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정례 회의가 열리는 청뢰가의 대청은 늘 그렇듯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했는데, 여덟 개 좌석 중 절반이 청뢰가 내부의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 그 긴장의 근원이었다.
'숙부 쪽 세력이 여전히 절반을 쥐고 있군.'
도훈은 상석에 앉아 회의 서류를 훑으며 속으로 세력의 구도를 정리해 나갔다. 청뢰가의 실권은 명목상 도훈에게 있었으나, 실질적인 인맥과 재정은 숙부인 강태산의 파벌이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 사실은 게임 속 설정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좌석에 앉은 원로들의 시선이 이따금 도훈에게 닿았다가 슬며시 비껴가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저들의 눈빛에는 경계도 있었고, 은근한 시험도 섞여 있었으며, 무엇보다 아직 어린 후계자에 대한 회의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강태산은 상석에서 두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는데, 그 손짓 하나에도 좌우의 원로들이 미묘하게 반응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기억 속에서, 강태산이라는 이름은 게임 시나리오상 중후반에 이르러 도훈을 실각시키는 핵심 인물로 등장했었다. 그 배신의 방식이 어떠했는지까지는 선명하지 않았으나, 결과만은 뚜렷했다. 도훈이라는 캐릭터는 결국 가문의 실권을 완전히 잃고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그 몰락의 시작점에 항상 숙부의 이름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손을 써야 한다.'
회의가 파했을 때, 원로 몇이 강태산의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모습이 도훈의 시야 끝에 걸렸다. 그들은 도훈을 향해 형식적인 인사를 남기고는 서둘러 대청을 빠져나갔는데, 그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무시가 그의 속을 서늘하게 긁었다.
회의가 끝난 뒤, 도훈은 홀로 서재에 앉아 청뢰가 내부의 인맥도를 다시 그려나갔다.
붓끝으로 이름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그는 각 인물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가늠했다. 일단 숙부 파벌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은 중간 인물들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며, 그중에서도 실무를 담당하는 젊은 무사들 몇몇이 아직 뚜렷한 편을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는 눈여겨보았다. 특히 검술 교두 자리를 맡고 있는 이들 중 두엇은, 숙부의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도 태산 본인에 대한 충성심은 그리 깊지 않아 보였다.
'이들을 먼저 내 쪽으로 끌어들여야겠지.'
그러니 세력을 다지기 위해서는 우선 실질적인 성과를 눈앞에서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명분보다는 실력, 말보다는 결과—그것이 청뢰가라는 무력 중심의 가문에서 가장 확실하게 신뢰를 얻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언변을 늘어놓아도, 검을 맞대는 순간 진짜 실력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세계였다.
'그런데 마침.'
도훈의 뇌리 속에서, 게임에서 얻은 지식 하나가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영남팔가의 세계에는 결투 시스템이라는 것이 존재했으며, 이는 가문 간의 갈등이나 이권 다툼이 있을 때 공식적으로 실력을 겨루어 우위를 결정짓는 절차였다.
결투에서 이긴 쪽은 명분과 함께 상당한 정치적 발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특히 상대 가문의 유력 인재를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킬 수도 있는 강력한 제도였다.
'게임에서도 이 결투 장면이 꽤 중요하게 다뤄졌었지.'
도훈은 눈을 감고 그 기억을 되짚었다. 게임 초반, 강도훈이라는 캐릭터가 특정 결투를 통해 처음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장면이 있었다는 것을, 그는 흐릿하게나마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장면에서 도훈은 관중의 환호 속에서 검을 뽑아 들었고, 화면 가득 화려한 이펙트가 터졌던 기억까지도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가 문제군.'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상대의 이름만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으며, 도훈은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나직이 혀를 찼다.
"제길, 기억이 이렇게 뭉텅뭉텅 지워지면 대체 뭘 대비하란 말인지."
책상 위에 팔을 괴고 관자놀이를 짓누르던 그는, 잠시 후 헛웃음을 흘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도 아예 모르는 것보단 낫겠지. 조각이라도 있으니.'
***
그로부터 며칠간, 도훈은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가문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게임의 규칙들을 정리해 나갔다.
'첫째, 이 세계는 확실히 그 게임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둘째, 그렇다면 이 세계에도 게임 특유의 전형적인 전개 흐름—소위 트로프라는 것이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셋째, 그 트로프를 미리 파악해 둔다면, 최소한 예상치 못한 함정만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서재의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펼쳐두고 기억나는 대로 규칙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결투는 명예를 다투는 공식 절차이며, 패배자는 정치적 발언권을 잃는다. 사이코메트릭이라 불리는 특수한 감각—이름을 통해 그 사람의 운명이나 성향의 일부를 엿보는 능력이 이 세계에 실존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계의 여러 사건들은 마치 정해진 궤도를 따라 흐르듯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
붓끝이 종이 위를 미끄러질 때마다, 그는 게임 속 대화창에서 보았던 문구들, 시스템 알림음, 캐릭터들의 표정 변화까지도 억지로 끄집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기억이란 것은 마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붙잡으려 할수록 더 빠르게 사라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도훈은 종이 위에 쓰인 마지막 항목을 손끝으로 짚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있을까."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재의 촛불이 흔들리며 벽에 걸린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가 다시 움츠렸다.
***
그리고 정확히 열흘째 되는 날, 도훈이 우려했던 흐름이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날 아침은 유난히 하늘이 맑았고, 도훈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검술 수련을 마친 뒤 서재로 향하던 참이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복도를 걷던 그는, 저 멀리서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집사의 모습을 발견했다.
"당주 대행님, 영남팔가 맹주 측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집사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긴장이 섞여 있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서신 전달치고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집사가 조심스레 건네온 서신을 받아 든 도훈은 그 발신인의 인장을 확인하고 미세하게 눈매를 좁혔다.
천주가(天柱家)의 인장, 그리고 그 밑에 적힌 이름은 영남팔가의 맹주 남광호였다. 봉인된 밀랍 위에 새겨진 문양은 정교했으며, 그 정교함 자체가 이 서신이 결코 가벼운 용건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도훈은 서신을 뜯기 전, 잠시 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손끝에서 밀랍이 부서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파삭.
서신의 내용은 간결했다. 최근 영남 지역 내 두 가문—청뢰가와 설한가 사이에 불거진 이권 다툼을 공식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양측의 후계자 격 인물 간의 결투를 정례 회의 자리에서 성사시키겠다는 통지였다.
그리고 그 아래, 상대 인물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다.
설한가(雪寒家) 장녀, 백서린.
도훈의 손끝이 그 이름을 훑는 순간, 며칠 전 밀려왔다가 뭉개졌던 그 기억의 파편이 다시 한번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검을 겨눈 두 인영, 관중석의 함성, 그리고 눈발이 흩날리는 배경 속에서 서로를 노려보던 두 개의 그림자—그 흐릿한 장면이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역시··· 그때 그 예감이 맞았군.'
온몸을 휘감는 서늘한 위기감 속에서도, 도훈은 애써 입가에 냉소를 걸었다.
"흥, 재밌어지겠어."
집사는 그런 도훈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설한가라면··· 검왕가(劒王家)라 불리는 그곳 말씀이십니까. 그 가문의 장녀는 이미 약관도 되기 전에 검왕류의 절기를 완성했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도 파다합니다."
도훈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서신을 다시 접어 손안에 쥐었다. 종이의 결을 따라 손가락이 미끄러질 때마다, 그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 말과는 달리, 서신을 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도훈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불어온 바람이 서재의 창문을 흔들었고, 그 진동에 놓여 있던 붓 하나가 책상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