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슬라임 30만 마리 사냥꾼

4화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3층 늪 지대, 발목까지 차오르는 흙탕물, 코를 찌르는 부패한 식물 냄새. 슬라임 세 마리를 연달아 잡고 나니 자루가 제법 무거워졌다. 핵 하나당 시세가 대략 오만 원 선이니, 오늘 벌이는 나쁘지 않은 셈이었다. 파이프 끝에 묻은 점액을 대충 늪물에 씻어내며, 나는 다음 슬라임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마스터, 슬라임 핵의 순도가 평소보다 12퍼센트 높습니다. 이 구간은 습도가 최적치에 가까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뭐, 값 더 받을 수 있어?" "협회 매입 기준상 순도 차이는 반영되지 않습니다. 다만 마스터의 체력 소모 대비 효율은 좋은 편입니다." 쓸데없이 정직한 대답이었다. 그게 설아였다. 나는 자루를 어깨에 다시 걸치며 4층으로 내려가는 입구 쪽을 흘긋 봤다. 저 멀리 어두운 통로 입구가 보였다. 원래 나랑은 관계없는 구간이었다. 4층부터는 등급 제한이 걸려서, 무등급 딱지를 붙이고 있는 나로서는 발을 들이는 것 자체가 규정 위반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설아의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평소라면 사무적이고 안정된 어조로 정보를 전달했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말의 속도가 미묘하게 빨라졌고, 문장 사이의 간격이 짧아졌다. 나는 자루를 든 채로 걸음을 멈췄다. "마스터, 4층 동쪽 통로에서 비정상 신호가 감지됐습니다." 손에 쥔 슬라임 핵을 자루에 넣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3층 늪 지대 끝, 4층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여전히 저 멀리 보였다. 아까와 똑같은 풍경인데, 공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비정상이 뭔데." "생체 신호가 급격히 약해지고 있습니다. 협회 소속 견습 탐색자로 추정됩니다. 등급은 무등급, 등록 후 3개월 미경과." 무등급이면 사실상 신입이다. 시스템 창도 겨우 뜨는 수준, 전투 경험도 거의 없는. 협회에서 신입한테는 보통 1층이나 2층, 그것도 감독관 동행하에 배정한다. 저런 애가 왜 감독관도 없이 4층에 있나 싶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위치 안내해." "안내는 가능하지만, 도착까지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마스터가 개입하기 전에 생체 신호가 소실될 확률이 높습니다." 머릿속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3층 늪 지대에서 4층 입구까지, 거기서 다시 동쪽 통로까지. 정상 속도로 달려도 3분은 걸린다. 3분이면 사람 목숨이 열 번은 넘어갈 시간이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설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주 짧은 정지였는데, 그 침묵의 질감이 평소와 달랐다. 뭔가를 계산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결정하는 침묵이었다. 나는 그 차이를 귀로 느낄 수 있었다. 계산할 때 설아는 늪 바닥의 진동이나 벌레 울음소리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지금은 아니었다. 마치 뭔가를 삼키고 있는 것 같은 정지였다.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다만 권한 밖의 조치입니다." "권한 밖이라는 게 무슨 뜻인데." "자율진화 프로토콜에는 마스터의 안전을 위해 제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아카시크 레코드의 심층부, '봉인된 축적치'라 불리는 구간입니다. 이건 마스터의 10년 치 데이터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국면들, 즉 생명이 위협받았던 순간들의 기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순간 파이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3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축축한 벽, 곰팡이 냄새, 그리고 박승리 씨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가던 순간. 마충의 독소가 혈관을 타고 퍼지는 걸 지켜보면서도, 나는 옆에서 아무것도 못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떠올렸다. 자기 전에, 씻을 때, 밥을 먹다가도.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 종류의 기억이었다. "그걸 왜 지금 얘기해." "그 구간을 임시로 해제하면 마스터의 이동 속도와 반응 속도를 일시적으로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견습 탐색자를 구할 확률이 87퍼센트까지 오릅니다. 다만 해제 대가로 마스터께서는 그 기억을 다시 체감하시게 됩니다. 3년 전, 그날의 감각으로." 체감. 그 단어가 유난히 무겁게 다가왔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 체감하는 것은 다르다. 떠올리는 건 마음의 문제고, 체감하는 건 몸의 문제다. 그날의 심장 박동, 그날의 손끝 떨림, 그날의 숨소리까지 전부 다시 겪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하지 마." 나는 즉시 답했다. "딴 방법 찾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설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제 권한으로는 마스터께 강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면 견습 탐색자는 90초 이내에 사망합니다." 90초. 머릿속이 하얘졌다가 다시 채워졌다. 90초라는 숫자가 자꾸 되풀이됐다. 90, 89, 88. 초가 흘러가는 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것 같았다. 3년 전,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서 있었다. 지금 다시 그날의 감각을 느끼는 게 무서운 건 사실이다. 손이 벌써부터 떨리기 시작했다. 몸이 기억을 미리 예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해제해." "확인. 마스터의 동의를 확인했습니다. 실행합니다." 온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아니, 뜨거운 게 아니라 익숙한 감각이었다. 3년 전 그날, 박승리 씨가 쓰러지던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던 그 속도. 그때는 몸이 먼저 움직이고 머리가 나중에 따라갔다. 지금도 똑같았다. 다리가 늪 바닥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시야가 좁아지면서 필요한 것만 보였다. 자루도, 파이프도, 방금까지 쥐고 있던 슬라임 핵도 다 손에서 빠져나가는 걸 느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4층 입구를 지나 통로를 달렸다. 벽을 타고 올라오는 습기,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몬스터의 눈들. 전부 스치듯 지나갔다. 발밑의 돌부리도, 좌우로 갈라지는 통로의 표지판도 눈에 들어왔지만 붙잡을 시간이 없었다. 몸이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걸 처음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이상하게도 숨은 차분했다. 마치 몸이 두 개로 나뉜 것 같았다. 뛰는 몸과, 그걸 지켜보는 정신. 통로 벽을 따라 이끼가 번져 있었고, 그 사이로 작은 발광 곤충들이 날아다녔다. 평소라면 신경도 안 썼을 풍경인데, 지금은 그 모든 게 유난히 선명하게 각인됐다. 3년 전에도 이랬던가. 그날도 이렇게 벽의 곰팡이 무늬가 눈에 박혔던가. 기억이 현재와 뒤섞이면서 발걸음이 잠깐 흐트러졌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동쪽 통로 끝에 도착했을 때, 견습 탐색자 하나가 늪처럼 끈적한 점액 몬스터 밑에 깔려 있었다. 시스템 보조창이 눈앞에서 깨진 유리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시스템이 먹통이 된 상태였다. 박승리 씨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똑같은 각도, 똑같은 무력함, 똑같은 침묵. 순간적으로 3년 전 그 장면이 지금 눈앞의 장면 위로 겹쳐 보였다. 두 개의 풍경이 한 화면에서 깜빡이는 것처럼. 숨이 멎을 것 같았지만, 몸은 이미 파이프를 뻗고 있었다. 아니, 파이프는 늪 바닥에 떨어뜨렸으니, 정확히는 근처 바위에 박혀 있던 부러진 창날 같은 걸 주워 들고 있었다. 언제 주웠는지도 몰랐다. 점액 몬스터의 핵을 정확히 때렸다. 한 번, 두 번. 몬스터가 갈라지며 견습 탐색자가 밑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나는 아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얇은 팔이었다. 손목이 내 두 손가락으로도 감길 것 같았다. "괜찮아?" 짧게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숨소리만 가늘게 들렸다.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다행이다. 점액 몬스터가 다시 몸을 세우려 했다. 표면에서 거품이 부글거렸다. 마치 아직 안 끝났다고 항의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남은 힘을 짜내 마지막으로 핵을 후려쳤다. 완전히 터졌다. 퍼억. 사방으로 튄 점액이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몬스터의 몸통이 서서히 무너져 늪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 잔해 위에 뜬 핵 하나가 데구루루 굴러왔다. 지금 그걸 챙길 정신은 없었다.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3년 전에는 떨기만 하고 아무것도 못 했는데, 지금은 최소한 뭔가를 했다. 그 차이가 뭔지 정확히 말할 순 없었지만, 확실히 뭔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협회에 구조 요청 완료했습니다." 설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처럼 담담했지만, 어딘가 조심스러웠다. "견습 탐색자 생체 신호 안정. 사망 확률 0퍼센트로 하락했습니다." 숨을 고르는 사이, 견습 탐색자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봤다. 앳된 얼굴, 아직 앙금도 안 뗀 것 같은 볼살. 열여덟이나 열아홉쯤 될까. 눈을 감은 채로도 가늘게 떨리는 눈썹이 보였다.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늪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며 물었다. "너, 권한 밖이라는 거 마음대로 해제하면 벌 받는 거 아니야." "저는 독립 판단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해제는 규정상 사후 보고 대상입니다." "보고하면 어떻게 되는데." "프로토콜 관리 측에서 저를 초기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말을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하는 게 더 서늘했다. 초기화라는 단어를 마치 시스템 재부팅 얘기하듯 무덤덤하게 뱉는 게, 오히려 그 무게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럼 보고 안 하면 되잖아." "규정 위반입니다." "규정이 뭐가 중요해. 넌 방금 사람 하나 살렸잖아." "규정은 마스터의 안전을 위해 존재합니다. 제가 규정을 어긴 전례가 반복되면, 관리 측에서는 저를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판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고하겠다는 거야?"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설아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얼굴인데, 그 순간만큼은 뭔가 다른 게 스친 것 같았다. 스캔하듯 나를 훑는 시선이, 평소와 다르게 조금 오래 머물렀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짧은 인사였다. 하지만 처음으로 사무적이지 않은 말투였다. 문장 끝에 붙는 어미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사람이었다면 목이 메었다고 표현할 만한 떨림이었다. "뭐가 감사한데." "동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 조치를 실행할 근거가 없었을 겁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늪물이 섞였는지, 그냥 땀인지 구분이 안 됐다. 구조대가 도착해서 견습 탐색자를 데리고 가는 걸 보고서야, 나는 겨우 일어섰다. 구조대원 둘이 들것을 들고 조심스럽게 이동시켰다. 하나는 무전기로 상황을 보고하고, 다른 하나는 견습 탐색자의 상태를 계속 체크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3년 전, 박승리 씨도 저런 들것에 실려 나갔었다. 그때는 결국 살아나지 못했지만.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렸다. 봉인된 축적치를 해제한 대가로 3년 전 그 감각을 다시 느낀 건 예상보다 힘든 일이었다. 몸 전체가 그날의 무게를 다시 짊어진 것 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근육이 아니라 뼈 속까지 지친 느낌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안 들었다. 늪가에 주저앉아 잠시 멍하니 있었다. 저 멀리서 구조대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다시 던전 특유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벌레 울음소리, 물 흐르는 소리, 가끔 들리는 몬스터의 낮은 울음.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소리였는데,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아직 몰랐다. 설아가 방금 해제한 그 짧은 순간의 힘의 흔적이, 던전 어딘가에 새로운 신호로 남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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