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늑대를 품은 정원

4화

서책의 마지막 장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남아 있었다. '수납형 스킬은 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담긴 것이 어떻게 되는지, 그것이 진짜 핵심이다.' 작성자의 이름은 지워져 있었다. 언제 쓰인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종이의 색도 다른 장들보다 누렜다. 오래전에 다른 잉크로 덧쓴 흔적도 보였다. 누군가 이 문장을 남기고 싶어서, 뒷장이 뜯겨 나가는 것도 감수한 게 아닐까. 태민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문장은 태민의 머릿속에 깊이 박혔다. '담긴 것이 어떻게 되는지.' 그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되씹었다. 지금까지 그는 정원함을 그저 물건을 넣는 주머니 같은 것으로 여겼다. 짐을 지지 않고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능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문장은 다른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담는 것과 보관하는 것은 다르다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늘 그러셨다. 가진 것을 어디까지 알아야 그것이 진짜 내 것이 된다고.' 예전에 작은 연장을 처음 쥐어주며 하셨던 말이었다. 연장의 무게를 재는 법, 날의 각도를 보는 법. 그런 것들을 모르면 아무리 좋은 도구라도 손에 익지 않는다고 하셨다. 정원함도 마찬가지일지 몰랐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정원함을 실험해보기로 했다. 손등의 문양에 의식을 집중하자, 허공에 희미하게 문이 열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스르릉- 작은 돌멩이를 주워 그 안에 넣어보았다. 돌은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사라졌다가, 다시 불러내면 그대로 나타났다. '역시 그냥 담는 것뿐인가.' 그는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책의 문장은 뭔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것도 넣어보았다. 나뭇가지, 흙덩이, 마른 잎사귀까지. 모두 결과는 같았다. 넣은 그대로, 꾸밈없이 그 모습으로 다시 나왔다. '생명이 있는 것을 넣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근거는 없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직감이었다.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그 경계에 뭔가가 있을 것 같았다. 서책의 저자가 굳이 '담긴 것이 어떻게 되는지'라고 표현한 이유도 그것일지 몰랐다. 그날부터 태민은 왕도 외곽 던전 초입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채석장 배치를 미루고, 스스로 조사를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채석장 관리인에게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댔다. 며칠 안으로 다시 나오겠다고 했지만, 정확히 언제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던전 초입은 낮은 등급의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곳이었다. 초심 탐험자들이 경험을 쌓기 위해 오가는 구역이기도 했다. 젊은 탐험자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서로 등을 맡겼다. 검을 든 자, 활을 든 자, 그리고 뒤에서 물약을 챙기는 자까지. 태민은 그런 무리를 볼 때마다 슬쩍 몸을 숨겼다. 태민은 전투 능력이 없었기에, 몬스터를 피해 다니며 죽은 벌레나 작은 짐승의 사체를 정원함에 넣어보았다. 길 위에 떨어져 죽은 딱정벌레, 풀숲에서 발견한 들쥐의 시체. 그런 것들을 하나씩 주워 넣었다. 변화는 없었다. 그저 사체는 사체 그대로 보관될 뿐이었다. '생명이 있는 상태로 넣어야 한다는 뜻인가.' 그는 그렇게 짐작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몬스터를 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는 벌레를 산 채로 잡아보려고도 했다. 손을 뻗는 순간 벌레는 재빠르게 흙 속으로 파고들어 버렸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렇게 굼벵이 하나도 못 잡는데.' 태민은 스스로가 답답했다. 힘이 없다는 것이 이런 순간마다 발목을 잡았다. "거기, 너."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초입을 지키는 문지기 탐험자였다. 낡은 가죽 갑주를 걸친 중년의 남자였다. 허리에는 짧은 검을 차고 있었고, 얼굴에는 오래된 흉터가 하나 있었다. "전투 등급도 없는 놈이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문지기가 위아래로 그를 훑어보며 물었다. 그의 시선은 태민의 손을 향했다. 무기도, 방어구도 없는 맨손이었다.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태민이 답했다. "조사는 무슨. 여기서 죽으면 아무도 안 찾아준다. 알아서 나가라." 문지기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벌써 여기서 세 놈이 죽었다. 다들 너처럼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들어왔다가." 문지기는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몇 번이나 겪은 일인 듯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저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태민은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등록증은 있느냐." 문지기가 다시 물었다. "있습니다." 태민은 품에서 낡은 등록증을 꺼내 보였다. 채석장 배치를 받으며 함께 발급된 것이었다. 문지기는 그것을 흘깃 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채석장 놈이 여기서 뭘 조사한다는 거냐. 돌 캐다가 심심하면 술이나 마셔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태도였다. 태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 그는 문지기의 눈을 피해 던전 초입의 옆쪽 좁은 틈으로 스며들었다. 그곳은 정식 통로가 아니었다. 낮은 등급 탐험자들도 잘 가지 않는 구역이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틈이 있었고, 그 안쪽으로는 완전히 어둠이 깔려 있었다. 습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는 이끼가 덮인 돌들이 즐비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미끄러질 듯 축축한 소리가 났다. 신발 밑창에 이끼가 눌리는 감각이 낯설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며 주변을 살폈다. 벽을 짚었을 때 손끝에 물기가 묻었다. 어디선가 물이 새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사람이 안 오는 이유가 있구나.' 태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때, 저 멀리서 낮은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짐승인가.' 태민은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방향을 살폈다. 소리는 낮고 길게 이어졌다. 마치 무언가가 상처를 입은 채로 신음하는 것 같았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 뒤로, 무겁고 규칙적인 발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쿵- 쿵- 땅을 밟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끄는 소리와 겹쳐 있었다. '저건 하나가 아니다.' 그는 그렇게 직감했다. 울음소리와 발소리의 리듬이 서로 어긋났다. 각기 다른 몸에서 나는 소리였다. 등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그것은 단순한 직감이 아니라, 확실한 위험의 신호였다. '전투 등급도 없는 놈이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문지기의 말이 그제야 귓가에 다시 울렸다. 조롱처럼 들렸던 그 말이 지금은 다르게 다가왔다. 그는 몸을 낮추고 뒷걸음질을 쳤다. 발끝으로 조심스레 디디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미 발소리는 그를 향해 방향을 틀고 있었다. 스륵- 어둠 저편에서 무언가의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