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결투 성사 소식이 전해진 뒤, 도훈은 곧바로 설한가에 관한 자료를 모으는 데 몰두했다.
가문의 서고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낡은 기록들을 하나하나 펼쳐가며, 청뢰가와 영남팔가 사이의 오랜 알력 관계를 되짚어보는 일부터 시작했다.
설한가는 영남팔가 중에서도 냉기 계열의 영기 수련법으로 이름이 높은 가문이었으며, 그 수련법의 기원이 백두대간 너머에서 넘어온 고대 빙결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정설로 알려져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이권 배분 문제로 청뢰가와 여러 차례 마찰을 겪어왔다는 것이 표면적인 사연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영남 일대 영맥의 통제권을 둘러싼 뿌리 깊은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훈은 자료를 파고들수록 점점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표면적인 이권 다툼이라지만, 사실상 영맥 통제권을 뺏고 뺏기는 싸움이었군.'
그리고 그 가문의 장녀, 백서린—공식 기록상으로는 아직 2급 퇴마사에 불과했으며, 가문 내부에서도 '불출중'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실전 기록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고, 훈련 성과 평가서에는 무난한 수준이라는 짧은 문구만이 반복해서 적혀 있을 뿐이었으며, 이렇다 할 특기 사항이나 주목할 만한 성취도 눈에 띄지 않았다.
'불출중이라.'
도훈은 자료를 훑으며 코웃음을 흘렸다.
"부모 평가가 저 정도면, 실제로는 볼 것도 없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료를 넘기던 손길이 문득 멈췄다.
그러나 그 순간, 뇌리 한구석에서 다시금 희미한 위화감이 스쳤다.
게임 속에서, 백서린이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초반부에 등장할 때부터 유독 존재감이 남달랐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분명 그 캐릭터는 초반부 등장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유저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이름이었고, 뭔가 독특한 각성 조건이나 히든 스토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조각들이 흩어진 퍼즐처럼 머릿속에서 맞춰지지 않고 있었다.
'분명··· 뭔가 특별한 설정이 있었는데.'
기억을 더 깊이 파고들려 할수록 오히려 두통이 심해질 뿐이었다.
관자놀이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그 통증에 도훈은 결국 인상을 찌푸리며 손끝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하지만 역시나 기억은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고, 도훈은 결국 초조함을 억누르며 자료를 덮었다.
'어차피 직접 보면 알겠지.'
***
결투가 성사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보름이었으며, 그 기간 동안 도훈은 새벽마다 수련장에서 몸을 다졌다.
위이이잉! 촤아아아악! 위이이이잉!
연속된 질풍신뢰의 발동음이 새벽 공기를 갈랐고, 그 소리가 반복될수록 도훈의 움직임은 점점 더 정교해져 갔다.
첫날에는 단순히 속도만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으나, 사흘이 지나자 방향 전환 시의 관절 부담을 줄이는 방식으로 세밀하게 조정해나갔고, 열흘째에는 잔상을 이용한 허초까지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땀에 젖은 도복이 새벽 냉기에 서늘하게 식어갈 무렵이면, 도훈은 잠시 숨을 몰아쉬며 수련장 바닥에 새겨진 자신의 발자국들을 내려다보곤 했다.
'상대가 누구든, 이 결투에서 지는 순간 청뢰가 내 입지는 끝장이다.'
숙부 강태산 쪽에서도 이 결투 소식을 접했는지, 은근한 견제가 이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왔다.
가문 내 원로들 사이에서 슬며시 흘러나오는 뒷말들이나, 하급 무사들 사이에서 도는 근거 없는 소문들이 그 증거였으며, 만약 이 결투에서 패배한다면, 그 즉시 명분을 잃은 그를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될 것이 뻔했다.
'그러니 반드시 이겨야 한다.'
동시에 도훈은 결투에서 이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결투의 승리 조건에는 단순한 명분 획득뿐 아니라, 패배한 가문의 인재를 승리한 쪽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킬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만약 백서린이 정말로 게임 속 설정만큼 뛰어난 인물이라면, 그를 확보하는 것이 곧 자신의 세력 기반을 강화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될 터였다.
'재능 있는 카드는 최대한 많이 손에 쥐어둬야지.'
수련이 끝난 뒤에도 도훈은 매일 밤 다시 자료를 펼쳤다.
설한가의 가풍이나 백서린의 평소 행동 양식, 심지어 그녀가 즐겨 사용한다고 알려진 몇 가지 기초 술법의 발동 패턴까지도 놓치지 않고 훑어보았으니, 이는 결투 당일 어떤 변수가 튀어나오더라도 최대한 대응할 수 있는 밑그림을 그려두려는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상대를 모르고 이기는 건, 요행일 뿐이다.'
***
결투가 성사되는 날, 결투장으로 지정된 부산 외곽의 옛 영기청 훈련 부지에는 이른 아침부터 영남팔가의 주요 인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낡은 콘크리트 담장을 따라 세워진 관람석에는 각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고, 훈련 부지 특유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사람들의 나직한 대화 소리가 웅웅거리며 뒤섞였다.
남광호가 맹주 자격으로 중앙 심판석에 앉아 좌우를 살폈고, 그 옆으로는 백서린의 아버지, 설한가 당주 백중현이 굳은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중현의 손끝은 무의식적으로 심판석의 나무 손잡이를 몇 번이고 쓸어내리고 있었으니, 그 반복적인 손짓 하나만으로도 그가 느끼고 있는 불안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딸아이가 아직 어립니다, 맹주님. 이 결투가 정말 필요한 것입니까."
낮게 흘러나온 백중현의 목소리에는 불안이 짙게 배어 있었으나, 남광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서류를 넘길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서류를 넘기는 손길이 지나치게 태연했던 탓인지, 백중현은 몇 번이고 다시 입을 열려다가 결국 마른침만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저 반응, 확실히 백중현은 딸의 진짜 재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군.'
결투장 반대편에서 그 대화를 지켜보던 도훈은 속으로 그 정보를 새겨넣었다.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얼핏 애틋해 보였으나, 그 이면에는 딸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는 무능함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것 역시 활용할 수 있는 약점이었다.
'딸의 실력조차 제대로 모르는 아버지라니, 저 가문 내부 정보력은 생각보다 허술한 모양이군.'
그리고 잠시 후, 결투장 입구 쪽에서 낮고 담담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또각, 또각.
교복 차림에 가까운 단정한 복장을 갖춘 소녀 하나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앳된 얼굴에는 아직 십 대 특유의 앳됨이 남아 있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나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침착하고 서늘했다.
걸음걸이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었으니, 마치 이 결투장이 그녀에게는 지극히 익숙한 장소인 듯한 태연함마저 느껴졌다.
백서린.
도훈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익숙한 위화감을 다시 느꼈다.
'저 눈빛··· 확실히 불출중한 애 눈빛이 아니야.'
주변 관람석에서도 술렁임이 일었다.
설한가 측 인사들 몇몇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고, 그 속삭임 속에서 유독 서린을 향한 시선들이 묘하게 조심스럽다는 것을, 도훈은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서린은 결투장 중앙에 서서 도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청뢰가의 강도훈, 이지요."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는 뚜렷한 호승심이 배어 있었다.
도훈은 여유롭게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소문으로는 불출중하다고 들었는데, 직접 보니 소문이랑은 좀 다르군."
비아냥이 섞인 그 말에도 서린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소문이야 만든 사람 마음이지요. 실력은 지금부터 보여드리면 되는 일이고."
말을 마친 서린은 짧게 숨을 들이켜며 자세를 잡았다.
발끝을 살짝 뒤로 물리고 어깨를 낮추는 그 동작 하나만으로도, 그녀가 결코 초심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저건··· 기초 자세부터가 다르다.'
그 대답과 함께, 서린이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손끝에서 은은한 금빛 기운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낮게 울리는 그 기운의 파동을 감지한 순간, 도훈의 뇌리 속에서 뭔가가 뚜렷하게 경고음을 울렸다.
설한가 특유의 냉기 계열 술법이라면 응당 푸르스름하거나 새하얀 빛을 뿜어내야 마땅했건만, 지금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그와는 전혀 결이 다른, 따스하면서도 묘하게 이질적인 금빛이었다.
'저건··· 단순한 냉기 계열 능력이 아니다.'
관람석에서도 술렁임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설한가 측 인사들의 표정에서마저 당혹감이 스치는 것을 보아, 이 금빛 기운은 그들에게도 익숙한 광경이 아니라는 것을, 도훈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설한가 사람들조차 모르는 힘이라고?'
결투 시작을 알리는 남광호의 목소리가 결투장 위로 울려 퍼지기 직전, 도훈은 자신이 지금껏 너무 쉽게 이 결투를 판단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직감하며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