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게임 악역이 나라니

1화

부산 청뢰가(靑雷家) 본가의 새벽 수련장은 언제나 서늘한 정적으로 가득했는데, 그 침묵을 깨는 것은 오직 강도훈의 발끝이 마루를 스치는 소리뿐이었다. 촤아아아악! 허공을 가른 손끝에서 옅은 청백색 전류가 튀어 오르며 수련용 목인(木人)의 목이 통째로 날아갔고, 도훈은 그 광경을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다음 자세로 넘어갔다. '또 저 수준인가.' 스무 살을 넘긴 뒤로는 웬만한 수련으로는 숨조차 가빠지지 않았으니, 그는 목인의 잘린 목을 발끝으로 툭 걷어차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그는 반대편에 세워둔 또 다른 목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 걸음걸이는 마치 산책하듯 여유로웠으나 어깨에서부터 손끝까지 흘러가는 전류의 기세만큼은 결코 여유롭지 않았다. 위이이이잉— 손끝을 타고 흐르는 전류가 점차 강해지며 파직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도훈은 그 소리를 들으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는 재미가 없는데." 청뢰가는 부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은 영남팔가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이었으며, 대대로 전격 계열의 영기 수련법을 이어온 가문답게 그 후계자로 태어난 도훈에게는 어릴 적부터 온갖 기대와 시선이 쏟아졌다. 1급 퇴마사, 스물세 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취, 그리고 그 성취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오만한 태도까지 — 모든 것이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였다. 가문의 어른들은 도훈을 두고 "청뢰가 백 년 이래 가장 뛰어난 재능"이라 칭송했으나, 그 칭송의 이면에는 늘 은근한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재능이 지나치게 뛰어난 자는 오만해지기 쉽고, 오만해진 자는 언젠가 자신의 가문마저 짓밟을 수 있다는 불안—그 불안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내는 이는 없었으나, 도훈 스스로도 그 시선의 온도를 모를 리 없었다. "당주 대행님, 오늘 오전에는 영남팔가 정례 보고가 있습니다." 집사 격인 중년 사내가 조심스레 다가와 고개를 숙였고, 도훈은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으며 대답 대신 짧게 코웃음을 흘렸다. "보고서야 뭐, 늘 그 타령이지. 다들 서로 견제하다가 슬쩍 자기 몫만 챙기려 드는 자리 아닌가." 비아냥이 섞인 그 말투에 집사는 별다른 대꾸 없이 시선을 내렸는데, 오래 모셔온 그로서도 도훈의 신랄한 화법에는 이미 이골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참석은 하셔야···" "알아, 안다고. 가서 앉아만 있으면 되는 자리잖나." 도훈은 수건을 어깨에 걸치며 몸을 돌렸고, 그 뒷모습에는 이미 오늘 하루의 지루함이 예정되어 있다는 듯한 권태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렇게 평범한 하루가 시작될 것이라 여겼던 순간이었다. 쿠웅! 갑작스레 머리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고, 도훈은 반사적으로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뭐, 뭐지?'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종류의 두통이었으며, 마치 누군가 그의 머릿속에 억지로 다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쏟아붓는 듯한 감각이 그를 덮쳤다. 콰지직··· 관자놀이 안쪽에서 뭔가가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으나, 그것이 실제로 들리는 소리인지 아니면 그의 신경이 만들어낸 착각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낯선 풍경들이 파편처럼 쏟아졌다. 형광등 불빛 아래 놓인 모니터, 손끝에 익숙하게 감기는 마우스의 감촉, 새벽까지 이어지던 야근, 상사의 잔소리, 편의점에서 사 먹던 삼각김밥의 밍밍한 맛, 그리고 어느 순간 도로 위에서 눈앞으로 확대되던 헤드라이트의 빛까지—모든 장면이 뒤섞여 그의 의식을 후려쳤다. '이건··· 내가 아니잖아.' 분명 자신의 기억이 아니었으나, 동시에 지독하게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마치 오래전에 잊고 지낸 다른 삶을 이제야 되찾은 것처럼, 그 이질적인 기억들은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그의 안에 자리를 잡아갔다. 위이이잉! 왜애애앵! 위이이잉!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그 소음은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아니었을 텐데도, 도훈에게는 마치 수백 개의 스피커가 동시에 울부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주 대행님!" 집사가 놀란 목소리로 다가왔으나 도훈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침묵이었으니까. 한참을 그 자리에 웅크린 채로, 도훈은 밀려드는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붙잡아 정리해 나갔다. 낯선 이름들, 낯선 화면 속 캐릭터들, 그리고 그 화면 위에 떠 있던 익숙한 제목 하나가 서서히 선명해졌다. 『월하잠식(月下蠶食)』. 어느 성인 게임의 제목이었다. 영남 지역을 배경으로 한 퇴마 가문들의 이야기, 각 가문의 여식들이 하나둘 무너져가는 전개, 그리고 그 몰락의 중심에 서 있던 냉혹하고 오만한 청뢰가의 후계자— '설마.' 도훈은 천천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손이었으나 동시에 낯설게 느껴졌다. '강도훈.'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이름이었으며, 동시에 그 게임 속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초반 악역의 이름이기도 했다. 기억은 계속해서 쏟아졌다. 새벽 두 시, 모니터 앞에 앉아 그 게임을 플레이하던 자신의 모습—퇴근 후 유일한 낙이었던 그 게임을, 밤을 새워가며 클리어하려 했던 어느 순간—그리고 그 게임의 초반부, 설한가의 여식을 능욕하고 파멸시키는 장면에서 유독 정교하게 그려졌던 청뢰가 후계자의 얼굴이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얼굴과 정확히 겹쳐졌다.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소름이 훑고 지나갔다. '잠깐만. 그럼 나는···' 도훈의 사고는 거기서 잠시 멈췄다. 게임 속에서 이 캐릭터가 맞이하는 결말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기억만은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뇌리 어딘가에 흐릿하게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당주 대행님, 안색이··· 어디 편찮으십니까?" 집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도훈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속으로는 이미 형언할 수 없는 혼란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내가··· 저 게임 속 악역이라고?' "아니, 괜찮네. 잠시 현기증이 났을 뿐이야." 도훈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애써 웃음을 지었으나, 그 웃음이 얼마나 어색했는지는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날 오전 내내, 도훈은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는 척했으나 그의 머릿속은 온통 조각난 기억들을 이어 붙이는 작업으로 가득했다. 영남팔가, 설한가, 천주가—낯설지 않았던 이름들이 하나둘 게임 속 설정과 정확히 겹쳐지기 시작했으며, 그 사실을 확인할수록 그는 마치 자신의 발밑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집사가 건네는 서류의 문구 하나하나마저 게임 속 대사와 겹쳐지는 순간, 도훈은 서류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설한가라니. 그 이름이 진짜로 존재한다니.' 게임 속에서 설한가는 청뢰가와 오랜 앙숙 관계였던 가문이었고, 그 가문의 장녀가 게임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는 사실까지도 이제는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건 우연일 리가 없다.' 오후가 되어 집무실에 홀로 앉은 도훈은 창밖으로 내리는 부산의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살아온 이 인생 전체가··· 누군가가 짜놓은 시나리오였다는 건가." 그 말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나, 도훈의 뇌리 속에서는 이미 끔찍한 확신이 자라나고 있었다. 스물세 해 동안 쌓아온 자신의 신분과 재능, 그리고 그 오만한 성격까지도—모두가 그 게임의 '초반 악역'이라는 배역을 완성하기 위한 조각들이었다는 확신이.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사람들도, 내가 겪은 사건들도 전부 그 시나리오의 일부였다는 뜻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도훈의 손끝에서 다시 옅은 전류가 파직거리며 튀어 올랐고, 그는 그것을 애써 억누르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침착하자. 일단은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을 끌어당겨, 기억나는 대로 게임 속 설정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영남팔가의 이름, 각 가문의 특징,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순서까지—마치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필사적으로 적어 내려가던 그의 손끝은 어느새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뭔가 손을 써야 한다. 가만히 있다가는···' 삐이이이— 그때 집무실 한쪽에 놓인 통신 단말기에서 낮은 신호음이 울렸고, 화면 위로 낯익은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영남팔가 정례 회의 소집』 도훈은 그 문구를 응시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도, 그는 이 게임의 결말이 자신에게 결코 좋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이미 뼈저리게 직감하고 있었다. 애처로운 예감. 그리고 그 예감이 결코 빗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도훈은 이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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