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저는 전투 안 합니다

3화

동쪽 언덕으로 가는 길은 완만한 경사가 이어졌다. 풀숲이 무릎 높이까지 자라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초록빛 물결이 일었다. 공기에서는 흙냄새와 함께 옅은 풀 비린내가 섞여 났다. 발밑에서 자갈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신발 밑창을 뚫고 올라오는 냉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하늘은 뿌옜다. 해가 뜬 지 얼마 안 됐는지 언덕 위쪽은 여전히 그늘 속이었다. 게임 속 세계인데도 계절감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현실이었다면 진작 미세먼지 앱을 확인했을 텐데, 여긴 그런 게 없어서 오히려 편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돌아보니 은채가 뛰어오고 있었다. 앞치마를 벗고 대신 가벼운 가죽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조끼 여기저기 작은 주머니가 달려 있었는데, 아마 채집용 도구들을 넣는 용도인 모양이었다. 숨이 조금 찬 듯 볼이 발갰다. "같이 가려고요. 첫날은 안내가 필요할 것 같아서." "어, 감사해요." 솔직히 조금 놀랐다. 이런 서비스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상점 주인이 손님 따라 산에 오르는 게 정상인가. 현실 세계였다면 편의점 알바생이 손님 따라 등산하는 꼴인데. "저 원래 여기까지 손님을 따라오지는 않는데,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라서요." "특별한 날이요?" "아, 그건 나중에요. 일단 걸으면서 얘기해요." 은채가 앞장서서 걸었다. 발걸음이 가벼워서 마치 이 길을 몇백 번은 걸어본 사람 같았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아까 물어봤던 거, 몬스터 얘기요. 진짜 없는 거예요?" 은채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흩트려 놓았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네." 괜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뭔가 나쁜 소식이 올 것 같은 예감이었다. 회사에서 팀장이 "잠깐 얘기 좀 할까요" 할 때랑 똑같은 느낌이었다. "완전히 전투를 피할 수는 없어요." 걸음이 멈췄다. 발이 땅에 붙은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는 채집가고 전투 스킬도 없는데요." "채집터 근처에도 저레벨 몬스터가 랜덤으로 리젠돼요. 확률은 낮지만 0은 아니에요." 은채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전혀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치 오늘 날씨가 조금 흐릴 수도 있다는 정도의 톤이었다. 아니 그게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얘기냐고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저 진짜 싸움 못 해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회사에서도 대립을 피해 다녔던 나였다. 회의실에서 언성이 조금만 높아져도 손끝이 차가워지던 사람이 바로 나다. 하물며 게임 속 몬스터라니, 상상만 해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싸울 필요는 없어요." 은채가 태연하게 말했다. "채집가는 도망 관련 패시브가 있어요. 이동 속도 보너스, 은신 스킬도 초반에 배울 수 있고요." "도망치면 되는 거예요?" "네, 그리고 낮은 등급 몬스터는 보통 먼저 도발하지 않으면 공격 안 해요."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완전히 놓이지는 않았다. '보통'이라는 단어가 걸렸다. 보통이면 예외도 있다는 소리였다. 세상에 '보통'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나한테는 반드시 예외가 일어나더라. 회사에서도 "보통 이런 일은 없는데" 하면 꼭 나한테 그 일이 터졌다. ···이 게임, 처음부터 뭔가 불안한 단어를 자주 쓴다. "근데 채집가 직업, 진짜 안전한 거 맞아요? 광고랑 다른 거 아니죠?" "안전 쪽으로는 상위권이에요. 전사나 마법사에 비하면 리스크가 확실히 낮아요." "상위권이라는 게 몇 위인지가 중요한 건데요." 은채가 살짝 웃었다. "그런 거까지 세세하게 순위표가 있는 건 아니라서요." 없다고요? 그럼 그 상위권이란 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근거인 거죠. 따지고 싶었지만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은채를 따라가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 "저기 보이시죠?" 은채가 손가락으로 언덕 위쪽을 가리켰다. 연둣빛 풀들 사이로 작은 노란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멀리서 봐도 색이 또렷해서 눈에 확 들어왔다. "저게 상비약초예요. 노란 꽃이 특징이고요." "이름이 왜 상비약초예요? 상비약이랑 뭔 상관이길래." "달여서 마시면 가벼운 상처나 피로회복에 도움이 돼서요. 현실 세계 상비약 개념이랑 비슷하다고 보시면 돼요." 다가가서 살펴보니 잎맥이 유난히 선명했다. 잎 뒷면은 은빛에 가까운 색이었고, 만지면 살짝 끈적한 느낌이 났다. 낫으로 살짝 밑동을 자르자 시원한 풀 냄새가 확 퍼졌다. 박하 비슷한 향인데 그보다 좀 더 무거운 느낌이었다. 【상비약초를 채집했습니다.】 【채집 스킬 경험치 +5】 작은 알림이 떴다. 별거 아닌데도 마음이 두근거렸다. 회사에서 엑셀 표 하나 완성했을 때보다 열 배는 짜릿했다. "오, 첫 채집 성공하셨네요." 은채가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 웃는 얼굴이 생각보다 앳돼 보였다. "이거, 몇 개나 더 캐야 돈이 되는 거예요?" "상비약초는 시세가 낮아서 좀 많이 캐셔야 해요. 대신 흔해서 개수는 쉽게 채우실 수 있을 거예요." "많이가 얼마나요?" "오늘 하루면 못해도 오십 개는 캐실 걸요." 오십 개. 숫자를 듣자마자 벌써 허리가 아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후로 나는 정신없이 손을 움직였다. 노란 꽃을 찾고, 낫으로 자르고, 바구니에 담았다. 허리가 아플 만큼 굽혔다 폈다를 반복했지만, 이상하게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몸속에서 뭔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채집 알림이 뜰 때마다 손끝이 저릿한 게, 마치 작은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상비약초를 채집했습니다.】 【채집 스킬 경험치 +5】 【상비약초를 채집했습니다.】 【채집 스킬 경험치 +5】 같은 알림이 반복해서 떴다. 지겨울 법도 한데 볼 때마다 웃음이 났다. 현실에서는 이런 알림이 뜬다면 아마 스팸 문자겠지. 은채는 근처에서 다른 풀을 살피고 있었다. 가끔 이쪽으로 와서 잎을 확인해 주기도 하고, 벌레 먹은 부분은 골라 버리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이건 안 돼요, 벌레 먹은 잎은 품질 등급이 낮게 나와요." "등급까지 있어요?" "네, 상급, 중급, 하급 이렇게 세 단계로 나뉘는데, 잘 딴 상비약초는 상급으로 팔 수 있어요." "저는 이거 그냥 다 하급으로 파는 거예요?" "지금 캐신 건 나쁘지 않아요. 절반은 중급 나올 것 같은데요." 절반이 중급이라니, 생각보다 손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회사에서는 손재주랄 게 딱히 없었는데, 여기서는 다른 재능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초보자 보정인 걸지도. 삼십 분쯤 지나자 바구니가 절반쯤 찼다. 손목이 조금 뻐근했지만 참을 만했다. 바람이 다시 한 번 풀숲을 훑고 지나갔다. "이제 슬슬 다른 구역으로 옮겨볼까요? 여기 은엽초도 있는데···." 은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풀숲이 흔들렸다. 바스락.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뭔가 무게가 있는 게,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소리였다. "저거, 뭐예요?"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풀숲 사이에서 초록빛 눈동자 두 개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밝게 빛났다. 【필드 몬스터 '풀숲살쾡이'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저, 저거 위험해요?" "초급 몬스터예요. 근데 지금 이쪽으로 오는 게 좀 이상한데···." 은채도 살짝 뒤로 물러났다.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지금까지 봤던 여유로운 표정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방금까지 태연했잖아요. 초급이라면서요, 초급이면 안전한 거 아니었어요. 초록빛 눈동자가 풀숲에서 완전히 몸을 드러냈다. 삵을 닮은 몸체에 이끼색 털이 뒤덮여 있었다. 크기는 대형견 정도였고, 이빨 사이로 침이 흘러내렸다. 콧등에는 오래된 상처 자국이 있었는데, 그게 이상하게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말했잖아요, 저 전투 못 한다고요. 바구니 하나 든 채집가한테 왜 이래요, 대체. 다리가 떨렸다. 바구니를 든 손에 힘이 빠졌다. 낫을 쥔 다른 손도 감각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도망쳐야 하는데, 발이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풀숲살쾡이의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해 좁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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