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날 밤, 도훈은 침소에 홀로 누워 천장을 응시하며 낮 동안 밀려들었던 기억들을 하나씩 다시 곱씹었다.
'월하잠식이라니.'
제목부터가 노골적인 그 게임의 내용은, 되짚을수록 소름이 돋는 것투성이였다.
영남 지역의 여덟 퇴마 명문가—영남팔가—의 여식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등장했으며, 그 이야기의 초반부에서 가장 먼저 등장해 판을 흔드는 인물이 바로 청뢰가의 후계자, 강도훈이었다.
오만하고 냉혹하며 재능만큼 인성이 결핍된 캐릭터. 초반 몇 개의 챕터를 지배하다 결국 주인공 격 남캐에게 처참하게 몰락하는 전형적인 '초반 빌런'.
'그 몰락이··· 결코 곱게 끝나지 않았지.'
기억의 파편 속에서, 도훈은 자신이 화면 너머로 지켜보았던 그 캐릭터의 결말을 떠올렸다. 권력을 잃고, 가문에서 축출되고, 그러다 끝내는—
뚜두둑.
손가락 마디가 절로 오그라들며 뒤틀리는 소리를 냈다. 그 결말을 완전히 떠올리기 직전, 도훈은 스스로 그 기억을 거칠게 밀어냈다.
'아니, 아직은 알 필요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결말이 아니라, 그 결말로 향하는 흐름을 끊어내는 방법이었으니까.
이불 속에서 도훈은 다시 눈을 감았다가, 곧 다시 떴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몸은 분명 강도훈의 것이었으나, 그 안에 들어앉은 정신은 여전히 낯선 세계에 떨어진 이방인의 것이었으므로.
'차분하게 정리해보자.'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알고 있는 정보들을 되짚었다. 게임 속에서 강도훈이 등장했던 것은 초반 십여 개의 챕터. 그 안에서 그는 청뢰가의 후계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다른 명문가의 여식들을 시험하고 조롱하며,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받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 오만함이 결국 주인공 남캐와의 충돌로 이어졌으며, 그 충돌의 결과는—
'또 거기서 막히는군.'
기억은 매번 같은 지점에서 뭉개졌다. 마치 뇌 속에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져 있는 듯, 결말 직전의 장면만은 도무지 선명해지지 않았다. 도훈은 그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말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결말을 모르는 지금이야말로, 아직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시점일 수도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도훈은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수련장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목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마루 위에 서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하나씩 되짚기 시작했다. 여덟 살 무렵, 처음 영기를 다루는 법을 배우던 그날, 도훈은 또래 아이들 중 유독 늦게 기운을 다루기 시작한 아이였다.
'그때부터였나.'
숙부의 자식들이 먼저 재능을 드러내며 어른들의 칭찬을 독차지하던 시절, 도훈은 그 시선들 사이에서 유독 초조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밤마다 홀로 수련장에 남아 손끝이 갈라질 만큼 기운을 짜내던 기억, 남들보다 배는 더 노력해야 겨우 비슷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었던 나날들—
뻐드득.
당시 무리하게 기운을 억지로 뽑아내던 탓에 손목 관절이 통째로 뒤틀리는 소리를 내며 부러졌던 기억까지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 절박함이··· 결국 이런 성격을 만들어버린 건가.'
남을 밟고 올라서야만 안심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강박, 그것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오만하고 신랄한 성격으로 굳어졌다는 사실을, 도훈은 이제야 냉정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정확히··· 악역의 조건이었단 말이지.'
재능은 진짜였다. 노력도 진짜였다. 하지만 그 모든 진정성이 오히려 그를 배려심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는 역설이, 지금 이 순간 그를 가장 갉아먹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방향을 틀어야 한다.'
재능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노력의 결과를 통째로 버릴 이유도 없었다. 다만 그것을 휘두르는 방식을, 남을 짓밟는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는 방패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 그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도훈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마루 아래로 내려서던 도훈의 눈에, 저 멀리서 분주히 움직이는 하인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른 시각임에도 청뢰가의 아침은 늘 소란스러웠다. 명문가의 위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손길이 필요했으므로.
'저들의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 도훈이 하인들을 대하던 방식은, 사람이 아니라 도구를 다루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게임 속 강도훈의 몰락이 단순히 주인공 남캐 한 명과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그 주변의 무수한 작은 균열들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일 수도 있었다. 도훈은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
"당주 대행님, 준비되셨습니까?"
집사의 목소리에 도훈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자세를 잡았다. 오늘의 수련 목표는 다름 아닌 그의 고유 능력, 질풍신뢰(疾風迅雷)의 재검토였다.
질풍신뢰란 이름 그대로, 순간적으로 신체 반응 속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이동하며, 동시에 그 이동 궤적을 따라 전격을 흩뿌리는 전격계 특화 기술이었다.
대대로 청뢰가의 직계에게만 전수되어온 이 능력을, 도훈은 남들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완성해냈다는 것이 그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집사가 뒤로 물러서고, 도훈은 두 발을 어깨너비로 벌린 채 호흡을 가라앉혔다. 단전 깊은 곳에서 시작된 영기가 혈맥을 따라 팔다리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감각이, 마치 전류가 몸속을 관통하는 것처럼 저릿하게 스쳤다.
위이이이잉!
도훈이 지면을 박차는 순간, 그의 신형이 흐릿하게 번지며 잔상만을 남긴 채 열 걸음 앞으로 이동했다.
촤아아아악!
뒤이어 그가 스쳐 지나간 자리를 따라 청백색 전류가 마룻바닥을 갈랐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도훈의 얼굴에 처음으로 옅은 안도가 스쳤다.
'이 능력은 게임 설정에서도 최상위였다.'
확실히, 그 게임 속에서도 강도훈이라는 캐릭터가 초반부에 무시할 수 없는 강자로 그려졌던 이유가 이 능력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도훈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도훈은 멈추지 않고 두 번, 세 번 연달아 신형을 흩날렸다.
위이이잉! 촤아아악! 위이이이잉!
마룻바닥 곳곳에 청백색 균열이 그어졌고, 그 균열을 따라 스며든 잔류 전기가 파직거리며 흩어졌다. 집사는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며, 평소와는 사뭇 다른 도훈의 집중력에 내심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걸 무기로 삼으면 된다.'
결말을 그대로 따라갈 이유는 없었다. 재능도, 힘도, 위치도 모두 실재하는 것이었으니, 문제는 오직 그 힘을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느냐에 있었다.
'일단은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한다.'
도훈은 수련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속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첫째, 게임 속 강도훈이 걸었던 몰락의 경로를 최대한 피할 것. 둘째,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이 놓인 상황과 그 세계의 규칙을 하나하나 학습해야 할 것. 셋째, 무엇보다도 자신을 몰락으로 이끄는 결정적 사건이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해내야 한다는 것.
호흡을 정리하며 이마에 밴 땀을 훔치던 도훈의 시선이, 문득 마당 한쪽에 놓인 연무용 목검으로 향했다. 저것을 처음 손에 쥐었던 날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이 마당에서 홀로 보냈던가. 그 노력의 총합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세 번째 지점에서, 도훈의 사고가 멈췄다.
어젯밤 애써 밀어냈던 그 결말의 조각이, 지금 이 순간 다시 스멀스멀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한가의 장녀. 백서린.
그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도훈의 등줄기를 따라 다시 한 번 서늘한 소름이 훑고 지나갔다.
'저 여자가··· 분명, 게임에서.'
기억은 거기서 다시 뭉개졌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 지점만을 지워버린 것처럼, 도훈은 그 이상을 떠올릴 수 없었다.
떠오르는 것은 오직 파편적인 인상뿐이었다. 하얀 설한가의 문양이 새겨진 옷자락,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매, 그리고 그 눈이 도훈을 향해 쏘아보던 순간의 감각. 그 다음은 아무리 애를 써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하나, 명확하게 남아 있는 감각이 있었다.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온몸을 휘감았던, 형언할 수 없는 위기감.
'뭔가··· 조만간 얽히게 되는 건가.'
도훈은 목검을 향해 손을 뻗다가, 그 손을 도중에 멈췄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단순한 긴장이 아니었다. 몸이, 정신보다 먼저 무언가를 경고하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설한가라면··· 영남팔가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그리고 그 장녀가 하필.'
예감은 언제나 나쁜 쪽이 먼저 맞아떨어지는 법이었다.
집사가 다가와 다음 일정을 고했을 때, 도훈은 미처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귓가에는 여전히 그 이름이, 백서린이라는 세 글자가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해야 한다.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바람 한 줄기가 마당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 속에서, 도훈은 문득 자신이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처음으로 진짜 두려움을 느낌을 자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