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남자는 밭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딱 벌렸다.
"이, 이게 뭔 조화여? 어제까지 이 밭 완전히 죽어 있었는디."
나는 흙 묻은 손을 슬며시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손끝에 아직 마력이 남아 있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방금 전까지 손바닥 아래로 흘러나가던 그 초록빛 마나의 감각이, 아직도 피부 위에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아, 그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세계에서 배운 마법으로 밭을 살렸다고 하면 정신병원부터 예약해줄 것 같았다. 아니, 정신병원이 아니라 곧장 119를 부를지도 모른다. 시골 인심이 좋다고들 하는데, 갑자기 나타난 손자뻘 남자가 밭을 초록빛으로 물들였다는 얘길 들으면 좋은 인심도 도망가게 생겼다.
"비료를 좀 많이 뿌렸습니다."
【비료 냄새는 전혀 나지 않습니다.】
아니, 그건 나도 알아.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잖아. 시스템은 가끔씩 이렇게 쓸데없이 정직해서 사람 뒤통수를 친다. 그것도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남자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훑었다. 얼굴에 깊게 새겨진 주름과 볕에 탄 피부, 손등에 박인 굳은살까지 전형적인 농부의 인상이었다. 나이는 일흔쯤 되었을까. 그 눈빛이 밭에서 내 얼굴로, 다시 내 손으로 오가는 게 마치 형사가 범인을 취조하는 것 같았다.
"자네, 누구여? 이 밭 이순자 여사 밭인디."
"손자입니다. 강태준이라고 합니다."
순간 남자의 표정이 확 풀렸다. 방금까지 나를 도둑놈처럼 쳐다보던 얼굴이 갑자기 이웃 청년 대하듯 온화해지는 게,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태준이? 그 서울서 대기업 다닌다던 그 애?"
"···네, 맞습니다."
대기업은 5년 전 얘기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지금 다니는 곳은 대기업이 아니라 마왕성 지하 감옥이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다니는 게 아니라 갇혀 있었던 거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손에서 흙과 담배 냄새가 진하게 났다.
"나는 박원식이여. 옆집 사는 사람이지. 이 여사가 자네 얘기 많이 했어. 그런데 자네, 갑자기 나타나서 밭에 뭔 짓을 한 거여? 이거 완전히 다른 땅이 됐잖아."
【박원식 어르신은 순박하지만 눈치가 매우 빠릅니다.】
···그건 나도 지금 느끼고 있다. 시스템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 요즘 나온 신제품 토양개량제가 있어서요. 좀 세게 쓴 것 같습니다."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이럴 때는 나도 신기할 정도로 뻔뻔해졌다. 5년 동안 마왕 앞에서도 이 정도로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은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시골 밭 앞에서는 이렇게 술술 나오는지 모르겠다.
박원식 씨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얼굴이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밭 이랑을 발끝으로 툭툭 밟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흙 상태도 좋아 보이는구먼. 이거 어디서 파는 거여? 나도 좀 사다 써야겠는디."
"···지금은 절판됐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절판된 토양개량제라니, 이런 설정은 즉석에서 만들어낸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아무튼 잘됐네. 이 여사가 허리 다치고 나서 밭이 완전히 방치돼서 다들 걱정했거든. 자네가 왔으니 살겠구먼."
허리를 다쳤다는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거짓말로 여유를 부리던 마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할머니 허리가 안 좋으세요? 지금 어디 계세요?"
"집에 있지. 요양보호사가 오전에 왔다 갔을 텐데."
"얼마나 안 좋으신 건데요? 병원은 다니세요?"
박원식 씨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작년 겨울에 눈 치우다가 미끄러져서 크게 다쳤어. 그때 병원에서 수술도 권했다는데, 이 여사가 워낙 병원을 싫어해서···. 그냥 진통제로 버티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수술을 권했는데 진통제로 버티고 있다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나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집으로 뛰었다. 등 뒤로 박원식 씨가 뭐라 소리치는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인지 들을 정신이 없었다.
* * *
집은 기억보다 작아 보였다. 페인트가 벗겨진 파란 지붕, 마당 한쪽에 놓인 낡은 평상. 마당 구석에는 예전에 내가 심었던 감나무가 그대로 서 있었는데, 이제는 내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자라 있었다. 5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을 놓게 했다.
숨을 몰아쉬며 마당을 가로질렀다. 발밑에서 자갈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현관문을 열었다. 나무로 된 낡은 문이 삐걱, 익숙한 소리를 냈다.
"할머니?"
목소리가 떨렸다. 방금 전까지 밭에서 거짓말을 늘어놓던 뻔뻔함은 어디로 갔는지, 이 순간만큼은 다섯 살짜리 아이처럼 목소리가 갈라졌다.
안방 문이 열리고, 지팡이를 짚은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나왔다. 머리는 새하얗게 변했고, 허리는 예전보다 더 굽어 있었다. 나를 본 눈이 순간 크게 벌어졌다.
"···태준이냐?"
"네, 저 왔어요."
목이 메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5년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었다. 그 5년 사이 할머니는 십 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놓칠 뻔하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나는 급히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연락도 없이 이게 뭔 일이여. 회사는 어쩌고···."
"할머니, 그게···."
5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순간 막막해졌다. 갑자기 다른 세계로 소환돼서 마왕 밑에서 노예처럼 굴려지다가, 겨우겨우 돌아왔다고 하면 믿어줄까. 아니, 안 믿어주는 게 정상이다. 나도 안 믿을 것 같은 얘기였으니까.
결국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그냥 할머니를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몸이 훨씬 작고 가벼워져 있었다. 예전엔 이렇게 작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니, 어쩌면 내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놀랐어요. 밭이 그렇게 방치된 줄도 몰랐고요."
할머니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서는 이제 밭일 그만하라더구나. 뼈가 다 삭았대."
【이순자 할머니는 허리 통증을 태준에게 오랫동안 숨기고 있었습니다.】
순간 화가 났다. 나한테 왜 말 안 했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화의 대부분은 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5년 동안 연락도 못 하고, 살아 있는지도 모르게 만들어놓고. 무슨 자격으로 화를 낸단 말인가. 연락 한 통 못 한 손자가, 대체 무슨 얼굴로 할머니한테 왜 아프다는 걸 숨겼냐고 따질 수 있을까.
"할머니, 밭 이제 제가 할게요."
"네가? 회사도 안 다니고?"
"저 이제 안 다녀요. 앞으로는 여기서 농사지으면서 할머니 모실 거예요."
할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 눈에 눈물이 조금씩 차오르는 게 보였다.
"이 늙은이 때문에 젊은 애가 서울 생활 다 접어? 안 된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서울서 잘 다니던 회사를 왜 그만뒀는데. 뭔 일 있었던 거 아니냐?"
할머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걱정과 의심이 반쯤씩 섞인 목소리였다.
"회사가 좀···. 사정이 있었어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라니. 5년 뒤에도 못할 것 같은 말을 이렇게 쉽게 뱉어버렸다.
할머니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졌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손끝이 내 뺨을, 눈가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변했냐. 뭔 일 있었던 거 아니냐?"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아니에요. 그냥 좀 고생을 해서요."
5년 동안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나 넘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마왕성 지하 감옥에서 채찍을 맞던 일도, 던전 최하층에서 굶어 죽을 뻔했던 일도, 굳이 이 조그맣고 아픈 할머니 앞에서 꺼낼 필요는 없는 이야기였다.
할머니는 더는 캐묻지 않았지만, 그 눈빛엔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다.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졌다. 5년이나 걸려서 겨우 돌아왔는데, 돌아오자마자 거짓말만 늘어놓고 있으니.
"밥은 먹었냐?"
"아직요."
"잠깐 기다려라. 뭐라도 좀 해주마."
"아니에요, 할머니는 앉아 계세요. 제가 할게요."
"네가 뭘 할 줄 안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할머니는 순순히 평상에 앉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서글퍼서,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는 척 뒤로 돌아 눈가를 슬쩍 훔쳤다.
부엌은 예전 그대로였다. 낡은 가스레인지, 찬장 속 그릇들까지. 냉장고를 열어보니 밑반찬이 몇 가지 있었다. 아마 요양보호사가 챙겨준 모양이었다.
찌개를 데우고, 밥을 안치는 손이 유난히 서툴렀다. 5년 동안 마법으로 이것저것 만들어내는 데는 익숙해졌는데, 정작 이런 평범한 부엌일에는 손이 굳어 있었다.
창밖으로 저 멀리 밭이 보였다. 방금 되살린 그 밭이, 저녁 햇살 속에서 유난히 짙은 초록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까까지 죽어 있던 그 흙이 이렇게 살아난 걸 보니, 오늘 낮에 벌인 일이 헛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밭 가장자리에, 낯선 승용차 한 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검은색 세단, 문에는 '농협 홍천지점'이라는 로고가 붙어 있었다.
"···저건 또 뭐지."
차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남자 하나가 내려섰다. 손에는 서류 같은 것을 한 뭉치 들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어쩐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남자는 밭을 한번 쭉 훑어보더니, 곧장 우리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