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밑바닥, 완벽하게 해체하다

1화

통장 잔액 8,342원. 그 숫자를 세 번이나 다시 확인했지만 자릿수는 변하지 않았다. 네 번째로 확인했을 때는 혹시 화면이 잘못 로딩된 게 아닐까 싶어 앱을 완전히 종료했다가 다시 켜보기까지 했는데, 결과는 똑같았다. 8,342원. 소수점 아래는 없었다. 이세계에서 5년을 버텼다. 성채만 한 비행 마수의 발톱에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지면서도 살아남았고, 밤마다 몰려드는 마물 떼의 울음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버텼던 시간이었다. 첫 해에는 물을 끓여 마시는 법조차 몰라서 배탈로 죽을 뻔했고, 두 번째 해에는 동료 세 명이 하루아침에 육편으로 흩어지는 걸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으며, 세 번째 해부터는 그냥 감정이라는 걸 아예 꺼놓고 살았다. 그곳에서는 하루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육편이 되어 흩어지는 게 당연했으므로, 나는 매 순간 숨 쉬는 것 자체를 전투로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돌아온 서울에서 나를 죽이는 건 마물이 아니라 월세였다. 귀환자 등록증을 손에 들고 헌터관리국 창구에 앉았을 때, 담당자는 내 스킬창을 확인하고는 안면 근육을 살짝 굳혔다.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나는 놓치지 않았는데, 5년 동안 마수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로 생사를 갈랐던 감각이 사람의 얼굴 근육 떨림 정도는 우습게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해체, 레벨 1. 그게 5년의 생존이 남긴 전부였다. "스킬 레벨이... 1이시네요." 담당자의 목소리에는 동정과 무시가 절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보통 5년 정도 이세계에 계셨으면 레벨 3, 4는 되시는데. 저희 통계상으로도 평균이 그 정도거든요." "그런가요." "혹시 이세계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서류에 남길 게 있어서요." "생존이요." 담당자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그게 대답이 될 수 있는지 판단이 안 서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결국 서류에 뭐라 적어 넣었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스킬 레벨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도 정확히는 몰랐다. 이세계에서는 그런 숫자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살아남느냐 죽느냐, 그 이분법만이 유일한 기준이었을 뿐. "이걸로 등록 마무리됐고요, E랭크 게이트부터 이용 가능하십니다. 스킬 레벨 올리시면 등급도 자연스럽게 올라가니까, 힘내세요." 힘내세요, 라는 말이 그렇게 공허하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등록이 끝나고 나온 나는 강남 던전 E랭크 게이트 앞에 서서 마른침을 삼켰다. E랭크는 헌터 등급으로 치면 가장 낮은 축에 속하는 구역이었고, 스킬 레벨 1짜리 해체 능력자가 갈 수 있는 곳도 딱 거기까지였다. 게이트 앞에는 이미 열댓 명이 줄지어 있었는데, 대부분 나보다 어려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갓 각성한 신입 헌터들, 혹은 나처럼 이세계에서 돌아왔지만 스킬 등급이 낮은 귀환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습기와 흙, 그리고 뭔가 썩어가는 듯한 비릿함. 이세계의 냄새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등줄기가 저절로 곧아지고, 발끝은 무의식적으로 지면의 굴곡을 읽어냈다. 5년 동안 몸에 새겨진 습관이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위협에 대한 경계, 그건 이제 내 신체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함께 들어온 신입 헌터 하나가 손전등 불빛에 놀라 자기 발을 헛디디는 걸 보면서, 나는 잠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저 정도 어둠에 놀라다니, 나였다면 눈을 감고도 여기를 활보할 수 있었을 텐데. 던전 안쪽에서 슬라임 하나를 발견했다. E랭크치고는 크기가 좀 있었지만, 이세계에서 상대했던 것들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끼 강아지 수준이었다. 몸통을 뒤덮은 점액질이 형광등 불빛 대신 던전 특유의 푸르스름한 빛을 받아 흐물흐물 반짝였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검을 뽑아 슬라임을 베어 넘긴 뒤, 나는 손을 뻗어 사체를 향해 스킬을 발동했다. 해체. 손끝에서 파란빛이 은은하게 번지며 슬라임의 몸을 정확한 결대로 갈라놓았다. 핵과 점액질, 외피막까지 세 부위로 완벽하게 분리되었다. 손목의 각도, 손가락 마디의 미세한 힘 조절, 그리고 스킬이 발동되는 타이밍까지, 모든 게 근육에 박혀 있는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나에게는 그저 익숙한 일상이었다. 이세계에서도 매번 이런 식으로 마수의 사체를 해체해 필요한 부위만 취해왔으니까. 그때는 해체를 잘못하면 마정석이 터져서 손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으니, 지금 이 정도 해체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세 시간을 더 돌며 마수 여섯 마리를 잡고 해체했다. 슬라임 두 마리, 고블린 한 마리, 그리고 이름도 잘 모르는 벌레형 몬스터 세 마리였는데, 다들 하나같이 이세계 기준으로는 갓 태어난 새끼 수준의 위협도밖에 안 됐다. 결과물을 담은 배낭이 묵직해질 즈음, 나는 게이트를 빠져나와 매입감정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안은 형광등 불빛 아래 사람들로 붐볐다. 다들 저마다의 소재를 들고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는데, 앞줄에 선 헌터 하나는 커다란 마수의 뿔을 통째로 짊어지고 와서 접수원과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건 최소 레벨 4나 5짜리 해체 소재일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배낭 속 슬라임 핵을 슬쩍 내려다봤다. 초라했다. 나는 접수대 앞에 서서 배낭을 열었다. "레벨 1 해체 소재요." 접수원의 목소리에는 하품이 섞여 있었다. "음... 이건 좀 보류해야 할 것 같은데요." "보류요?" 나는 되물었다. "네, 저희가 레벨 1 소재는 우선순위가 낮아서요. 오늘 접수량이 많아서 순서가 좀 밀릴 것 같습니다." 접수원은 내 배낭 속 소재를 눈으로 슥 훑어보고는 그대로 서류함에 밀어 넣었다.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채였다. 내가 세 시간 동안 던전을 돌며 잡고 해체한 결과물이, 저 사람 눈에는 그냥 서류함에 넣고 잊어버려도 되는 잡동사니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마른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오늘 그 소재를 팔지 못하면 다음 달 월세는 완전히 물 건너간다는 계산이 머릿속을 스쳤다. 8,342원. 그 숫자가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언제쯤 처리가 될까요?" 나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최소 일주일?" 접수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레벨 1 소재는 어차피 하급 판정이라 급할 것도 없잖아요." "혹시 지금 확인이라도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제가 해체한 부위들, 결이 꽤 정확하게 나왔을 거라서요." 접수원은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마치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벨 1이신데 결이 정확하게 나오셨다고요?" 그 말투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손님, 저희가 매일 이런 소재만 수백 건씩 받거든요. 스킬 레벨이 낮으면 품질도 낮은 거예요. 그게 시스템이에요." 시스템. 그 단어가 마치 판결문처럼 무겁게 떨어졌다. 하급 판정. 그 단어가 귓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실제로 내가 해체한 부위들이 어떤 품질인지, 접수원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스킬 레벨 숫자 하나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뭐라 더 따지고 싶었지만, 뒤에 줄 선 사람들의 눈총이 느껴져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여기서 소리를 높인다고 상황이 나아질 것도 아니었으니까. 건물을 나서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색이 이세계에서 봤던 마지막 하늘과 닮아 있었다. 그때도 나는 이렇게 막막한 기분으로 하늘을 봤었다. 마지막 전투 직전, 동료 하나 없이 홀로 남았던 순간에도 하늘은 저렇게 붉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죽음이 명확한 형태로 다가왔었다. 발톱, 이빨, 화염, 독. 그 어떤 것이든 형태가 있었고, 눈에 보였으며, 대처할 방법이 있었다. 여기서는 서서히, 아주 천천히 굶어 죽어가는 방식으로 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서류함에 처박힌 소재처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방식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편의점에 들러 가장 싼 삼각김밥 하나를 집었다. 참치마요를 살까 스팸을 살까 잠깐 고민했는데, 결국 가격표를 보고 그냥 제일 싼 걸로 손이 갔다.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열었을 때, 남은 현금은 정확히 삼천 원이었다. 지갑 안쪽 주머니에 구겨져 있던 천 원짜리 몇 장을 펴면서, 나는 이세계에서 마정석 하나로 몇 달을 버텼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오히려 돈 걱정이 없었다. 여긴 돈이 있어야 숨을 쉴 수 있는 곳이었다. 불운은 성실함을 배신했다. 그날 밤, 나는 좁은 원룸 바닥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곰팡이가 핀 벽지 무늬가 마치 이세계의 지도처럼 보였다. 그 지도를 따라가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다가 삼각김밥 포장지를 뜯는 것도 잊고 옆에 던져둔 채 잠이 들었다. 내가 맡긴 소재가 감정센터 서류함 한구석에서 정확히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 그날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서류함이, 앞으로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도화선이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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