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지막 결계, 첫 수확

5화

품종개량 【品種改良】을 처음 사용한 날, 나는 씨앗 봉투 하나를 들고 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일반 방울토마토 모종이었다. 마트에서 산 평범한 것. 봉투에는 '알타리 종묘사'라는 촌스러운 로고가 박혀 있었는데, 그 촌스러움이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적어도 여긴 마왕도 없고, 던전도 없고, 사람 죽이는 몬스터도 없으니까. 손끝에 힘을 모으고 모종에 가볍게 갖다 댔다. [스킬 【품종개량(品種改良)】이 발동됩니다.] [체력 소모: 중(中).] 뜨거운 기운이 손끝에서 흘러나갔다. 손바닥이 화로에 댄 것처럼 뜨끈해졌다가, 이내 그 열기가 모종의 줄기를 타고 흡수되듯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엔 아까처럼 무리하게 쓰지 않았다. 딱 한 포기 분량만 조심스럽게. 지난번 밭 전체를 한 번에 개량하려다가 사흘을 앓아누웠던 기억이 있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고, 그날 밤엔 열이 39도까지 올랐다. 이세계에서 마나 고갈로 쓰러졌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그때는 그래도 회복 포션이 있었지. 여긴 편의점 이온음료가 최선이었다. 효과는 놀라웠다. 모종의 잎이 순식간에 짙어지고 줄기가 굵어졌다. 마치 3주는 앞서 자란 것처럼 보였다. 잎맥 하나하나가 도드라지게 살아 움직이는 듯 보였고, 흙 속에서 뿌리가 뻗어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나는 나머지 모종들도 하나씩, 체력이 감당하는 선까지만 개량했다. 하루에 스무 포기 정도가 한계였다. 스물한 포기째에 손을 대면 어김없이 시야가 흐려지고 무릎이 풀렸다. 그 경계선을 몸으로 익히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일주일이 지나자 밭은 완전히 달라졌다. 개량한 모종들은 벌써 사람 무릎 높이까지 자랐고, 잎사귀 색이 유난히 짙었다. 마치 누가 초록색 물감을 진하게 덧칠해놓은 것 같았다. 열매도 벌써 맺히기 시작했는데, 크기가 일반 방울토마토의 두 배는 됐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묵직한 무게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박원식 어르신이 트럭을 세우고 밭에 들어와 그걸 보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트럭 시동은 끄지도 않고 내려서, 그 소리가 밭 전체에 낮게 울렸다. "태준아, 이거 진짜 뭘 쓴 거여? 심은 지 열흘밖에 안 됐잖아." "비료를 좀 특별하게 썼습니다." [또 그 거짓말입니다.] 어쩔 수 없잖아. 마법 썼다고 하면 정신병원 예약이라고. 아니면 사이비 종교 취급받거나. 둘 다 별로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니었다. 박원식 어르신은 토마토 하나를 따서 손으로 문질러보다가, 껍질에 묻은 흙을 바지에 대충 닦아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순간 그의 표정이 완전히 변했다. 눈썹이 올라갔다가, 눈이 커졌다가, 마지막엔 뭔가 억울한 사람처럼 미간이 좁아졌다. "이, 이게 뭐여?" "맛이 어때요?" "단맛이 이렇게···. 이거 그냥 파는 방울토마토가 아니잖아. 이건 뭐, 과일이여, 과일! 우리 손녀가 좋아하는 그 수입 멜론보다 더 달아, 이거!" [감정【鑑定】 결과: 당도 14.2브릭스. 시중 방울토마토 평균 대비 약 2배.] 숫자로 보니 확실히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브릭스라는 단위를 정확히는 몰랐지만, 어르신 표정 하나로 대충 짐작이 갔다. 박원식 어르신은 토마토를 하나 더 따서 아까운 듯 반만 베어 물고, 나머지 반은 손에 든 채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거 팔면 큰돈 될 것 같은데. 농협에 가져가봐." 농협이라는 말에 문덕수 소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만 떠올랐는데도 속이 살짝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서 안 받아줄 것 같은데요." "그래도 일단 가봐. 규격이야 어떻게든 조절되겠지. 세상에 이런 물건을 규격 때문에 안 받으면 그게 농협이 이상한 거지." 말은 그럴싸했지만, 나는 문덕수 소장의 그 깐깐한 얼굴을 떠올리며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 * * 다음 날, 나는 토마토 한 상자를 들고 홍천농협 직매소를 찾았다. 상자를 들고 걷는 내내 안에서 토마토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가 왜인지 든든하게 느껴졌다. 접수대에는 30대 초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명찰에 '영농지도원 김성호'라고 적혀 있었다. 문덕수 소장의 딱딱한 얼굴과는 확연히 다른, 어딘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등록 출하 신청하러 오셨나요?" "네, 방울토마토입니다." 상자를 열자 김성호 지도원의 눈이 커졌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이 살짝 미끄러질 정도였다. "이거···. 크기가 규격을 완전히 벗어났는데요." "품질은 괜찮을 겁니다." "규격이 안 맞으면 유통 자체가 안 됩니다. 저희 직매소는 정해진 크기, 색, 당도 기준이 있어서요." [김성호 지도원은 규정을 따르지만 문덕수 소장과는 다르게 유연한 태도를 지녔습니다.] 그 차이가 눈에 보였다. 말투는 사무적이었지만, 표정엔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눈동자가 상자 안 토마토들을 계속 훑고 있었다. "그래도 확인이라도 한번 해보시겠어요?" 나는 방울토마토 하나를 건넸다. 김성호 지도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받아서 입에 넣었다. 그 잠깐의 망설임이 재밌었다.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직업 정신과,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사람의 본능이 얼굴에서 그대로 싸우고 있었다. 순간 그의 눈이 커지더니, 씹는 동작을 멈췄다. "···이거···." "어떤가요?" 그는 대답 없이 두 번째 토마토를 집었다. 그리고 세 번째. 세 번째를 씹을 때는 아예 서류철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강태준 씨, 이거 어디서 나온 종자예요? 이런 맛은 처음 봅니다. 저 이 일 5년째 하는데, 이 정도 당도는 하우스 특등급에서도 잘 안 나와요." "그냥 일반 모종에 특별한 재배법을 좀 썼습니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스킬 창이 조롱하듯 뜨는 게 아닐까 잠깐 신경이 쓰였는데, 다행히 이번엔 아무 알림도 없었다. 아마 스킬도 이제 포기한 모양이었다. 김성호 지도원은 상자 전체를 다시 훑어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잠시만요, 이거 규격 문제로 접수 못 받는 게 너무 아까운데요. 저한테 대학 동기 선배가 있는데, 서울에서 호텔 부주방장으로 계세요. 이런 재료면 그분이 관심 있어 할 것 같은데." "호텔이요?" "더 그랜드 레갈리아 서울이라고, 외국계 고급 호텔이에요. 거기 이건우 셰프라고, 진짜 재료 보는 눈이 남다른 분이거든요. 지방 곳곳 산지 돌아다니면서 특이한 재료 구하는 걸로 업계에서 좀 유명해요." 순간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이세계에서도 최고급 재료를 알아보는 상인들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될 모양이었다. 드래곤 하트 조각을 감정하던 궁정 연금술사의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눈빛을 여기서, 방울토마토 하나로 다시 볼 줄은 몰랐지만. "소개해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지금 바로 전화해볼게요. 이 토마토 몇 개 좀 가져가도 될까요? 직접 보여드리려고요." "물론이죠." 김성호 지도원은 토마토 상자를 조심스럽게 다시 포장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이거 잘하면 큰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근데 강태준 씨, 이 정도 품질이면 규격 문제 때문에 여기서 오히려 골치 아파질 수도 있어요. 문덕수 소장님이 이런 거 진짜 싫어하시거든요. 뭐든 원칙대로만 하시는 분이라." 그 이름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미 한 번 다녀가셨어요. 밭이 이상하다고." "아, 역시. 소장님 그런 거 예민하시죠. 예전에 옆 마을 농가에서 유기농 인증 없이 유기농이라고 써놨다가 걸린 적 있는데, 그때도 소장님이 그렇게 파고드셨거든요. 그래도 이건 제가 어떻게든 도와드릴게요." 김성호 지도원은 전화기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밖으로 나갔다. 유리문이 닫히기 전, 통화 소리가 점점 흥분된 톤으로 바뀌는 게 들렸다. "···선배, 저 김성호인데요. 진짜 대박인 토마토를 봤는데···." 나는 그 통화를 들으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유리문 너머로 김성호 지도원이 손짓까지 하며 통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무슨 대단한 유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5년 동안 사경을 헤매다 돌아온 세계에서, 이제 겨우 방울토마토 한 상자로 새로운 문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문 안쪽에 뭐가 있을지 짐작조차 안 갔지만, 적어도 나쁜 일은 아니길 바랐다. 그런데 문 뒤에 뭐가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직매소 앞에 세워진 검은색 SUV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차체가 반짝일 정도로 새것이었고, 이 시골 직매소 앞에 서 있는 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도시적인 디자인이었다. 문에 붙은 로고가 낯설었다. 대한아그리푸드 홀딩스. 들어본 적 없는 회사였다. 그런데 그 낯섦이 오히려 더 신경을 긁었다. 왜인지 그 차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운전석 쪽 창문이 살짝 내려가 있었고, 그 틈으로 뭔가가, 아니 누군가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들었다. 착각이길 바랐지만, 착각이 아닐 것 같은 그 이상한 확신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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