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늪 표면에 뜬 빛이 흔들렸다.
3층 슬라임 필드는 원래 이런 색이 아니었다. 늪물은 원래 짙은 청록색이었는데, 결정체를 발견한 자리 주변만 옅은 은색으로 번져 있었다. 처음엔 그냥 반사광인가 했다. 자세히 보니 물 자체가 빛나고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미 손은 뻗어 있었다.
손끝이 결정체 표면에 닿는 순간, 눈앞의 창 글씨가 커졌다.
[자율진화 프로토콜을 활성화하시겠습니까?] [경고: 활성화 이후 되돌릴 수 없습니다.]
10년 동안 저런 경고문을 본 적이 없었다. 시스템을 안 켰으니까. 나는 시스템 창을 거의 열지 않는 탐색자였다. 레벨도, 스탯도, 알림도 다 꺼놓고 그냥 파이프 하나로 슬라임만 잡았다. 그게 제일 안전한 방식이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고, 협회에 보고할 것도 없고, 사고도 안 나는 방식.
그런데 지금은 켜지도 않은 시스템이 저 혼자 경고를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건 대개 위험하다는 뜻이다. 알고 있다. 10년 동안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도 손을 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유는 하나였다. 10년째 3층에서 슬라임만 잡으면서, 나는 뭔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같은 늪, 같은 슬라임, 같은 파이프질. 사고는 안 나지만 아무것도 나아지지도 않는 삶. 그게 위험한 방식이라는 것도, 대가가 있을 거라는 것도 알았지만 알아도 멈추지 않는 순간이 있다. 이게 그런 순간이었던 것 같다.
경고문 아래에 활성화 버튼이 있었다. 손가락 하나만 더 움직이면 됐다. 나는 그 버튼을 몇 초 동안 그냥 보고 있었다. 늪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젖은 흙과 썩은 풀 냄새. 익숙한 냄새였다. 익숙한 냄새 속에서 낯선 결정을 내리는 게 웃겼다.
"활성화." 나는 소리 내어 말했다. 던전 안에서 혼자 소리 낸 건 오랜만이었다.
결정체가 손바닥 안에서 부서지듯 흩어졌다. 유리가 아니라 얼음이 녹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팔뚝을 타고 뜨거운 게 훑고 올라왔다. 뜨겁다기보다는, 뭔가 안쪽에서 새로 쓰이는 느낌이었다. 뼈 속에 누가 펜으로 뭘 적는 것 같았다. 시야가 하얘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늪 바닥에 무릎을 박았다. 숨이 가빠졌다. 심장이 두 배로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시스템 창을 열었다가 죽으면 그것도 나름 상징적이겠다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행히 오래가진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키가 작은 여자아이였다.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외형. 은빛 숏컷 머리에 담금빛이 도는 금색 눈동자.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발이 늪 표면에서 살짝 떠 있었다.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히 사람이 아니었다. 3층 늪 한가운데, 몬스터 필드 정중앙에 저런 게 멀쩍이 서 있을 리가 없다. 나는 파이프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의식 회복을 확인했습니다." 그 아이가 말했다. 목소리에 억양이 거의 없었다. "마스터, 자율진화 프로토콜 활성화가 정상 완료되었습니다."
"…마스터?"
"호칭 변경을 원하십니까." 여자아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동작이 인간과 미묘하게 달랐다. 각도가 너무 정확했다. "제 이름은 설아입니다. 마스터의 전용 지원 유닛으로 배정되었습니다."
나는 일단 일어나 앉았다. 무릎에 늪물이 묻어 축축했다. 바지에 스며든 물이 차가웠다. 이 상황에서 제일 먼저 나온 생각은 '이거 협회에 보고해야 하나'였다. 10년을 별 탈 없이 조용히 살아온 사람 특유의 반사작용이다.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기면 일단 서류를 떠올린다. 이게 정상인지는 모르겠다.
"너, 뭐냐." 짧게 물었다.
"설명이 필요하시군요." 설아는 손을 들었다. 손끝에서 얇은 빛의 창이 펼쳐졌다. 시스템 창과 비슷했지만 색이 달랐다. 협회 표준 시스템은 파란색인데, 저건 흰색에 가까웠다. "자율진화 프로토콜은 시스템 외부에서 유입된 진화 체계입니다. 일반 탐색자의 시스템 경험치 축적 방식과는 무관하게 작동합니다. 저는 이 체계의 정보 접근 및 판단 보조를 위해 배속된 인터페이스입니다."
"그러니까, AI라는 거야."
"명확히는 아카시크 레코드에 접속 권한을 가진 독립 인격체입니다. AI라는 표현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부르셔도 됩니다."
말투가 딱딱한데 은근히 할 말은 다 한다. 나는 파이프를 다시 손에 쥐며 물었다.
"이거, 협회에 신고해야 하는 물건이야?"
설아는 잠시 침묵했다. 침묵이라고 해도 표정은 그대로였다. 저게 감정 표현이 없는 종족이면 참 편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대답을 듣고 생각이 좀 바뀌었다.
"신고 절차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협회는 즉시 회수 절차에 들어갈 것이며, 마스터의 신체에서 프로토콜을 강제 분리하는 과정에서 사망 확률이 61퍼센트로 추산됩니다."
아무렇지 않게 저런 소리를 한다.
"그거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사실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는 말싸움을 해봐야 손해다. 알고 있다. 10년 동안 온갖 몬스터랑 상대하면서 배운 게 있다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은 시작하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 이게 그런 싸움 같았다.
"좋아. 신고는 안 해." 나는 늪물이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근데 규칙은 정하자."
"규칙 말씀이십니까."
"어. 이대로 그냥 아, 그래요 하고 넘어가긴 싫어."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하나, 넌 나한테 정보 숨기지 마. 둘, 위험한 일 있으면 미리 말해. 셋, 내 몸에 관련된 결정은 나랑 상의하고 해."
설아는 그 세 가지를 하나씩 듣는 동안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사람이었다면 눈이 뻑뻑했을 시간이었다.
"동의합니다. 다만 마스터께서도 조건이 있으시다면 저 역시 요청드리겠습니다." 설아가 고개를 까딱였다. "저는 마스터의 전투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수집합니다. 마스터의 생존이 저의 존재 목적과 직결되므로, 비효율적인 판단이 관측될 경우 즉시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비효율적인 판단이라니."
"예를 들어, 방금 마스터께서는 미확인 반응체를 즉석에서 활성화하셨습니다. 안전성 검증 없이. 이는 명백히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말이 막혔다. 맞는 말이라 더 짜증 났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됐는데. 협회에 신고하고 회수반 기다리는 동안 옆에서 손 놓고 앉아 있어?"
"협회 회수반의 평균 출동 시간은 47분입니다. 그 시간 동안 마스터는 늪 한가운데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며, 슬라임 개체의 재접근 확률은 82퍼센트로 산출됩니다."
"…그럼 활성화가 맞았다는 거네."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과정은 비효율적이었습니다."
"결과가 맞았으면 과정이 뭐가 중요해."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 취하는 판단이 반복되면, 장기적으로 생존율이 낮아집니다. 이것이 제 존재 목적과 배치됩니다."
말로는 절대 못 이기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그냥 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했다.
"알았다. 그건 인정."
설아는 그제야 아주 살짝, 입꼬리 비슷한 걸 움직였다. 웃은 건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됐다. 표정 근육이 있는 건지도 확신이 안 갔다.
나는 늪 위에 떨어진 파이프를 챙겨 일어섰다. 몸이 아까보다 가벼웠다. 정확히 뭐가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근육 안쪽에서 뭔가 새로 자리 잡은 느낌이 있었다. 관절이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무게 자체가 줄어든 것 같기도 했다. 시험해보려고 발끝으로 살짝 늪 바닥을 밀어봤다. 평소보다 더 멀리 튕겨 나갔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을 뻔했다.
"신체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설아가 그 모습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정확한 수치는 추가 데이터 수집이 필요합니다."
"그니까 몰라?"
"모른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추가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애는 말끝마다 이런 식으로 정정을 하고 넘어간다. 벌써부터 피곤할 예정이라는 게 느껴졌다.
"이제부터 뭘 해야 되는데." 나는 파이프를 어깨에 걸치며 물었다.
"자율진화는 조건부로 작동합니다." 설아가 답했다. "현재로선 조건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관측을 통해 파악해야 합니다."
"조건이 명확하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이야. 뭘 하면 진화하는지도 몰라?"
"프로토콜 자체의 접근 권한이 단계적으로 개방됩니다. 현재 마스터의 권한 등급으로는 전체 조건을 열람할 수 없습니다."
"그럼 나는 뭘 하면서 조건을 채워야 되는데, 그것도 모른다는 거잖아."
"정확합니다."
너무 당당하게 정확하다고 하니까 화도 안 났다. 이게 무슨 시스템이야, 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그냥 삼켜졌다. 10년 동안 시스템이란 걸 거의 안 써봤으니 이게 원래 이런 건지, 이 자율진화라는 게 특별히 이상한 건지도 판단이 안 됐다.
"그럼 일단 슬라임 잡으면서 보면 되나."
"그것이 마스터의 지난 10년 방식이었으니, 유효한 접근일 겁니다."
비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모르겠는 말투로, 설아는 그렇게 정리했다. 나는 그 말을 곱씹어봤다. 10년 방식이니 유효하다는 건지, 10년 동안 그것밖에 안 했으니 별수 없다는 건지. 어느 쪽이든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서 그냥 넘겼다.
나는 다시 늪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이 늪물을 가를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찰박. 찰박.
열두 번째 슬라임이 있던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열세 번째 슬라임이 저 앞에서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반투명한 몸체 안쪽에서 옅은 청록색 핵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평소보다 크기가 좀 컸다. 아니, 어쩌면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일 수도 있었다. 방금 몸에 뭔가 새로 들어왔으니까.
설아가 옆으로 따라붙었다. 걸음을 걷는 게 아니라 그냥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발이 늪 표면에 닿지 않으니 당연했다.
"마스터, 참고로." 설아가 말했다. "저 개체는 일반 슬라임보다 핵의 밀도가 17퍼센트 높습니다. 자율진화 활성화의 여파로 주변 생태 반응이 일부 변화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7퍼센트 높으면 어떻게 되는데."
"단순 계산으로는 방어력이 상승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마스터의 신체 능력치도 함께 상승했으므로, 실질적 위험도는 재산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해보기 전엔 모른다는 거네."
"정확합니다."
또 저 소리다. 나는 파이프를 고쳐 쥐었다. 손바닥에 익숙한 무게가 느껴졌다. 10년 동안 이 파이프로 얼마나 많은 슬라임을 때렸는지 세어본 적도 없다. 세는 것도 의미가 없을 만큼 반복했다.
슬라임이 몸을 부풀리다 말고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평소라면 그냥 제자리에서 부풀기만 했을 텐데, 이번엔 몸 전체가 옆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처음 보는 움직임이었다.
일단은, 평소처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파이프를 고쳐 쥐고 늪 바닥을 박차며 앞으로 나갔다. 발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튀어나갔다. 균형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몸이 내가 알던 속도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스터, 신체 반응 속도가 기존 대비 두 배 이상입니다." 설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담담했지만, 어딘가 경고처럼도 들렸다. "적응하지 못한 상태로 접근하시면—"
말이 끝나기 전에 이미 몸은 슬라임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익숙한 거리가 아니었다. 예상보다 두 배는 빠르게 왔다는 뜻이다.
핵이 흔들리는 게 눈앞에 크게 보였다. 파이프를 내리치기엔 이미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슬라임의 몸체가 부풀어 오르며 그대로 나를 덮쳐올 각도였다.
"어—"
몸이 내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