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퇴근길 지하철에서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했다.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몸을 비틀어 끼어 들어갔고, 옆 사람의 가방끈이 옆구리를 찔렀고, 앞사람의 핸드폰 액정에서 나오는 빛이 눈을 찔렀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낮에 있었던 일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부장님의 잔소리, 거래처의 컴플레인, 팀장님의 카톡 세 개.
카톡 세 개라고 해서 짧은 게 아니었다.
첫 번째는 "내일 오전까지 부탁드려요^^"였고, 두 번째는 "혹시 오늘 밤에 볼 수 있을까요?"였고, 세 번째는 아무 말 없이 파일 하나만 툭 던져놓은 거였다.
느낌표도 없고 이모티콘도 없는 그 무미건조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집에 도착하면 손끝까지 배터리가 방전된 느낌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어 던지듯 벗고,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은 무거운데 머리는 이상하게 말똥말똥했다.
잠들기엔 너무 지쳤고, 그냥 있기엔 너무 억울한, 그런 밤이었다.
그런 나에게 유일한 탈출구가 있었다.
바로 VRMMO '이상향 온라인'이었다.
거실 한 켠에 놓인 캡슐형 기기는 이제 침대보다 더 익숙한 물건이 되어 있었다.
월급의 반을 갈아 넣은 물건이라 애정도가 남달랐다.
캡슐형 기기에 몸을 눕히자 헤드셋이 자동으로 조여왔다.
차갑고 매끈한 감촉이 이마를 훑고 지나갔다.
그 서늘함이 오히려 안심이 됐다.
회사에서는 뜨거운 것들, 짜증, 화, 부장님의 붉어진 얼굴만 봤으니까.
【접속을 시작합니다.】
기계음이 사무적으로 울렸다.
저 목소리는 늘 똑같은 톤인데, 오늘따라 더 반가웠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더니, 순식간에 초록빛 공간이 펼쳐졌다.
풀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습기를 머금은 흙 내가 뒤이어 밀려왔다.
어디선가 새소리도 들렸다.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도 났다.
이게 게임이라고?
실제 숲에 들어온 줄 알았다.
발밑에는 이슬 맺힌 풀잎이 있었고, 그걸 밟자 촉촉한 감촉이 발바닥으로 전해졌다.
회사 화장실 방향제 냄새와는 비교도 안 되는, 살아 있는 초록의 냄새였다.
"어서 오세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니 은빛 로브를 입은 존재가 서 있었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고, 얼굴선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애매한 경계를 그리고 있었다.
목소리도 딱히 어느 쪽이라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저 부드럽고, 서늘하고, 물처럼 흐르는 목소리였다.
【저는 해울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처음 오신 분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일단 존댓말로 답했다.
NPC한테 존댓말 쓰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회사원의 습성이었다.
편의점 알바생한테도, 배달 앱 리뷰창에도 존댓말을 쓰는 인생이었으니까.
게임 속 안내 캐릭터한테 반말을 할 용기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서는 무엇이든 천천히 하셔도 괜찮습니다.】
···벌써 마음에 든다.
천천히 하셔도 된다는 말을 회사에서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었나 곱씹어봤다.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해울이 손을 가볍게 들자 눈앞에 반투명한 판이 떠올랐다.
【직업을 선택해 주세요.】
【전사 / 마법사 / 궁수 / 성직자 / 생산가 / 채집가 / 조련사】
일곱 개의 선택지 중에서 앞의 네 개는 딱 봐도 전투 계열이었다.
검, 지팡이, 화살, 성구.
아이콘만 봐도 피 냄새가 났다.
전사 아이콘은 칼날에 아직 핏자국이 남은 것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고, 성직자 아이콘조차도 성구를 쥔 손 아래로 은근한 광기가 느껴지는 디자인이었다.
뒤의 세 개는 조금 달랐다.
곡괭이, 바구니, 목줄.
곡괭이는 은은한 흙빛으로, 바구니는 나무 냄새가 날 것처럼 따뜻한 색으로, 목줄은 어딘가 앙증맞게 그려져 있었다.
"저는 싸우는 거 안 하려고요."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회사에서도 안 하는 다툼을 굳이 게임에서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직장에서 겪는 갈등만으로도 인생의 갈등 지분은 다 채운 것 같았다.
칼 들고 몬스터랑 싸우다가 데미지 입고, 회복하고, 또 싸우고—그 사이클이 야근이랑 뭐가 다른가 싶었다.
【좋은 선택입니다. 이 세계에는 단순히 살아가듯 게임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살아가듯 게임을 한다는 말이, 그동안 게임을 하면서도 뭔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던 나에게는 낯설게 다가왔다.
레벨업, 랭킹, 순위표.
그런 것들 없이도 그냥 살아도 된다는 게 가능한 걸까.
"진짜로요? 여기 몬스터 잡고 레벨 올리는 게임 아니에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함정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요즘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공짜 커피 쿠폰도 결제 정보를 등록해야 나오는 세상인데, 이렇게 순순히 "싸우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전투는 이 세계의 한 축입니다. 하지만 유일한 축은 아닙니다.】
【채집, 제작, 사육, 요리, 건축까지, 살아가는 방식은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한 축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한 축이면, 다른 축도 있다는 소리 아닌가?
다른 축이 있다는 건, 이 축도 언젠가 마주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마치 회사에서 "이건 협업 부서 일이라 저희 소관 아니에요"라고 했다가 결국 두 달 뒤에 그 일이 내 책상 위로 넘어오는 것과 비슷한 구조 아닌가.
···불안한데.
하지만 지금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당장 걱정해봐야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일단 캐릭터부터 만들어야 다음이 있으니까.
판 위의 목록에서 손끝으로 '채집가'를 눌렀다.
캐릭터가 흙투성이 가방을 어깨에 메는 애니메이션이 재생됐다.
가방끈이 어깨에 척 걸쳐지는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직업: 채집가로 설정되었습니다.】
【보조 직업을 하나 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보조 직업도 있어요?"
이건 또 뭔가.
회사에서도 본업 하나로도 벅찬데 게임에서 부업까지 하라는 건가.
【네. 채집가는 주로 자원을 모으는 역할이지만, 그 자원을 가공하는 제작 계열과 병행하면 더 효율적입니다.】
효율적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건 회사원의 몸이 기억하는 습관이었다.
효율, 생산성, ROI.
그 단어들만 들으면 등이 저절로 곧게 펴지는 파블로프의 개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목록을 다시 살펴봤다.
【요리사 / 재봉사 / 연금술사 / 조련사】
조련사를 누르려던 손이 멈칫했다.
동물 키우는 걸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대학 시절, 옆집 개한테 매일 간식을 주고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개 이름이 뭐였더라, 콩이였나 콩순이였나.
아무튼 그때만큼은 취업 걱정도, 학점 걱정도 잠시 잊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건 좀 나중에 생각해보자.
지금은 좀 더 현실적인 선택이 필요했다.
채집이랑 시너지가 나는 걸 골라야 했다.
일단은 요리사를 선택했다.
채집한 재료로 뭔가를 만든다는 게 왠지 지친 직장인의 삶에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숲에서 캐 온 나물로 뭔가 뜨끈한 국을 끓이는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재봉사는 바느질을 못했고, 연금술사는 뭔가 폭발할 것 같은 이미지라 패스했다.
【보조 직업: 요리사로 설정되었습니다.】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튜토리얼 필드로 이동하겠습니다.】
해울의 손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세상이 다시 하얗게 번졌다.
빛이 퍼지기 직전, 뭔가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물어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저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얼마든지요.】
해울의 목소리는 여전히 잔잔했다.
서두르는 기색도, 귀찮아하는 기색도 없었다.
이런 게 프로페셔널이지, 생각하며 나는 다시 물었다.
"저처럼 전투 안 하려는 사람, 진짜로 있어요?"
【네. 적지는 않습니다.】
【다만 완전히 전투를 피하며 지내는 건 쉽지 않다는 말도 함께 드리고 싶습니다.】
순간 몸이 굳었다.
방금 그 말, 뭔가 복선처럼 들리는데.
쉽지 않다는 말은 회사에서도 자주 듣는 말이었다.
"이번 일은 쉽지 않을 겁니다"라는 말 뒤에는 항상 야근과 주말 출근이 따라왔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살짝 높아졌다.
지금 이 평화로운 숲, 이 상냥한 안내자 앞에서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이 세계는 아름답지만,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해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안전하지 않다는 말을, 이렇게 상냥한 톤으로 하는 게 가능한가.
하얀 빛이 시야를 완전히 뒤덮었다.
···이거 시작부터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전투 없이 조용히 채집이나 하면서 힐링 라이프를 즐기려던 계획이 벌써부터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회사에서 벗어나 이 세계로 도망쳐 왔는데, 여기서도 뭔가에 쫓기게 되는 건 아닐까.
다음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세상이 바뀌었다.
빛이 걷히기 시작했고, 그 틈새로 낯선 풍경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