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평가지를 받아 든 순간, 손끝이 먼저 알았다.
또 F였다.
정확히는 F+였다. 저 조그만 플러스 기호 하나가 무슨 자존심 지켜주는 부적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담당관은 늘 그 기호를 붙여서 나눠준다. 고맙기도 하지. 이 플러스 기호 하나 때문에 내가 F- 인생이 아니라 F+ 인생이라고 자축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3년이다.
3년 동안 나는 이 지긋지긋한 평가장에 왔고, 3년 동안 나는 F였다. 어쩌다 한 번 F+가 D-로 바뀐 적이 있었는데, 그날 나는 집에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섯 시간을 웃었다. 정신이 나갔던 게 분명하다. D-가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웃은 건 등급 때문이 아니라, 뭔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그 짧은 착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착각은 다음 평가에서 바로 깨졌다. 도로 F+.
"이하준."
담당관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미안함도, 기대감도 없었다. 그냥 순서였다. 다음 사람 부르듯이. 서류 넘기는 손짓이 딱 그랬다.
"측정 범위 초과 감지, 그리고 즉시 소멸. 매번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곤란한 건 내가 더 곤란하다. 3년째 이 소리를 듣는 사람 심정은 안 헤아려주나.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고개만 숙였다.
측정 범위 초과.
이 말이 왜 F등급 위에 나오는지 아무도 나에게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마력 반응이 너무 커서 계측기가 못 잡는다는 건데, 문제는 그게 3초도 못 가서 흩어져버린다는 거다. 폭죽처럼 확 터졌다가 사라진다. 그러니까 등급은 항상 F다. 폭발했다가 사라지는 힘은 아무도 쓸모 있다고 봐주지 않으니까.
제어가 안 된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3년째 확인만 하고 있다. 확인하러 오는 것도 이제는 습관이다. 마치 매년 하는 신체검사처럼, 결과는 뻔한데도 그냥 가야 하는.
담당관은 서류에 도장을 찍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이 정도 반응이면 병원 가서 검사 한번 받아보는 것도 괜찮을 텐데."
그 말투가 꼭 감기 걸렸을 때 병원 가보라는 소리처럼 가벼웠다. 병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걸.
..병이면 좀 낫겠네요. 병이면 고치면 되잖아요.
속으로만 그렇게 답하고 평가장을 나섰다.
평가장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이런 몸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키 165. 손목은 여자애들보다 가늘다. 목소리는 아직도 삑사리가 나서, 화가 나서 크게 소리치려고 해도 그냥 새된 비명처럼 들린다. 얼굴은 화장 안 해도 눈썹만 좀 정리하면 여자로 오해받기 십상이라, 중학교 때는 여자 화장실 앞에서 경비원한테 붙잡힌 적도 있다.
그때 그 경비원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남자애가 저렇게 생겨서 어떡하냐는 그 표정.
..뭘 어떡해요. 나도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떡해요.
속으로만 그렇게 답했다. 실제로는 그냥 얼굴 붉히면서 화장실을 잘못 찾았다고 웅얼거렸을 뿐이다.
남성성이라는 거, 그런 게 나한테 붙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남자다움을 인증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목소리 굵은 놈들, 어깨 넓은 놈들, 팔뚝에 힘줄 도드라지는 놈들 사이에서 나는 늘 다른 종족이었다.
체육시간에 팔씨름 시키면 나는 늘 첫 판에서 나가떨어졌다. 애들이 웃진 않았다. 그냥 당연하게 여겼다. 그게 더 서러웠다. 웃어주기라도 하면 화를 낼 텐데, 아무도 놀라지 않는 그 반응이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그런데 던전에서만큼은 아니었다.
던전에서만큼은, 손끝에서 뭔가 터져 나올 때만큼은 나도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딱 3초뿐이지만.
3초 동안은, 나도 뭔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교시가 시작한 뒤였다. 평가받으러 간다고 미리 결석계를 냈으니 지각은 아니지만, 어쨌든 조용히 뒷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존재감을 지우는 건 내 특기다. 던전 탐색자로는 F지만, 존재감 지우기로는 아마 S급일 거다.
교실에 들어서니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도 신경 안 쓰지만, 오늘은 유독 더 그랬다. 자리에 앉으면서 가방을 조용히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 뭐가 됐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교실 뒷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때 웅성거림이 들렸다.
쉬는 시간, 매점 가는 길목에서였다.
강태호가 김도훈을 벽에 밀어붙이고 있었다.
"야, 씨, 이거 뭔데."
강태호가 도훈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흔들고 있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굿즈였다.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저 특유의 파스텔톤 포장지만 봐도 뭔지 알 것 같았다.
"돌려줘."
도훈이 낮게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저건 나름 용기다.
"뭐 이런 걸 학교에 들고 다녀? 오타쿠냐?"
강태호 뒤에 있는 애들 두어 명이 웃었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나는 그 광경을 그냥 지나쳤다.
지나쳤다는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한데, 실제로는 발걸음을 멈추고 봤다. 그러다가 다시 걸었다. 그게 지나쳤다는 뜻이다.
왜 도와주지 않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저 새끼는 저러다 한 번 크게 당해봐야 정신 차린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도훈이를 위한 논리가 아니라 그냥 내가 개입하지 않기 위한 핑계였다.
강태호 키가 얼마나 되더라. 180은 넘을 거다. 어깨도 넓고 팔뚝도 굵다. 저런 애를 상대로 내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몸싸움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럼 말로 싸워야 하는데, 말로 싸우려면 내가 눈에 띄어야 한다.
눈에 띄는 게 제일 싫다.
나는 원칙이 하나 있다. 약자를 괴롭히는 놈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그게 던전에서든 현실에서든.
하지만 그 원칙을 실행하려면 내가 나서야 하고, 내가 나서면 내가 드러난다.
드러나는 게 싫다.
그래서 나는 원칙을 마음속 서랍에 넣어놓고, 도훈이가 굿즈를 빼앗기는 걸 그냥 지켜봤다. 강태호가 그 포장을 확 뜯어서 던지고, 도훈이가 그걸 주우려고 무릎을 굽히는 순간까지도.
..미안하다.
속으로 그 말 한마디를 던지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하준 학생, 오늘도 F 받으셨네요?"
복도에서 마주친 담임이 웃으며 말했다. 웃으며 말하는 건데 왜 그렇게 아픈지.
"네."
"흠, 3년째인데. 부모님이랑 상담 한번 하는 게 어떨까요."
부모님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담임 선생님도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아마 알고 있을 거다. 학교 서류에 다 적혀 있으니까.
담임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냥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 웃음이 미안함인지 귀찮음인지 나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마 둘 다였겠지.
혼자 사는 게 편할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안 챙기니까 등급이 F여도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게 편한 게 아니라 그냥 외로운 거라는 걸 나도 안다.
밥은 혼자 먹고, 시험 성적도 혼자 확인하고, 평가지도 혼자 받아 들고 혼자 집으로 걸어온다. 누군가 옆에서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만 해줘도 좀 나을 텐데,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없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다시 안경을 꺼내 들었다.
검은 뿔테. 평범해 보이는 이 안경은, 사실 인식차폐 마도구다. 던전 상점에서 거의 전 재산을 털어서 산 물건이다. 이걸 쓰고 있으면 던전 안에서 다른 탐색자들이 내 얼굴을, 정확히는 내 신원 정보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왜 이런 걸 샀냐고?
간단하다. 나는 남한테 얼굴 보여주는 게 싫다. 특히 던전 안에서는 더 싫다.
왜냐면, 던전 안에서는 나도 힘을 좀 쓰거든. 3초뿐이긴 하지만.
그 3초 동안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나도 모른다. 아마 웃고 있을 거다. 그렇게 짐작만 한다.
그 표정을 누군가 본다면, 그리고 그게 나라는 걸 안다면, 뭔가 부끄러운 게 들킨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안경은 나한테 방패 같은 존재다. 얼굴을 가리는 게 아니라, 내 진짜 모습을 아무도 못 보게 만드는 방패.
밤 열한 시. 나는 창문을 열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우리 집 근처에는 작은 균열, 소형 게이트가 하나 있다. 등급 미달이라 정식 던전으로 등록도 안 된 그런 곳. 아무도 관심 없는 곳.
거기서 나는 3년째 혼자 수련을 하고 있다.
혼자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파티를 짤 수가 없어서다. F등급인데 누가 나랑 파티를 짜겠는가. 짜준다고 해도 내 쪽에서 사양이다. 내 힘이 어떻게 터질지 나도 모르는데, 옆에 사람 세워놓고 실험할 수는 없으니까.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흙과 철, 그리고 아주 미세한 오존 냄새.
이 냄새를 맡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학교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감각이다.
손을 뻗었다.
뜨윽-!
손끝에서 뭔가 뻗어 나오려다가, 곧바로 사그라졌다.
또 이거다.
항상 이 지점에서 멈춘다. 뭔가 터질 것 같다가, 딱 거기서 스르륵 힘이 빠진다. 3년 동안 단 한 번도 이 벽을 넘어본 적이 없다.
몇 번을 더 시도했다. 손끝에 힘을 모으고, 숨을 참고, 눈을 감았다가 뜨는 그 순서를 반복했다.
뜨윽-!
또 사그라졌다.
뜨윽-!
또.
몇 번을 더 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손바닥이 따끔거리는 감각만 남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뭐가 문제일까.
뭐가 문제인지 3년째 답을 못 찾고 있다.
그냥 이렇게 계속 F로 늙어가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게이트를 나섰다. 별다른 진전 없이.
다음날도 똑같을 거라는 걸 알면서.
그런데 다음날, 매점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 벽에 손끝이 닿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