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후원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였다. 코끝에 닿는 흙냄새가 유독 비릿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끝 하나 움직이는 데도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느낌이었다. 불길 속에 던져진 것처럼 뜨거웠다. 정확히는, 살갗 밑에서 뭔가가 들끓고 있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흔들렸다. 시야 한복판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어서고 있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진짜 죽는구나.
죽기 직전엔 주마등이 스친다던데, 나한테 스치는 건 주마등이 아니라 그림자였다. 이건 사기 아닌가.
검은 안개 같기도 하고 짙은 먹구름 같기도 한 형체가 조금씩 뚜렷해졌다. 형태가 잡히면서, 그 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용이었다.
머리 하나만으로도 사람 몸통보다 컸다. 그게 아홉 개였다. 계산이 안 됐다. 인간의 뇌는 저런 걸 인식하는 용도로 설계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눈은 자꾸 그쪽으로 갔다.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고 그냥 보고만 있었다.
각각의 머리마다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은 하나도 같지 않았다. 어떤 눈은 슬픔을 담고 있었고, 어떤 눈은 광기로 번뜩였고, 어떤 눈은 아무런 감정 없이 순수한 살의만 흘리고 있었다. 아홉 개의 인격이 한 몸에 들어앉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중 어느 하나도 나한테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만은 확실했다.
'드디어.'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이번엔 내 안이 아니라 밖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도 들리고 머리 위에서도 들리고 발밑에서도 들렸다. 마치 후원 전체가 그 목소리를 흉내내는 것 같았다.
'드디어 각성할 때가 왔구나.'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다. 진심으로, 살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서 도망치려 했다.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이미 통제를 벗어난 것 같았다. 발가락 하나 까딱하려 해도 신호가 어디선가 끊기는 느낌이었다. 이건 미친 상황이었다. 이런 데서, 이런 후원 흙바닥에서, 이렇게 개죽음 당할 순 없었다.
전생에서 배신당해 죽고, 이번 생에서 또 이렇게 어이없게 죽으면 그거야말로 억울해서 눈을 못 감을 것 같았다. 죽어서도 눈 뜨고 다니는 원귀가 될 것 같았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을 보면 원귀보다 더한 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홉 개의 머리 중 하나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목이 긴 만큼 그 움직임이 느렸는데, 느린데도 무서웠다. 느려서 더 무서운 종류의 움직임이었다. 도망칠 시간을 일부러 주는 것처럼, 그런데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뜨거운 숨결이 얼굴을 스쳤다.
그 숨결 속에서 짙은 유혈 냄새가 느껴졌다. 피 냄새치고는 오래된, 삭은 냄새였다. 백 년을 갇혀 있던 짐승의 냄새였다. 백 년이면 웬만한 피 냄새는 다 날아가야 정상인데, 이 정도로 진하게 남아 있다는 게 오히려 더 소름 돋는 부분이었다.
'너다.'
그 목소리가 나를 향해 명확하게 말했다.
'네가 나를 풀어줄 자다.'
"뭐, 뭐라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바싹 말라서 소리가 갈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물음을 던지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도망도 못 치고, 저항도 못 하고, 겨우 말이나 붙잡고 있는 게 지금 내가 가진 전부였다.
'네 안에 있는 원한의 냄새가 짙어졌다. 그 냄새가 나를 깨웠지. 백 년의 봉인 끝에, 나는 마침내 눈을 뜬 것이다.'
원한의 냄새라니. 내가 뭘 그렇게 원한을 쌓았다고. 아니, 생각해보니 쌓을 만도 했다. 전생에 배신당해 죽었고, 이번 생에 눈뜨자마자 이 몸뚱이 주인의 지긋지긋한 사정까지 껴안게 됐으니까. 원한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아홉 개의 머리 중 다른 하나가 이번엔 나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지목한다. 유겸. 네가 나의 그릇이다.'
그릇이라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도구로 쓰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나를 삼키겠다는 뜻인가. 그릇이라는 표현이 참 애매했다. 그릇은 담기는 용도로 쓰이는 물건이지, 그 안에 든 게 사라져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물건이기도 했다. 뭐가 되든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싫다면?"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떨리는 것치고는 꽤 또렷하게 나왔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아홉 개의 눈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그 시선을 한꺼번에 받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다. 마치 아홉 개의 도끼가 동시에 겨눠지는 것 같았다. 그중 가운데 있던 머리가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마저 낮고 긴 데가 있어서, 그게 사방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겹쳐 더 크게 들렸다.
'싫다는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네 몸은 내 것이 되기 위해 백 년을 준비해왔으니까.'
그 말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건 계약이 아니라 통보였다. 내 의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 전생에서도 이런 취급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황족이라는 이름 아래 도구로 쓰였고, 지금은 이 몸 자체가 도구로 쓰이는 상황이었다. 이름만 바뀌었지 처지는 똑같았다. 뭔가 지긋지긋했다.
"통보로 끝낼 거면, 그냥 지금 죽여."
허세였다. 정확히는 허세라는 걸 나조차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 물러서면 정말로 끝장이라는 걸, 몸이 먼저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고개를 숙이면 이 흑룡은 나를 그냥 부속품 취급할 게 뻔했다. 협상의 자리조차 만들지 못할 게 뻔했다. 죽을 각오라도 보여야 흥정할 자리가 생기는 법이었다.
아홉 개의 머리가 일순 조용해졌다.
서로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아홉 개의 머리가 서로 곁눈질하는 모습이라니, 이건 또 새로운 그림이었다. 그중 한 머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재밌는 놈이구나. 죽음 앞에서도 흥정을 하려 드는가.'
"흥정할 게 있으면 해야지. 안 그러면 죽는 것밖에 남는 게 없잖아."
말을 뱉으면서도 스스로 놀랐다. 이 와중에도 흥정 논리가 튀어나오는 걸 보면, 나는 이 몸에 들어오기 전부터 어지간히 세속적인 인간이었던 게 분명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손익을 따지는 버릇은 어디서도 안 고쳐지는 모양이었다.
'좋다. 그럼 조건을 들려주지. 네 목숨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는 않겠다. 대신, 너는 내 뜻에 따라야 한다. 구전금결을 익히고, 내 힘을 되찾을 방법을 찾는다. 그 대신 나는 네 몸을 지켜주고, 필요할 때 힘을 빌려주겠다.'
구전금결.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나중에 물어봐야 할 목록에 하나 더 추가됐다.
'단, 대가가 있다. 네 목숨의 끈은 이제 내 손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언제든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끈을 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종속.
그게 이 계약의 본질이었다. 협력이 아니라 종속. 이 흑룡은 나를 도구로 쓰되, 언제든 목줄을 조일 수 있는 위치에 있겠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계약서를 내미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목줄을 채우는 거였다. 참 정직한 사기였다.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가 있는지 생각해봤다. 없었다. 완전히 없었다. 죽거나, 목줄을 차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런 선택지를 흥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흥정은 흥정이었다.
"조건 하나 더."
'뭐냐.'
목소리에 짜증이 살짝 섞였다. 아홉 개의 눈 중 몇몇이 귀찮다는 듯 나를 내려다봤다.
"내 가족들 건드리지 마. 그리고 내가 죽으면 너도 같이 죽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함부로 목줄 조이지도 말고."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웃겼다.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백 년 묵은 흑룡한테 이런 소소한 조건이나 걸고 있다니. 근데 안 걸면 후회할 것 같았다. 이런 놈들은 틈만 보이면 파고드는 법이니까.
아홉 개의 머리 중 몇몇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가 후원 전체를 울리는 것 같았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흙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웃는 것뿐인데도 이 정도 위력이라니, 진짜로 화가 나면 어떤 꼴이 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제법이구나. 좋다, 받아주지.'
그 순간, 거대한 흑룡의 형체가 서서히 흐려지며 다시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그 안개가 다시 내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뜨거운 통증이 온몸을 휩쓸었다. 뼈 마디마디가 부서지는 듯한 감각과, 혈관 속으로 뜨거운 쇳물이 흘러드는 듯한 감각이 동시에 몰려왔다. 눈앞이 다시 새하얗게 변했고, 코끝에서 뜨끈한 게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코피였다. 이 와중에도 코피 걱정을 하는 내가 어이가 없었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의식이 완전히 끊기기 직전,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이거, 계약서에 도장 찍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