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파티가 끝나고 다들 잠든 시간, 나는 홀로 마당에 나와 있었다.
집 안에서는 아직도 술 냄새와 고기 냄새가 뒤섞여 풍겨 나왔다. 도현과 소민을 재우고, 손님으로 왔던 길드원들을 다 돌려보내고 나니 몸이 나른했다. 원래라면 이대로 방에 들어가 눕고 싶은 밤이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아니, 원래 이 정도로 차가웠던가. 손끝에서부터 올라오는 냉기가 계속 몸을 맴돌았다. 이백 년 넘게 겪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SSS급 모험가가 되고 나서는 어지간한 추위 정도는 느끼지도 못했다. 마력이 몸을 알아서 데워줬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마력이 오히려 나를 얼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머릿속으로 세 번쯤 되뇌고 나서야 등 뒤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대장님.]"
수린이 마당으로 물결처럼 흘러왔다. 뒤이어 화린, 풍린, 토린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넷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어쩐지 재판 자리 같았다.
이백 년을 함께한 정령들이었다. 저것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이렇게 굳은 얼굴로 나를 찾아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보통은 하나가 장난치듯 나타나서 나머지를 슬슬 끌고 나오는 식이었으니까.
"다들 왜 이렇게 심각한 얼굴이야."
웃어넘기려 했는데, 정령들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화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장님, 그 던전 얘기 나온 뒤부터 마력이 이상해요.]"
"마력이 이상하다니?"
"[대장님 몸에서 새어나오는 마력 파장이 이백 년 전이랑 비슷해졌어요.]"
이백 년 전이라면, 내가 아직 지구인의 마음을 다 못 정리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밤마다 울면서 잠들었고, 정령들을 처음 계약했을 때도 반쯤은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런 시절의 파장이 지금 다시 나타난다는 게 좋은 신호일 리 없었다.
"파장이 비슷해졌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야? 그냥 느낌이 비슷하다는 거야, 아니면 수치로 잴 수 있는 거야?"
수린이 몸을 이루던 물이 살짝 흔들렸다. 곤란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수치로 재요. 저희는 대장님 마력을 항상 재고 있으니까요.]"
"항상 재고 있었어? 몰랐는데."
"[말 안 했으니까요. 이백 년 동안 잴 필요가 없었거든요.]"
말 안 했으니까 몰랐다는 말이, 어쩐지 뒤에 이어질 이야기가 편치 않을 거라는 예고 같았다.
"[대장이랑 처음 계약할 때 기억나요?]"
토린이 흙덩이 몸을 굴리며 말했다.
"[대장이 밤마다 이상한 말을 했었죠. 한국어라고 했나. 우리는 못 알아들었지만, 그때 마력 파장이 지금이랑 똑같아요.]"
한국어. 이백 년 만에 그 단어를 정령의 입으로 들으니 이상하게 아렸다.
토린은 흙과 돌로 이루어진 몸이라 표정이라는 게 있을 수 없는데도, 어쩐지 나를 안쓰럽게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이겠지. 흙덩이가 눈치를 볼 리가.
"근데 그게 왜 문제인데? 옛날엔 한국어로 잠꼬대했었고, 지금은 안 그러잖아. 파장이 비슷하다고 해서 뭐 큰일이야?"
"[대장님, 혹시... 예전 일 기억나세요?]"
수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전 일이라는 게 뭘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령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백 년 전, 내가 이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의 기억들.
"기억나. 다 기억나."
말이 뜻하지 않게 툭 튀어나왔다. 정령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나도 놀랐다. 이런 얘기를 스스로 꺼낼 생각은 없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이었어. 야간자율학습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갑자기 이 세계로 떨어졌지. 처음 몇 년은 죽을 뻔한 게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어."
"[알아요, 대장님.]"
"근데 요즘은 그때 일이 잘 안 떠올랐거든. 이백 년이나 지났으니까. 그런데 아까 도현이 지구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다 선명해졌어. 우리 집 냄새, 교실 창문 밖 풍경, 엄마 목소리까지."
말하다 보니 목이 메었다.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내가 도현과 소민을 키우면서 그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됐지만, 나 역시 누군가의 자식이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교복 치마 길이가 학교 규정보다 짧다고 잔소리하던 목소리. 야자 끝나고 집에 오면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삶은 계란 두 개. 그런 게 이백 년이 지나서, 다른 세계에서, 정령들 앞에서 갑자기 떠오를 줄은 몰랐다.
"이상하지. 이백 년을 살면서 한 번도 이렇게 생생하게 안 떠올랐는데."
"[대장님, 그 감정 지금 억누르셔야 해요.]"
풍린의 목소리가 유난히 다급했다.
"왜? 그냥 옛날 생각 좀 하는 건데."
"[아뇨, 이거... 대장님 마력이랑 연결돼 있어요. 지구에 대한 기억이 감정적으로 자극되면 대장님 안에 있는 오래된 마력이 같이 반응해요. 그게... 통제가 안 될 수도 있어요.]"
통제가 안 된다는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SSS급 모험가로서 내 마력은 이미 통제의 극한까지 도달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백 년 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통제가 안 된다니. 나 SSS급인데. 마력 컨트롤로 대륙에서 나 이길 사람 없다고 다들 그러던데."
"[그건 지금 대장님이 만들어낸 마력 얘기예요. 그건 잘 다루세요, 대장님.]"
화린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근데 이건 그거랑 달라요. 대장님 안에 처음부터 있던, 지구에서 넘어올 때부터 있던 마력이에요. 저희가 손댈 수 없는 부분이요.]"
지구에서 넘어올 때부터 있던 마력이라는 말이 낯설었다.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진 뒤에야 마력이라는 걸 처음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있었어? 나는 이 세계 와서 처음 마력 다루는 법 배운 건데."
"[대장님이 처음 이 세계에 오셨을 때부터 대장님 안에 뭔가 있었어요. 저희도 정확히는 몰라요. 그냥 대장님 마력 중 일부가 다른 마력이랑 성질이 달라요.]"
"수린,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데?"
수린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대장님이 처음 저희를 계약하실 때, 마력이 폭주한 적이 한 번 있었어요. 그때 마을 하나가... 사라질 뻔했죠.]"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니, 어쩌면 내가 잊고 있었던 얘기일 수도 있었다. 정령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게, 이 이야기를 나한테 숨겨왔다는 뜻이었다.
"마을이 사라질 뻔했다고? 그런데 그동안 나한테 한 번도 말 안 했어?"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이백 년 동안 대장님은 안정적이었어요. 그 일 이후로는 파장이 다시 조용해졌고, 저희도 굳이 대장님 마음을 어지럽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지금은 왜?"
"[지금은...]"
수린이 말을 잇지 못하고 나머지 셋을 쳐다봤다. 토린이 흙 몸을 부스럭거리며 대신 말을 받았다.
"[그때랑 지금 파장이 똑같아요, 대장님. 하나도 안 다르게.]"
똑같다는 말이 자꾸 되풀이됐다. 나는 손끝을 내려다봤다.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 평범한 손이었다. 그런데 그 안쪽 어딘가에서, 이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뭔가가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았다.
농담을 하나 던지고 싶었다. 마을 하나 정도야 다시 세우면 되지, 라든가. 근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당 저편 창문에서 인기척이 났다. 도현이었다. 잠에서 깨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엄마, 아직 안 자요?"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손끝에서 시린 감각이 찌릿하게 올라왔다. 이번엔 그냥 냉기가 아니었다. 뭔가가 안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목덜미로 서늘한 것이 스며들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평소보다 한 박자 빠르게 뛰는 것도.
"엄마?"
도현의 목소리가 점점 걱정스러워졌다. 나는 손을 들어 보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은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원래 내 마력 색은 그런 색이 아니었다.
내 마력은 늘 옅은 푸른색이었다. 이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색을 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손끝에서 새어나오는 이 빛은 처음 보는 색이었다.
"이거 뭐야."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떨렸다. 정령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대장님!]"
수린의 외침이 마당 전체에 울렸다. 화린과 풍린도 각자 방어 태세를 갖추듯 몸을 낮췄다. 토린만이 그 자리에서 굳어 있었다.
손끝의 은백색 빛이 손목까지 번지고 있었다. 차가운 게 아니라, 이제는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감각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