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빛이 걷히자 낮은 지붕들이 늘어선 마을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굴뚝에서 흘러나오는 연기 냄새, 빵 굽는 냄새, 젖은 나무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거기에 은근한 두엄 냄새도 섞여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진짜 사람 사는 곳 같다는 이상한 안도감을 줬다.
회사 근처 편의점 삼각김밥 냄새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마을 '들꽃 정착지'에 도착했습니다.】
"들꽃 정착지?"
이름부터 순박했다.
뭔가 큰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이름은 아니었다.
던전 이름도 아니고, 무슨 '피의 협곡'이나 '절망의 탑'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들꽃이라니.
···그래, 이런 곳에서 조용히 살고 싶었다.
야근도 없고, 부장도 없고, 팀장 카톡도 없는 곳.
해울은 마을 중앙 광장에서 걸음을 멈췄다.
광장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고, 그 아래 여러 갈래의 길이 뻗어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는 벌써 몇몇 플레이어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누군가는 지도를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뭔가를 상의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냥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자유롭게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생산 계열을 선택하셨다면, 저쪽 골목에 있는 '생산 길드'를 방문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손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나무 간판이 걸린 이층 건물이 보였다.
간판에는 곡괭이와 실타래가 교차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빛바랜 페인트 위로 덧칠한 흔적이 보였는데, 그게 또 나름 정겨웠다.
새 건물보다는 오래 써서 낡은 건물이 왜인지 더 믿음직스러웠다.
"저기서 뭐 해요?"
[제작 레시피 등록, 재료 감정, 제작대 대여 등을 도와줍니다.]
[직원분들이 초보자에게 친절하게 안내해주실 겁니다.]
초보자에게 친절하다는 말이 벌써 반가웠다.
회사에서는 아무도 친절하지 않았으니까.
신입 때 사수가 첫날 던진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거 매뉴얼에 있는데 왜 물어봐요?"
그 뒤로 나는 뭘 물어보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됐다.
그런데 지금, 시스템이 알아서 친절하게 안내해준다니.
이 정도면 회사보다 낫다는 게 슬픈 건지 다행인 건지 모르겠다.
"고마워요, 해울씨."
[저는 이제 다른 신규 접속자를 도우러 가야 합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시스템 메뉴의 '도움말'을 확인해주세요.]
해울의 몸이 스르륵 빛으로 흩어지더니 사라졌다.
···진짜 게임 NPC답게 딱 필요한 만큼만 있다 가네.
인사 한마디 더 붙이면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예의는 딱 매뉴얼대로만 지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뭐, 그게 또 편했다.
사람 감정 신경 쓰면서 대화하는 것보다야.
혼자 남은 나는 광장을 둘러봤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뭔가를 거래하고 있었다.
"이거 재료값만 해도 손해인데요?"
"그럼 더 얹어드릴게요, 대신 하나만 더 얹어주세요."
거래는 어디서나 다 저런 식인가 보다.
한쪽에서는 커다란 검을 메고 있는 캐릭터가 위풍당당하게 지나갔다.
검이 어찌나 큰지 걸을 때마다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또 다른 쪽에서는 작은 새를 어깨에 얹은 사람이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녔다.
새가 삐약거리는 소리가 광장 안을 가볍게 울렸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이 세계를 살고 있었다.
전투 계열은 전투 계열답게, 생산 계열은 생산 계열답게.
나는 그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치며 생산 길드 쪽으로 걸어갔다.
혹시라도 저 커다란 검에 옷깃이라도 스칠까 봐 최대한 멀찍이 돌아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나무 냄새와 함께 은은한 열기가 느껴졌다.
제작대 여러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벽면에는 온갖 레시피가 그려진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한쪽 벽에는 무슨 항아리 그림, 다른 쪽에는 옷감을 짜는 그림.
전부 손으로 그린 것 같은 삐뚤빼뚤한 그림체였는데, 그게 또 나름 귀여웠다.
문을 열자 딸랑, 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어, 신규 회원님이시네요?"
카운터 뒤에서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짧은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성이었다.
작업용 앞치마에는 밀가루 같은 흰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다.
손등에도 작은 화상 흉터 같은 게 하나 있었는데, 아마 오랫동안 제작대 앞에서 뭔가 만들어온 증거인 것 같았다.
"네, 처음이에요."
"환영합니다! 저는 서은채라고 해요. 생산 길드 담당이에요."
은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왠지 마음이 놓였다.
뭔가 친근한 이름이었다.
옆집 언니 같은, 학교 다닐 때 급식실에서 밥 더 퍼주던 조리사 이모님 같은 그런 이름.
"채집가랑 요리사로 시작했는데, 여기서 뭘 하면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오, 조합 좋으시네요."
"그래요?"
"채집이랑 요리는 세트로 많이들 하세요. 캐온 재료를 바로 요리로 돌릴 수 있으니까요."
은채는 카운터 위에 있던 종이 뭉치를 뒤적이더니 지도 하나를 꺼냈다.
지도는 손으로 그린 것치고 꽤 세밀했다.
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마다 작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동쪽에는 나무와 꽃, 서쪽에는 산과 바위, 남쪽에는 강줄기, 북쪽에는 이상하게 붉은 색으로 칠해진 구역이 있었다.
"마을 근처에 채집터가 몇 군데 있어요. 초보자용으로는 동쪽 언덕이 제일 안전하고요."
안전하다는 단어에 눈이 번쩍 뜨였다.
"거기서 약초를 캐면 되는 거예요?"
"네. 상비약초, 은엽초 같은 게 잘 나와요. 요리사 스킬로 요리도 만들 수 있고, 상급 재봉사한테 넘기면 물약 재료로도 쓰이거든요."
은채는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 지점을 짚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상비약초는 이 근처, 은엽초는 좀 더 안쪽 그늘진 데 있어요. 낫으로 슥 베면 바로 채집돼요."
"낫이요? 저 그런 거 한 번도 안 써봤는데."
"어렵지 않아요. 그냥 다가가서 상호작용 버튼 누르시면 자동으로 캐집니다."
"오, 편하네요."
이 세계는 뭘 해도 나름 배려가 있는 것 같았다.
"제작은 처음엔 실패도 많이 하실 거예요. 근데 걱정 마세요, 실패해도 재료의 일부는 돌아와요."
"진짜요?"
마음이 확 놓였다.
실패해도 밑지는 게 아니라니, 이건 진짜 착한 시스템이었다.
회사에서는 실패하면 그냥 다 내 책임이었는데.
프로젝트 하나 망치면 야근 수당도 없이 밤새 원인 분석 보고서 쓰던 게 생각났다.
여기는 실패해도 30퍼센트를 돌려준다니, 회사보다 관대한 시스템이라는 게 참 슬픈 동시에 감동적이었다.
"보통 30퍼센트 정도 돌아온다고 보시면 돼요. 물론 스킬 레벨 오르면 더 많이 돌아오고요."
"그럼 마음 편하게 도전해봐도 되겠네요."
"그럼요! 여기 사람들 대부분 처음엔 다 실패투성이였어요. 저도 처음 요리 배울 때 빵을 태워서 숯덩이 만든 적도 있고요."
"숯덩이요?"
"네, 그것도 팔았어요. 신기하게 사가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낚시 미끄러움 방지용으로 쓴다면서."
은채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이 회사 동기들 웃음보다 훨씬 진심 같았다.
회사에서는 웃어도 눈은 안 웃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은채의 웃음은 눈꼬리까지 다 접혀 들어가는 그런 웃음이었다.
"근데 채집터 가는 길에 몬스터 같은 거 없어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 해울이 남긴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딱 필요한 만큼만 있다 사라진 그 NPC가, 뭔가 중요한 걸 안 말해준 것 같은 느낌.
"음, 동쪽 언덕은 웬만하면 안전한데···."
은채가 살짝 말을 흐렸다.
그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굳었다.
카운터 위에 놓여 있던 지도를 살짝 뒤집어놓는 손놀림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뭔가 있어요?"
"아니,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일단 채집도구부터 챙기실까요?"
말을 돌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은 첫날이었고, 첫날부터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궁금해서 몇 번 더 물어보고 싶었는데, 은채의 표정이 더 이상 파고들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이 사람도 뭔가 곤란한 게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일단 넘겼다.
은채가 카운터 밑에서 나무 바구니와 낫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바구니는 손잡이가 낡아 반들반들했고, 낫은 날이 얇고 가벼웠다.
무게를 가늠하려고 손에 쥐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이 정도면 손목 아플 일은 없겠다 싶었다.
"이거 초보자용 채집 세트예요. 무료로 드려요."
"공짜요?"
"네, 신규 회원 혜택이에요."
···이 게임 진짜 나한테 잘 맞는 것 같다.
나는 바구니를 받아들며 속으로 살짝 웃었다.
오랜만에 뭔가를 공짜로 받아본 기분이었다.
회사에서는 볼펜 한 자루도 자기 돈으로 사야 했는데.
"그럼 저 이제 채집터로 가볼게요."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은채의 마지막 인사가 왠지 평소보다 조금 무겁게 들렸다.
목소리 끝이 살짝 늘어지는 느낌이랄까,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 채 길드 문을 나섰다.
문밖으로 나오자 다시 마을의 소음이 밀려왔다.
거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어디선가 들리는 대장간의 망치질 소리, 그리고 저 멀리서 뭔가 울부짖는 듯한 짐승 소리 하나.
···방금 저거, 뭐였지.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동쪽 하늘 저편, 언덕 능선 너머로 옅은 그림자 같은 게 스치듯 지나간 것 같았다.
바람 소리였을까, 아니면.
바구니 손잡이를 꽉 쥐며 나는 다시 동쪽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