집 아이가 무슨 문양을 받았는지, 그 등급이 몇 등인지, 그것이 곧 그 집안의 몇 년을 좌우하는 화젯거리가 되었다. '오늘만은 다를 것이다.' 태민은 아궁이 앞에서 그렇게 되뇌었다. 근거는 없었다. 그저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태민이 너도 오늘 각성식이지?" 박씨가 물었다. 목소리에 무심함이 섞여 있었다. "네." 그는 짧게 답했다. "잘되면 여기서 나가는 거고, 안 되면 어차피 여기서 계속 일할 거고. 뭐,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박씨는 그렇게 말하며 그릇을 정리했다. 그 말이 위로인지 무심함인지 태민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박씨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낡은 무명 저고리 하나를 그에게 던져주었다. "그거라도 입고 가라. 관리국 앞에서 남들 다 좋은 옷 입고 서 있는데 너만 그 꼴로 서 있으면 보기 안 좋다." 박씨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는 것을, 태민은 알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는 저고리를 받아 챙기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 왕립 던전 관리국 앞에는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같은 해에 태어난 아이들이 저마다 부모나 형제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태민만이 혼자였다. 줄은 백여 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관리국 앞 광장은 매년 이날만큼은 시장통보다 더 붐볐다. 좌판을 벌인 장사꾼들도 오늘만큼은 각성식 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 틈에서 목청을 높였다. "강태민, 너도 왔냐."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이현수였다. 같은 학당에서 자란 사이였다. 이현수의 아버지는 상급 탐험자였다. 그 사실은 이현수가 늘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이야기였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재능은 핏줄을 타고 흐른다더라." 이현수가 팔짱을 끼며 웃었다. "그렇겠지." 태민은 그 말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넌 부모도 없으니, 뭐가 나올지 모르겠네." 이현수의 말투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지만, 그것이 조롱인지 스스로도 모르는 듯 무심했다. 이현수의 뒤에는 그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들의 말을 듣고도 별다른 제지 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것이 이현수를 더 기고만장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저런 말에 흔들릴 필요 없다.' 태민은 속으로 그렇게 정리하며 줄이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줄은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줄어들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을 그는 느꼈다. 관리국 건물은 회백색 돌로 지어져 있었다. 입구를 지나면 넓은 감정실이 있었고, 그 안쪽 단상에 노감정사가 앉아 있었다. 노감정사는 왕도에서 오십 년 가까이 스킬을 감정해온 인물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손목을 잡으면, 그 순간 하늘에서 빛의 문양이 떠오른다고 했다. 문양의 형태와 밝기로 스킬의 등급과 종류가 결정된다는 것이 세간의 상식이었다. 붉은빛이면 화(火) 계열, 청빛이면 수(水) 계열, 금빛이 강할수록 등급이 높다는 이야기가 아이들 사이에서 돌았다. 물론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뜬소문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태민의 차례가 다가올수록, 줄 앞쪽에서 환호와 탄식이 번갈아 터졌다. 한 아이는 검붉은 불꽃 문양을 받고 주변의 환호를 받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며 아들을 끌어안았다. 다른 아이는 희미한 빛만 남기고 문양이 사라져, 부모가 아이를 껴안고 조용히 흐느꼈다. 그 광경들이 반복될수록 광장의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누군가의 인생이 갈리는 순간이 이렇게 짧고 허무하게 끝난다는 것을, 태민은 줄 속에서 지켜보며 실감했다. '나는 무엇을 받게 될까.' 태민은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손을 굳게 쥐었다. 이현수의 차례가 먼저 왔다. 그는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단상 앞에 섰다. 노감정사의 손이 그의 손목을 잡자, 허공에 짙은 갈빛 문양이 떠올랐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급 정도의 문양이었다. "오, 대지 계열이구나. 중급이다." 노감정사가 짧게 말했다. 이현수의 어머니가 손을 모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현수 본인은 아버지의 상급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잠시 표정이 굳었지만, 곧 다시 어깨를 펴고 걸어 나갔다. "강태민." 서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천천히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발끝이 차가운 돌바닥에 닿는 느낌이 유난히 선명했다. 주변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부모 없는 아이가 무엇을 받을지, 사람들은 은근한 호기심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태민의 목덜미를 따라붙었다. 노감정사가 손을 뻗었다. 주름진 손이었다. "손을 다오." 노감정사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태민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이 노감정사의 손에 잡히는 순간, 감정실 전체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그는 느꼈다. 허공에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빛은 다른 아이들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색이 없었다. 형태도 뚜렷하지 않았다. 마치 안개가 뭉쳐 있는 듯한 흐릿한 빛이었다. 감정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방금까지 소란스럽던 뒷줄의 웅성거림마저 잦아드는 것을, 태민은 등 뒤로 느꼈다. 노감정사의 눈썹이 슬며시 좁혀졌다. 그는 태민의 손목을 놓지 않고 좀 더 오래 붙잡았다. 마치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허공의 빛은 여전히 흐릿한 안개처럼 형체를 갖추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태민은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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