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방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다 어깨에 익숙지 않은 근육통이 느껴져 놀랐다. 병약한 이 몸에 근육통이라니, 그런 게 생길 리가 없었다. 팔을 들어보니 살짝 떨리긴 했지만, 예전 같으면 팔을 드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건 명백한 발전이었다.
'일어났느냐.'
구환의 목소리였다. 이번엔 명확했고, 그리고 이상하게도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협박조로 으르렁대던 예전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너 진짜 내 안에 들어온 거야?"
'그렇다. 계약은 끝났다. 이제 나와 너는 하나의 목숨을 나눠 쓴다.'
하나의 목숨을 나눠 쓴다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나는 그제야 실감하기 시작했다. 몸을 살펴보니 예전보다 확실히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병약하긴 했지만, 숨쉬기가 이렇게 편했던 적은 없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조차 예전엔 두통을 유발했는데, 지금은 그냥 밝다는 느낌뿐이었다.
"몸이 좀 이상해. 뭘 어떻게 한 거야?"
'네 몸 곳곳에 스며든 탁기를 조금 걷어냈을 뿐이다. 원래 인간의 몸이란 그렇게 뒤틀려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근육통이 생긴 거야?"
'네 몸이 오랫동안 쓰지 않던 것들을 다시 쓰려 하니 당연한 일이다. 앓는 소리 낼 것 없다.'
앓는 소리 낼 것 없다는 말이 얄궂었다. 그동안 앓는 소리 한 번 제대로 못 내고 죽어가던 몸이었는데, 이제 와서 생색을 내는 건가 싶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이제 구전금결을 익히자고 했지."
'그래. 하지만 조급해할 것 없다. 그 무공은 인간이 하루 이틀에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니. 무엇보다 네 몸이 아직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됐다.'
"준비가 안 됐다는 게, 얼마나 안 됐다는 거야?"
'단전이 완전히 파괴되기 직전이다. 지금 억지로 기운을 돌리면, 그대로 폭발할 것이다.'
"폭발한다는 게 무슨 뜻인데. 그냥 죽는다는 거야, 아니면 뭐 이상한 방식으로 죽는다는 거야?"
'몸 안에서 기운이 뒤틀려 육신이 산산조각 난다는 뜻이다. 알고 싶었나?'
몰라도 됐을 정보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못 들은 척할 수도 없었다.
좋은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방향은 생겼다. 살아야 할 이유도, 강해져야 할 이유도 뚜렷했다. 전생의 원수도, 지금의 위협도, 다 이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야?"
'기다리는 것. 그리고 네 그릇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 성급하게 굴다가 부서지면, 나 역시 함께 사라진다는 걸 잊지 마라.'
그 말은 묘하게 위로가 됐다. 적어도 이 흑룡도 나와 함께 죽는 걸 원치는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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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열리기 전날 밤,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앞에 앉았다. 등불 아래로 비치는 얼굴엔 며칠 새 부쩍 는 그늘이 있었다.
"겸아, 안색이 좋아 보이는구나."
"조금 나은 것 같아요."
"다행이다."
어머니는 그 말을 하며 안심하는 얼굴을 했지만, 그 안심이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았다. 연회에서 남궁혁이 어떤 짓을 벌일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손등을 몇 번 쓸어내렸다. 예전보다 손이 덜 차다고 느꼈는지, 잠시 눈이 커졌다가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일 연회에는 몇 명이나 온대요?"
"남해왕부 쪽 인사들도 여럿 온다고 들었다. 그리고 남천국에서도 사람이 왔다더구나."
"남천국이요?"
"그래. 요즘 남천국과 왕부 사이에 이런저런 일이 있는 모양이더라.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른다."
어머니의 말투에서 뭔가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더 캐물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도 왕부 안에서 들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을 테니까.
"어머니, 내일 연회에서 하린 누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도 나갈 거예요."
"안 된다. 넌 몸이……"
"괜찮아요. 이제는 조금."
어머니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어린 눈빛이었지만, 더 이상 말리지는 않았다. 대신 방을 나서기 전, 문가에 서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심해라. 남궁혁 그 아이는, 술만 들어가면 사람이 변한다."
그 말을 어머니가 직접 하는 걸 보니, 이미 예전부터 익히 겪어온 일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구환의 힘을 조금씩 시험해봤다. 단전 근처로 기운을 조금 흘려보내자, 몸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순환하는 게 느껴졌다. 익숙지 않은 감각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얼어 있던 우물에 처음으로 물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아직 그 그릇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알겠어."
"조금만 더 해보면 안 돼?"
'안 된다고 했다. 네 몸이 지금 얼마나 위태로운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대답은 했지만, 몸이 계속 그 새로운 감각을 찾고 있었다. 오랫동안 갇혀 지냈던 몸이 이제야 뭔가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나쁜 저림이 아니라, 뭔가를 갈망하는 저림이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순순히 기운을 거둬들였다. 죽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적어도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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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왕부에는 낯선 사자가 도착했다. 남천국에서 온 서신을 든 관리였다. 관복이 화려한 걸로 보아 꽤 높은 신분인 듯했다. 왕부 관리들이 서신을 받아 읽는 동안, 나는 시비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를 주워들었다.
"남천국 왕이 백서하 님과 혼약을 맺었다던데."
"그게 정말이에요? 백서하 님이면, 그……"
"맞아요. 십 년 후에 정식으로 성혼한다던가."
"어머, 십 년이나 기다린대요? 그럼 지금 성혼을 안 하는 이유가 뭐래요?"
"글쎠, 그건 나도 잘 모르지. 뭔가 사정이 있다던데."
백서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전생의 스승이었던 여자. 오랫동안 나를 외면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자신의 몸을 던져 나를 살렸던 사람. 그녀가 이 시대에도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남천국 왕 선우현과 혼약을 맺었다는 소식은 더 놀라웠다.
선우현. 전생에서 내가 탈출을 시도할 때 방관만 했던 자. 그 이름을 이렇게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그가 조금이라도 손을 내밀어줬다면, 내 삶이 그렇게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는지 모른다.
'아는 이름이냐.'
구환이 물었다. 그 목소리에 처음으로 관심 같은 게 실려 있었다.
"몰라도 돼."
'숨길 것 없다. 어차피 나는 네 안에 있으니, 언젠가는 다 알게 될 것이다.'
"그건 좀 사양하고 싶은데."
'사양이 통할 것 같으냐.'
그 말이 오싹하게 들렸다. 이 흑룡은 언젠가 내 모든 기억을 들여다볼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전생의 원한, 백서하에 대한 복잡한 감정, 설유란에 대한 살의까지 전부. 아무리 생각해도 사생활 침해가 이보다 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나는 아직 네 기억을 억지로 파헤칠 생각이 없으니.'
"아직이라는 말이 제일 무섭게 들리는데."
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더 신경 쓰였다.
그날 저녁, 연회가 시작됐다. 왕부의 대청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등불이 층층이 걸려 대청 전체가 낮처럼 밝았다. 남궁혁은 벌써부터 술을 마시며 시종들을 부리고 있었고, 벌써 두 명이나 그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누나는 옆에서 억지 웃음을 짓고 있었고, 나는 벽 쪽에 붙어 그 광경을 지켜봤다.
남해왕부 쪽 인사들도 여럿 참석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왕부 관리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다른 관리들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드는 것과 달리, 그는 조용히 한 자리에 서서 대청 전체를 훑어보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찾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가 슬쩍 나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익숙했다. 사람 좋은 웃음이라기보다는, 뭔가를 다 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저 사람 누구야?"
지나가는 시비에게 물었더니,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분은 여제 폐하께서 보내신 사자라고 들었어요."
"여제가 왜 사자를 이런 자리에 보내?"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도련님. 그냥 인사차 오셨다고만 하시던데요."
인사차 왔다는 말을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여제. 설유란의 사람이 이 자리에 왔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 그 여자의 시선이 이 왕부까지 뻗어 있었다. 손끝이 다시 저려왔다. 이번엔 갈망이 아니라, 순수한 경계심이었다.
'저자가 마음에 걸리느냐.'
"당연하지. 저게 그냥 인사차 온 사람 얼굴로 보여?"
'인간의 눈치는 가끔 짐승보다 나을 때가 있구나.'
"그거 칭찬이야, 아니면 그냥 놀리는 거야?"
구환은 대답 대신 조용히 있었다. 그 침묵이 왠지 대답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연회는 계속됐고, 남궁혁은 점점 취기가 올라오는지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시종 한 명의 옷깃을 잡고 뭔가를 소리치고 있었는데,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여기까지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시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걸로 봐서, 좋은 소리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나는 벽에 기대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언젠가 이 모든 게 폭발할 순간이 올 거라는 걸 직감했다. 남궁혁의 취기, 여제가 보낸 사자의 정체 모를 시선, 그리고 누나의 억지웃음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순간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대청 저편에서 갑자기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