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다섯 시, 창밖에서 닭 울음소리 대신 슬라임 우는 소리가 들리는 마을. 소야는 그런 곳이었다.
마당 구석 텃밭에 젤리처럼 물컹한 초록색 덩어리가 매일 밤 기어들어와 배추를 뜯어먹는다. 처음엔 나도 놀랐다. 이백 년쯤 살다 보니 이제는 그냥 빗자루로 쓸어 담아 대문 밖으로 던져버릴 뿐이다.
가끔은 던지는 힘 조절에 실패해서 슬라임이 옆집 담벼락에 철퍽 붙어버리는 일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옆집 할아버지가 나와서 "마녀님, 또요?" 하고 웃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아침 풍경이었다.
"마녀님, 오늘도 슬라임이 배추를 다 먹었어요."
아린이 눈을 비비며 마당으로 나왔다. 하이엘프답게 귀가 쫑긋 서 있었고, 잠이 덜 깬 얼굴에는 아직도 꿈나라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열두 살짜리가 새벽부터 텃밭 걱정을 하는 건 좀 이상한 일이지만, 이 마을에서는 흔한 풍경이었다.
"괜찮아. 배추는 또 심으면 되니까."
"또 심어도 또 먹힐 텐데요."
"그럼 또 심으면 되고."
논리로 안 되는 대화였다. 아린은 뭔가 더 따지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결국 하품 한 번에 모든 논쟁 의지를 잃어버렸다.
"근데 마녀님은 슬라임한테 안 무서워요?"
무섭냐고. 한때 S급 던전을 혼자 밀어버린 적이 있었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그런 얘기를 해봐야 아이는 이해하지 못할 거고, 나도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 게 딱히 즐겁지 않았다. 그 시절 얘기를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몇 명이 죽었는지, 내가 뭘 잃었는지까지 줄줄이 따라 나오는데, 아침 식사 전에 하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슬라임보다는 네 오빠가 더 무서워."
정확히는 도현이 화났을 때 정령들이 도망다니는 모습이 슬라임 백 마리보다 무서웠는데, 그것까지 설명하기는 길었다.
아린이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부엌 쪽에서 물방울 튀는 소리가 들렸다. 수린이 아침 준비를 하다가 웃음소리에 반응한 모양이었다.
"[아침 준비 다 되었사옵니다, 마님.]"
대괄호 안의 말투는 이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언디네인 수린은 여전히 나를 마님이라 부르며 예스러운 말투를 고집했다. 이백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도 저 말투였고, 아마 이백 년 후에도 저 말투일 거라고 나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옆에서 냄비를 흔들던 화린이 끼어들었다.
"[언니, 마님이라니 촌스러워요! 그냥 대장님이라고 해요!]"
"[촌스러운 게 아니라 예의니라.]"
"[예의는 시대에 따라 바뀌는 거예요! 지금이 몇 세기인데!]"
"[세기가 바뀌어도 예의의 본질은 바뀌지 않느니라.]"
이백 년째 반복되는 말싸움이었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화린표 매운 스튜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살라만드라답게 불 조절은 완벽했지만 간은 늘 과했다.
"화린, 이거 오늘도 짜다."
"[짜야 맛있는 거예요, 대장님! 인간 입맛은 참 약해요.]"
인간 입맛이 약한 게 아니라 정령 입맛이 이상한 거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백 년을 살아도 이 싸움에서 이긴 적이 없었다. 그냥 물을 더 넣어 희석시키는 걸로 타협했다. 화린은 그런 나를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이상 뭐라 하지는 않았다. 이것도 이백 년째 이어지는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숟가락을 들었다. 여전히 짰다. 물을 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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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는 칼두안 왕국의 변경마을이다. 던전이 지척에 있어서 위험한 곳이지만, 그만큼 던전에서 나오는 자원으로 먹고사는 곳이기도 했다. 왕국의 중심에서는 멀지만, 던전 관리인이자 결계술사, 겸 약초학자, 겸 마을 사람들이 곤란할 때 찾아가는 '마녀'가 나였다.
다들 내가 몇 살인지 궁금해했지만,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스물두 살처럼 보이는 얼굴로 이백삼십육 년을 살아왔다는 걸 말해줘도 믿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냥 웃어넘기는 게 편했다. 마을 노인들 중에는 내가 자기 할머니의 할머니 시절부터 이 마을에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대체로 술자리 농담으로 취급받았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이백이십 년 전, 나는 한국의 고등학생이었다. 그러다 이유도 모르게 이 세계, 테라비스로 떨어졌다. 그 뒤로 벌어진 일들은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니 어느새 SSS급 모험가가 되어 있었고, S급 던전을 홀로 클리어한 대가로 불로불사를 얻었다. 은백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이 그 증거였다.
그리고 지금은 은퇴한 척, 마을 마녀로 살고 있다. 은퇴한 '척'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을 결계를 유지하는 것도, 던전 몬스터가 넘치지 않게 조절하는 것도 다 내 일이었다. 다만 그 일들을 대단한 척 하지 않고 그냥 텃밭 가꾸듯 조용히 처리한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마녀님! 저 다녀올게요!"
아린이 책가방을 메고 뛰어나갔다. 마을 서당에 가는 길이었다. 나는 손을 흔들어주며 텃밭을 다시 살폈다. 배추는 다 뜯어먹혔지만 무는 그나마 남아 있었다. 무 잎사귀에 묻은 슬라임 점액을 손끝으로 훑어내며, 오늘 저녁에는 결계 강도를 좀 더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로 뻔질나게 드나든다는 건 던전 안쪽 개체 수가 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대장님, 오늘 던전에서 온 소식 있는데요.]"
풍린이 창문으로 스윽 들어오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실프답게 바람을 타고 날아온 편지였다. 봉투에는 모험가 길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풍린은 내가 봉투를 여는 동안에도 창가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기다렸다. 정령들 중에서 유일하게 남의 편지 내용을 대놓고 궁금해하는 녀석이었다.
편지를 열어보니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도현이었다.
"엄마, 좋은 소식 있어요. 저희 승급했어요."
승급이라니. 몇 년 전에 A급으로 올라간 걸로 알았는데, 벌써 다음 단계로 넘어간 건가. 손끝으로 편지지를 문지르며 다시 읽었다. 확실히 A급이라고 쓰여 있던 게 이번엔 S급으로 바뀌어 있었다. 빠르다. 지나치게 빠르다 싶었지만,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편지 하단에는 소민의 글씨체로 추신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엄마, 이번 주말에 집에 갈게요! 축하 파티 해야죠!"
소민의 글씨는 언제나 도현보다 크고 동글동글했다. 급하게 썼는지 마지막 글자는 종이 밖으로 살짝 삐져나가 있었다. 그 삐뚤빼뚤함이 오히려 반가웠다.
승급이라니,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런데 도현의 편지 끝자락에 붙은 한 줄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하나 더 전할 말이 있어요. 만나서 얘기할게요."
뭘까. 좋은 소식이면 편지에 다 썼을 텐데, 굳이 만나서 얘기하겠다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이백 년을 살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편지에 못 쓸 말이라는 건 대체로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청혼 소식이거나, 부상이거나, 혹은 그 둘의 조합이거나.
토린이 흙덩이 몸을 굴려 다가오며 물었다.
"[대장, 뭔 일 있나요?]"
"아니, 별일 아닐 거야."
"[대장 얼굴이 별일 있는 사람 얼굴인데요.]"
노옴답게 토린은 눈치가 빨랐다. 흙덩이 몸에 눈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사람 표정 읽는 재주는 귀신같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편지를 접는 손끝이 어쩐지 시렸다. 이백 년을 살면서 생긴 감이라는 게 있는데, 그 감이 지금 조용히 경보음을 울리고 있었다. 정확히 뭐라고 짚을 수는 없었다. 그냥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느낌, 딱 그 정도였다.
무시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승급했다는 건 축하할 일이었고, 나머지는 만나서 들으면 될 일이었다. 굳이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백 년 동안 배운 게 하나 더 있다면, 미리 걱정해봐야 답은 항상 만난 뒤에 나온다는 것이었다.
풍린이 옆에서 편지 봉투를 뒤집어 보며 물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데요? 저도 좀 알려주세요.]"
"애들 승급했대. 주말에 온다는데."
"[오, 그럼 잔치 준비해야죠! 화린 언니한테 말해줄게요!]"
풍린이 신이 나서 다시 창문으로 날아갔다. 화린한테 잔치 소식을 전하면 또 얼마나 짠 요리를 만들어낼지 눈에 훤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당 구석에서 슬라임 한 마리가 다시 텃밭으로 기어들어오는 게 보였다.
빗자루를 챙겨 들며 나는 그 편지의 마지막 줄을 다시 곱씹었다. 만나서 얘기할게요. 그 말 뒤에 뭐가 숨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슬라임을 쓸어내는 손길에 평소보다 힘이 좀 더 들어갔다는 건 확실했다.
오늘도 별일 없는 하루가 될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