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지막 결계, 첫 수확

1화

콰앙! 등 뒤에서 결계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가루와 마력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나는 그 속을 미친 듯이 뛰었다. 발밑이 갈라지고 있었다. 이 던전은, 아니 이 세계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5년이었다. 5년 동안 이 지긋지긋한 세계에서 버텼다. 처음엔 소환된 용사랍시고 검을 쥐어 줬지만 나는 검술 따위엔 재능이 없었다.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휘둘러도 허공만 갈랐다. 대신 다른 게 있었다. 씨앗을 심으면 남들보다 세 배는 빨리 자라는 재주. 땅을 만지면 상태를 읽어내는 감각. 다들 나를 전투 마법사 취급했지만 사실은 그냥 농사꾼이었다. 그 재주로 살아남았다. 몬스터를 잡는 대신 식량을 길러서 팔았고, 마력을 다루는 대신 흙을 다뤘다. 남들이 던전 코어를 놓고 죽어갈 때 나는 온실 하나를 지어서 상추를 키웠다. 상추 한 포기에 은화 세 개, 토마토 한 알에 은화 다섯 개. 전쟁이 나든 마왕이 부활하든 사람들은 결국 먹어야 했으니까. 그런데도 결국 세계는 무너졌다. 이럴 거면 그 상추는 다 뭐 하러 키웠나. [탈출 결계까지 200미터입니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건조한 목소리에 나는 욕설을 삼켰다. "됐고, 시간이나 알려줘!" [결계 붕괴까지 47초.] ···망했다. 47초. 200미터를 47초 안에 뛰라는 건가. 육상 선수도 아니고, 발밑은 자꾸 갈라지는데 무슨 재주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릎이 꺾이려는 걸 억지로 세웠다. 뒤에서 뜨거운 열기가 등을 덮쳤다. 결계 붕괴의 여파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게 쫓아오는 건지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확인하는 순간 죽을 것 같았다. 하얀 문이 보였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통과했던 그 문이었다. 5년 동안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귀환의 문. 다들 저 문 앞에서 절을 하고, 빌고, 심지어 도끼로 부숴보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냥 밭을 갈았다. 어차피 안 열릴 거, 배부터 채우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오늘, 세계가 무너지는 이 순간에 하필 열렸다. [결계 붕괴까지 12초.] "야, 그게 뭐 재난 방송이냐, 실황 중계는 좀 그만해!" 숨이 턱까지 찼다.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침이 말라 목이 사포처럼 긁혔다. 눈앞이 흐려지고 다리가 남의 것처럼 움직였다. 그래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결계 붕괴까지 5초.] 다섯. 넷. 셋. 문에 손이 닿는 순간, 세상이 하얗게 지워졌다. * *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냄새였다. 흙냄새. 그리고 그 밑에 깔린, 무언가 썩어가는 냄새. 등짝이 축축했다. 손을 짚고 일어나니 흙바닥이었다. 던전의 붉은 모래가 아니라 익숙한, 검고 부드러운 흙. 손바닥에 닿는 촉감부터가 달랐다. 이건 마력이 섞인 흙이 아니었다. 한국이었다. 주변을 둘러보고서야 상황이 이해됐다. 나는 강원도 홍천, 할머니의 밭 한가운데 널브러져 있었다. 하늘은 파랬고, 저 멀리서 매미 소리가 들렸다. 5년 전에 사라졌던 그 매미가 아직도 울고 있는 걸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돌아왔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5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어를 소리 내어 말했다. 이상하게 어색했다. 발음이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느낌이었다. 일어서서 밭을 둘러본 순간, 안도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밭이 죽어 있었다. 작물이 있어야 할 자리엔 잡초만 무성했고, 흙은 갈라지고 하얗게 부풀어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굶은 사람의 피부처럼 갈라진 틈마다 흙먼지가 일었다. 관정 파이프는 녹슬어 부러진 채 방치돼 있었고, 비닐하우스 골조는 반쯔 무너져 옆으로 기울어 있었다. 비닐은 다 뜯겨나가고 뼈대만 남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짐승의 갈비뼈 같았다. 어디서도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5년이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눈앞에서 직접 보는 건 다른 얘기였다. 숨이 턱 막혔다. 5년 전, 대학 등록금 대신 이 밭에 뛰어들었다가 소환된 그날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그때도 여기서 고추를 따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할머니는 없었다. "할머니."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자꾸 떨렸다. 집 쪽을 향해 뛰려던 순간, 발이 저절로 멈췄다. 뭔가가 손끝을 잡아끄는 느낌이었다. 마치 흙이 나를 붙잡는 것 같았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이세계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더 짙고 더 끈적한 무언가가 손끝에서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흙을 만졌다. [스킬 【토양개선(土壌改善)】이 발동됩니다.] "어, 어어어?" 손끝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흘러나갔다. 뜨겁다기보다는 뭔가 빨려나가는 느낌이었다. 손바닥이 저릿저릿했다. 발밑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갈라진 흙이 순식간에 검고 부드럽게 변하며 촉촉해졌다. 하얗게 부풀었던 지력 고갈 흔적이 스펀지처럼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밭 한 뙈기, 두 뙈기, 순식간에 밭 전체가 색을 바꿔갔다. 마치 누군가 붓으로 색을 칠하듯, 갈색이 지나간 자리마다 짙은 흑갈색이 번져나갔다. 죽은 땅이 살아나는 소리는, 놀랍게도 아주 조용했다. 사삭. 사사삭. 마치 누군가 낮게 숨을 쉬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무섭다기보다는, 뭔가 거대한 게 눈을 뜨는 기분이었다. "이, 이게 아직도 되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5년 만에 처음 써본 능력인데, 오히려 이세계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그쪽에서는 밭 한 뙈기 살리는 데 하루가 걸렸는데, 지금은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끝나버렸다. [감정【鑑定】 결과: 토질 등급 특급(A+). 기존 대비 유효미생물 밀도 620% 상승.] "···그건 또 뭔 숫자냐." 숫자가 나오니 왠지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게 아니라 큰일 난 느낌이랄까. 마치 시험 성적표에 이상하게 높은 점수가 찍혀서 오히려 부정행위로 의심받을 것 같은, 그런 불길함이었다. 그때, 저 멀리 농로 쪽에서 경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덜덜덜. 낡은 트럭 소리였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곧 멈췄다. "거, 거기 누구요!" 걸걸한 목소리가 밭을 향해 날아왔다. 나는 흙 묻은 손을 든 채로 그대로 얼어붙었다. 돌아본 곳에는 나이 든 남자 하나가 트럭에서 내려서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허리는 구부정했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5년 전에도 이 옆 밭에서 콩을 심던 아저씨였다. 그때보다 머리가 훨씬 더 새하얘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방금 전까지 죽어 있던 밭이 눈에 보일 정도로 짙은 초록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니, 초록빛이라기보다는, 흙 자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밤에 반딧불이가 무더기로 모여 있는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광경이었다. 아저씨의 눈이 그 빛을 따라 움직였다. 입이 반쯤 벌어졌다. ···이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머릿속이 하얘졌다. 5년 전에 갑자기 사라졌다가, 죽은 땅을 이상한 빛으로 되살려 놓고 서 있는 나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까. 마법사입니다, 라고 하면 정신병원에 실려 갈 것 같았고, 그냥 밭 좀 갈다 왔다고 하면 그건 또 너무 뻔뻔했다. 아저씨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트럭 손잡이를 짚은 채로, 그는 나를, 그리고 빛나는 밭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저건···"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다음 말을 듣기도 전에 이미 도망치고 싶어졌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