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9살, 왼팔부터 다시 던진다

5화

두 달 후, 6월 셋째 주 일요일.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창밖은 아직 푸르스름했고, 시계는 6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초록동 유소년 야구단 첫 공식 시합이 열리는 날이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손가락을 접어가며 오늘 던질 공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5이닝, 한 이닝에 15개 정도면 75개.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51살까지 살면서 만졌던 그 어떤 계산기보다 이 숫자 계산이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을 두 그릇이나 먹고 집을 나섰다. 가방 안에는 새로 산 글러브와, 감독님이 나눠준 유니폼이 들어 있었다. 등번호 11번이 새겨진 하얀 셔츠를 처음 입어보던 순간, 손끝이 조금 떨렸다. 상대는 옆 동네 대성 유소년 야구단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구장에 들어서니, 흙바닥에 그려진 라인이 아침 햇살에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관중석에는 학부모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고, 누군가는 캠코더를 세팅하고 있었다. 나는 유니폼을 입고 벤치에 앉아 몸을 풀었다. 어깨를 크게 세 번 돌리고, 손목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 몸의 근육들이 아직 완전히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매번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감독은 내 컨트롤을 보고 선발로 낙점했다. "도윤아, 오늘 포수는 정민재야. 처음이니까 사인 잘 맞춰봐." 감독이 말했다. 나는 그 이름을 들으며 새로운 얼굴을 살펴보았다. 민재는 나보다 세 살 위, 6학년이었다. 체구가 단단했고,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포수 장비를 착용하는 손놀림이 벌써 몸에 익은 듯했다. "잘 부탁해." 민재가 짧게 말했다. "어... 잘 부탁해." 나는 대답했다. 민재는 나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마스크를 썼다. '저 표정, 나를 별로 신뢰 안 하는 눈치인데.' 나는 마운드로 걸어가며 발밑의 흙을 두어 번 다졌다. 1회 초, 대성팀 선두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나는 그 아이의 스윙을 보고 흠칫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라던데, 스윙 폼이 이미 고등부 수준이었다. 배트를 짚고 서 있는 자세부터, 무게 중심이 완전히 잡혀 있었다. '저건... 그냥 애가 아니야.' 민재가 사인을 냈다. 바깥쪽 직구. 나는 고개를 저으며 몸쪽 낮은 공을 요구했다. 민재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다시 사인을 냈다. 나는 힘을 60퍼센트만 넣어 몸쪽 낮게 던졌다. 타자의 배트가 헛돌았다. "스트라이크!" 심판이 외쳤다. "괜찮은데." 민재가 마스크 안에서 중얼거렸다. 두 번째 공, 민재가 바깥쪽 변화구를 요구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변화구는 아직 안 돼. 이 팔에 무리 가는 그립이야.' 이 몸의 뼈와 인대가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았다는 걸, 나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아홉 살짜리 팔에 슬라이더 그립을 씌우는 순간, 훗날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도 알고 있었다. 나는 직구를 다시 요구했다. 민재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사인을 바꿨다. 공은 존 안쪽으로 정확히 들어갔지만, 타자가 그걸 받아쳐 좌중간을 뚫는 2루타를 만들었다. "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관중석에서 대성팀 학부모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민재가 마스크를 벗고 마운드로 뛰어왔다. "방금 그거, 변화구였으면 삼진이었어." 민재가 낮게 쏘아붙였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 나는 겨우 대답했다. 민재는 대답 없이 다시 마스크를 쓰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닝은 그렇게 흘러갔고, 대성팀은 그 이닝에서 한 점을 냈다. 이닝이 끝난 뒤 더그아웃에서 민재가 나에게 다가왔다. "너 왜 자꾸 사인 무시해? 변화구 던질 줄 알면서 왜 안 던져?" 민재가 물었다. "팔에... 부담이 가서."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부담이 가긴 뭐가 가, 우리 나이엔 다 그렇게 던져!" 민재가 목소리를 높였다. 주변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우리 쪽을 힐끔거렸다. 나는 그 말에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이 아이에게 51년 인생의 실수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네가 나중에 팔 수술 몇 번을 하게 될지, 나는 알아.' '하지만 그걸 지금 어떻게 말해.' "그냥... 지금은 직구가 더 나을 것 같아서." 나는 겨우 말했다. 민재는 답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벤치에 앉아 물병을 들고 물을 한 모금 삼켰다. 이온음료 병 겉면에 붙은 상표를 멍하니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2회, 3회가 지나면서도 민재와 나 사이의 사인 다툼은 계속됐다. 민재가 변화구를 요구하면 나는 고개를 젓고, 나는 직구나 낮은 공만 던졌다. 그럴 때마다 민재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갔다. 4회 말, 우리 팀이 두 점을 추가하며 점수는 3대 1이 되었다. 5회 초, 대성팀 마지막 공격에서 오늘의 그 선두타자가 다시 타석에 섰다. 나는 이번엔 몸쪽 깊숙이 직구를 던졌다. 타자의 배트가 부러질 듯 휘청였지만, 공은 파울이 되었다. 두 번째 공, 나는 바깥쪽 낮게 던졌다. 타자가 헛스윙했다. "스트라이크아웃!" 심판의 외침이 구장에 울렸다. 민재가 그제야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경기는 3대 2, 초록동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민재는 시합이 끝난 후에도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라인업에서 인사를 나눌 때도, 민재는 다른 선수들과만 손을 마주쳤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괜히 손을 만지작거렸다. 감독이 나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잘 던졌다. 근데 민재랑 좀 안 맞는 것 같던데." 감독이 말했다. "제가... 사인을 자꾸 거절해서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유가 있는 거야?" 감독이 물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팔을 아직... 다 못 믿어서요." 감독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일단은 이겼으니 됐다. 다음 경기도 있으니까 민재랑 얘기 좀 해봐." 감독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장비를 정리하며 글러브를 가방에 넣는데, 손끝에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땀에 젖은 유니폼을 벗으며, 오늘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 현우가 옆자리에 앉았다. 현우는 오늘 3번 타자로 나가 안타 하나를 쳤다며 신나 있었다. "오늘 잘했어! 근데 민재 형이 좀 화난 것 같더라." 현우가 말했다. "응... 좀 그런 것 같아." 나는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버스 창문에 이마를 살짝 대니 유리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창밖으로 대성팀 벤치가 스쳐 지나갔다. 그 벤치 한쪽에, 오늘 2루타를 친 타자가 코치와 함께 웃고 있었다. 그 아이의 유니폼 등에는 '한상우'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눈에 담아두었다. '저 아이, 다음에 또 만날 것 같은데.' '저 스윙, 진짜 5학년 것 같지가 않았어.' 그리고 민재의 뒷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민재가 오늘 마지막까지 나를 쳐다보지 않고 짐을 챙기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첫 시합에서 얻은 승리보다, 포수와 벌어진 균열이 더 크게 다가왔다. 나는 그 균열이 다음 경기에서 어떤 문제로 터질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버스는 초록동 정류장을 향해 계속 달렸고, 나는 창밖의 어스름을 바라보며 오늘 던진 75개의 공을 하나씩 되짚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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