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봉인된 흑룡과 황자의 재림

3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다시 귀를 기울이자 그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놀랄 것 없다. 오래전부터 있었느니라.'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몸속에서 나는 목소리가 이렇게 명확하게 잡힌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묵직한 이물감, 숨쉬기를 방해하는 무게일 뿐이었다. 가끔 열이 오르내리는 것도, 밤중에 이유 없이 심장이 미친 듯 뛰는 것도 다 그 이물감 탓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그게 말을 한다. "누구냐." 소리 내어 물었더니 방 안이 조용해졌다. 대답이 없었다. 잠깐 미친놈처럼 혼자 떠들다 만 것 같아 부끄러웠다. 방 안에는 나 혼자였고, 창밖으로는 왕부의 야경만 무심하게 걸려 있었다. 누가 봤으면 정신 나간 도련님이라고 수군거렸을 광경이었다. 그런데 다시, 이번엔 더 뚜렷하게. '네 몸속에 잠들어 있는 자다. 정확히 말하면, 잠들어 있었던 자.' 그 목소리는 젊지도 늙지도 않았다. 예스러운 어투로 하대하는 말투였는데, 이상하게도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마수냐."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그리하거라. 나는 구환이라 불렸다. 아홉 개의 머리를 지녔던 흑룡이었지.' 흑룡. 그것도 아홉 머리 흑룡이라니. 대현제국에서 마수를 몸에 지닌 사람이 흔하다지만, 흑룡급의 존재를 봉인당한 인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마수를 품은 자들은 대개 힘을 빌려 가문의 위세를 키우는데, 나는 그 흔한 마수 하나 못 부려서 병약한 몸뚱이로 왕부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 안에 있는 게 흑룡이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왜 내 안에 있는 거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나는 백 년 전, 이 몸의 조상에게 봉인당했느니라. 그 뒤로 잠들어 있었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다른 기운이 뒤섞이더구나. 낯익은 기운이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낯익은 기운. 전생의 나를 알고 있다는 뜻인가.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이 존재가 전생의 내가 겪은 일을, 내가 왜 죽었는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뭘 알고 있는 거냐." '네가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그 안에 담긴 원한만은 짙게 느껴지는구나. 재밌지 않느냐? 원한을 품은 자와 원한을 품은 짐승이 한 몸에 갇혀 있다는 것이.' 말투는 태연했지만, 그 속에 숨은 뜻은 결코 태연하지 않았다. 나는 문득 두려워졌다. 이 존재가 협력자일지, 적일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백 년을 갇혀 있었다는 것도, 원한이라는 단어를 저렇게 가볍게 발음하는 것도 다 마음에 걸렸다. "협력할 생각은 있는 거냐." '그건 두고 볼 일이지. 다만 알아두거라. 나는 원래 이 왕가의 씨를 말리기 위해 이 몸에 봉인된 존재다. 네 조상이 나를 가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 나라의 절반은 내 발톱 아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숨이 막혔다. 씨를 말리기 위한 봉인이라니. 그 말은, 이 존재가 애초에 내 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오히려 나를, 정확히는 내 몸에 흐르는 왕가의 피를 증오할 이유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 놈이 내 안에서 원한 운운하며 재밌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건 협력자가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사는 셈이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지금은 나도 힘이 다했으니까. 이 작은 몸 안에서 잠이나 청하는 게 내 신세이니.' 그렇게 말하고는 목소리가 멀어졌다. 대화가 끝난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어둠 속에서 눈만 뜨고 있었다. 천장의 나뭇결이 하나둘 눈에 들어올 때까지, 잠은 오지 않았다. --- 다음 날, 남궁혁이 언급한 연회 준비 때문에 왕부 전체가 부산했다. 곳곳에서 하인들이 붉은 비단을 들고 뛰어다녔고, 부엌에서는 음식 냄새가 아침부터 진동했다. 그 와중에 유천의 할아버지 쪽에서 사람이 다녀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확히는 경운공자 탁현이라는 자가 설죽원을 다녀갔다고, 시비 하나가 귀띔했다. "경운공자가 왜 여길 왔대?" "그거야 모르죠. 그런데 도련님 얘기를 하셨다던데요." "내 얘기?" "적혈대 통령 선발전에 도련님을 넣으라고 하셨다나 봐요. 병약하신 몸으로 어떻게 그런 걸……" 적혈대 통령 선발전.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이름만 들어도 위험한 자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병약한 나를 그런 자리에 넣겠다는 건,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죽으라는 소리였다. 통령이라는 말부터가 군의 지휘관을 뜻할 텐데, 병약한 몸으로 그런 자리에 들어가라는 건 대놓고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할아버지가 그걸 허락했대?"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허락 안 하면 다행이고, 허락하면 나는 그날로 저승 구경이겠네." 시비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도 딱히 웃자고 한 말은 아니었다. 허락하든 안 하든, 이 왕부 안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머니와 누나 말고는 전부 나를 골칫거리로만 보는 눈치였다. 정보는 늘 늦게 들어왔고, 알아야 할 것들은 늘 뒤늦게 알려졌다. 경운공자가 뭘 노리는지도, 할아버지가 어떤 셈을 하고 있는지도 나는 남들보다 항상 한 걸음 늦게 알았다. 그날 오후, 나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 후원으로 나갔다. 명상이라기엔 초라했지만, 적어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연못가 돌 위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물속에서 헤엄치는 잉어 몇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팔자 좋은 것들이었다. 저것들은 적혈대 통령 선발전 같은 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가슴 속의 구환에게 물어볼 게 많았다. "구환." 조용했다. "들려?" 한참 후에야 대답이 왔다. '네 부름이 성가시구나.' "적혈대 통령 선발전이 뭔지 알아?" '……' 침묵이 길었다. 모르는 건지,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백 년을 잠들어 있었다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다시 물었다. "몰라도 상관없어. 하나만 물을게. 협력할 마음이 있다면, 지금 이 몸을 좀 더 낫게 해줄 수 있어?" '그럴 리가. 나는 지금 봉인당한 몸이다. 내 힘을 쓰려면 조건이 필요하지.' "조건?" '네가 죽음의 문턱에 서야 한다.' 그 대답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건 협력이 아니라 함정이었다. 죽음의 문턱이라니. 사람 좋게 말하는 것치고는 요구가 지독했다. 나 죽으라고 등 떠미는 소리를 저렇게 태연하게 하는 걸 보면, 이놈이 나를 얼마나 가볍게 보는지 짐작이 갔다. "그거 참 훌륭한 조건이네. 내가 죽어야 네가 힘을 쓴다는 거잖아. 그럼 나는 뭐가 좋은데." '살아나면 좋은 것이지. 안 그러하냐?' "살아난다는 보장은 있고?" '……' "또 대답 안 하네. 이러니 협력자로 믿음이 안 가지." '왜, 무섭냐?' 비웃는 듯한 어조였다. 나는 코웃음을 치려다가 그럴 여유조차 없다는 걸 곧 깨달았다. 그 순간, 가슴 안쪽에서 뭔가 강하게 요동쳤다. 처음 느껴보는 강도의 진동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접었다. 이건 뭐지. 대화가 끝난 게 아니었나.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고, 눈앞이 노랗게 번지는가 싶더니 곧 흐물흐물 뭉개졌다. 연못의 잉어들이 보이지 않았다. 후원의 나무들도, 하늘도 다 뭉개져 하나의 색으로 뒤섞였다. 뭔가 잘못됐다. 몸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려는 것처럼, 심장 대신 다른 것이 뛰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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