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주말이 되기 전부터 나는 마음이 들썩였다. 마차가 도착할 시간이 아직 한나절이나 남았는데도 아침부터 부엌을 들락거리며 화린을 채근했다.
"화린, 스튜는 몇 시에 끓일 거야?"
"[마님, 아직 해도 안 떴어요.]"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나는 창밖을 세 번이나 내다봤다. 이백 년을 살아도 자식 기다리는 마음은 줄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다. 아니, 신기할 게 아니라 좀 한심했다. 스물한 살, 스무 살짜리 애들을 아직도 애 취급하고 있으니.
마을 초입에 마차 소리가 들린 건 정오가 살짝 지났을 때였다. 나는 앞치마도 벗지 않은 채로 뛰어나갔다. 손에 밀가루가 묻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엄마!"
도현이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나를 와락 안았다. 스물한 살짜리 덩치가 어찌나 커졌는지, 예전엔 내 품에 딱 들어왔는데 이제는 내가 그 품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갑옷 어깨 부분이 새로 광이 나 있었고, 옷깃 사이로 낯선 흉터가 살짝 보였다. 저 흉터는 언제 생긴 건지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저 이제 SS급이에요!"
SS급이라니. 승급 소식 정도로 알았는데 두 단계나 뛰었단 얘기였다. 나는 도현의 어깨를 잡고 위아래로 살폈다.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흉터 말고는.
"축하해. 근데 어떻게 두 단계나 올라간 거야?"
"던전에서 좀 큰 걸 잡았거든요."
큰 거라니, 그게 뭔지는 나중에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도현의 말투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지만 일단은 넘겼다. 뒤이어 마차에서 소민이 내려섰다. 스무 살답게 여전히 발랄한 걸음걸이였는데, 등에 멘 검집만은 예전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저 검을 들고 다니려면 팔 힘이 상당해야 할 텐데, 소민의 얇은 팔을 보면 믿기지 않는 무게였다.
"엄마! 나도 SS급이야!"
"둘 다 같이 올라갔어?"
"네! 같은 던전에서 같이 잡았거든요."
남매가 나란히 승급했다는 얘기에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이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도현은 던전 입구에 버려져 울고 있었고, 소민은 그 옆에서 오빠를 지키겠다며 작은 손으로 돌을 쥐고 있었다. 그때 소민의 손은 어찌나 작았는지, 돌 하나도 제대로 못 들었으면서 눈은 매섭게 나를 노려봤었다. 지금은 그 손으로 저 큰 검을 들고 SS급까지 올랐으니, 세월이 무섭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그게 스무 해쯤 전이었나, 지금 생각하면 아득했다. 나는 그동안 늙지 않았고, 이 아이들은 자랐다. 이상한 조합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그런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자, 다들 안으로 들어가. 화린이 아침부터 스튜를 끓였어."
"짜지 않아요?"
"희석시켰어."
소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부엌에서 화린이 뛰어나왔다. 앞치마에 불꽃 무늬가 새겨진 걸 보면 오늘도 뭔가 태울 뻔했다는 뜻이었다.
"[소민 언니! 오늘은 맵게 해드릴게요!]"
"화린, 짜다니까."
"[맵다니까요!]"
짜다와 맵다의 차이를 화린은 이백 년째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 스튜도 짤 게 뻔했고, 화린은 그걸 맵다고 우길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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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자 마을 사람들도 몇몇 초대해 조촐한 축하 파티를 열었다. 화린과 수린이 솜씨를 발휘해 상을 가득 채웠고, 풍린은 바람을 이용해 장식용 리본을 이리저리 예쁘게 매달았다. 토린은 흙으로 작은 조각상을 만들어 도현과 소민 자리에 놓아주었다. 조각상은 각각 도현과 소민의 얼굴을 닮아 있었는데, 도현 쪽은 코가 좀 크게 나온 게 흠이었다.
"[토린, 오빠 코가 왜 이렇게 커요?]"
"[...실수예요.]"
토린이 흙을 조물조물 만지며 코를 깎아내려 했지만, 이미 상 위에 올려진 조각상은 이상하게도 그 코가 매력 포인트처럼 자리 잡아 버렸다. 도현은 자기 코가 커진 조각상을 보며 그냥 웃어넘겼다.
아린은 신이 나서 도현과 소민의 무릎을 왔다갔다 하며 자랑했다.
"오빠, 언니, 나 이번에 마법 시험에서 백 점 맞았어!"
"우와, 대단한데?"
도현이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익숙하고 편안했다. 소민도 옆에서 아린의 볼을 콕콕 찌르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백 점이라니, 우리 아린이 천재네."
"천재 맞아! 선생님도 그랬어!"
이런 저녁이 나는 좋았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그릴 위에서 지글대는 고기 냄새, 정령들의 투닥거림. 마을 사람들이 잔을 부딪치는 소리, 누군가는 벌써 취해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백 년을 살아오며 얻은 게 뭐가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저녁을 보여주고 싶었다.
술잔이 몇 번 돌고,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였다. 도현이 잔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표정이 아까와는 다르게 굳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아린과 장난치던 얼굴이 아니었다.
"엄마, 아까 편지에서 얘기했던 거 있잖아요."
분위기가 순간 가라앉았다. 소민도 젓가락질을 멈추고 도현을 쳐다봤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두 남매가 마차 안에서 이미 이야기를 맞춰뒀다는 게 느껴졌다.
"그게 뭔데?"
"저희가 이번에 잡은 던전, 그게 좀 특이했어요."
"특이하다니?"
도현이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눈을 굴렸다. 이럴 때는 언제나 소민이 먼저 치고 들어왔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소민도 조용했다. 소민이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얘기라는 게 확실해졌다.
"그 던전, 지구랑 연결되어 있었어요."
순간 잔을 든 손이 그대로 멈췄다. 손끝에서 잔의 온도가 갑자기 느껴지기 시작했다. 차갑다는 걸 이제야 인지한 것처럼.
"...뭐라고?"
"지구요, 엄마. 엄마가 원래 살던 곳."
식탁 위의 촛불이 유난히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흔들리고 있었다. 풍린이 놓은 바람 장식이 갑자기 파르르 떨렸다. 풍린도 놀랐는지 자기가 만든 바람을 급히 거둬들이려 애썼지만 이미 늦었다.
지구. 이백 년 넘게 잊고 지내려 애썼던 그 단어가, 축하 파티 자리에서 이렇게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그 단어를 마지막으로 입에 담은 게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아니, 정확히는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어떻게 그게..."
말을 끝맺지 못했다. 도현의 눈빛이 심각했다. 평소 던전 얘기를 할 때의 신난 표정이 아니라, 뭔가를 조심스레 꺼내는 얼굴이었다.
"길드에서도 확인했어요. 정식으로 발표되진 않았지만, 던전 몇 개가 지구 쪽 특정 좌표와 연결됐다고. 저희가 잡은 것도 그런 던전 중 하나였고요."
"그럼 너희가 잡은 그 큰 거라는 게..."
"그것도 관련 있어요. 그 던전 안쪽에서 뭔가가 튀어나오려던 걸 저희가 막은 거예요."
식탁 위에 정적이 감돌았다. 아린만이 상황을 모른 채 스튜를 떠먹고 있었고, 정령들은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화린조차 앞치마 끈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수린의 몸에서 물방울이 미세하게 튀었다.
"[마님... 괜찮으세요?]"
괜찮냐는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백 년 만에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몸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조용히 뒤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래전에 묻어둔 기억이 이제야 흙을 뚫고 올라오려는 것처럼.
"엄마."
도현이 다시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마치 유리 조각을 다루는 것 같은 말투였다.
"길드장이... 엄마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