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엄마, 저만 마법사예요

2화

그날 이후로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갓난아기의 몸이라는 게 시간 감각을 완전히 뒤틀어버리는 물건이었다. 하루하루가 잠과 젖과 낯선 냄새로만 채워졌고, 나는 몸을 뒤집는 데만 몇 주를 소모했으며, 첫 걸음을 떼기까지는 거의 일 년이 걸렸는데, 그 지루한 성장 과정을 서른둘 먹은 정신으로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서 젖병 하나 스스로 붙잡지 못하는 몸뚱이라니, 전생에 헬스장 안 다닌 걸 후회할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이 몸뚱이는 대체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가.' 나는 매일같이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조금씩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모아나갔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방 안을 채운 물건들, 벽에 걸린 두꺼운 서적들의 표지 문양까지, 나는 갓난아기의 눈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관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집안 구조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대들보마다 붉은 실이 감겨 있었고, 방문 위쪽에는 손바닥만 한 부적이 못으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그 부적의 먹선이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진동하는 걸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처음엔 착시라고 생각했지만, 밤이 되면 그 진동이 유독 심해진다는 걸 눈치챈 뒤로는 착시라는 말로 넘길 수가 없었다. 하녀들은 그 부적을 지날 때마다 고개를 살짝 숙이는 버릇이 있었고, 늙은 집사는 매일 아침 저택 외곽을 돌며 소금을 뿌렸다. 이런 풍경을 서른두 해를 살아온 어른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자니, 이건 그냥 판타지 소품이 아니라 진짜로 뭔가를 막기 위한 방비라는 확신이 점점 굳어졌다. 그 결과 알게 된 건, 내가 태어난 이 집안이 '강씨 가문'이라 불리는, 이 세계에서 상당한 위세를 지닌 퇴마사 가문이라는 사실이었다. 퇴마사.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내가 전생에 좀비 게임을 좀 많이 하긴 했지만, 진짜로 퇴마사 가문 아들로 태어날 줄은 몰랐지.' 다음엔 무협 소설 주인공으로 태어나는 것도 노려봐야 하나, 하는 되도 않는 생각까지 스쳤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이 세계의 퇴마사는 게임 속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로 초자연적인 존재와 맞서는 실전 전투 인력이었으니까. 밤마다 부적이 떨리고 소금이 뿌려지는 이유가 그저 미신이 아니라는 걸, 나는 갓난아기의 눈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두 살이 되던 해 어느 밤, 나는 방 안에서 처음으로 그것을 보았다. 잠들기 직전, 시야 한 귀퉁이에 흐릿한 청백색 문자열이 떠올랐던 것이다. 처음에는 눈의 피로려니 했지만, 그 문자열은 점점 또렷해지면서 내 눈앞에 완전한 형태로 고정되었다. [강도현] [나이: 2세] [MP: 12/12] [영력: 0/0] [음양술: 0]. 나는 그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이건 명백히 게임 속 상태창이었다. RPG 스테이터스 창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고 있다니, 이건 반칙이 아닌가. 나는 문자열을 몇 번이고 눈으로 훑었다. 이름 옆의 나이는 정확했고, 영력이라는 항목은 분모와 분자가 모두 0으로 찍혀 있어서 마치 존재하지 않는 능력치처럼 보였다. 음양술 항목은 숫자 하나만 덜렁 박혀 있을 뿐, 등급이나 설명 같은 부가 정보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설명서도 없이 이런 걸 던져주면 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그 문자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노력하면 반드시 보상받는다.' 서른둘 평생 나를 배신했던 그 문장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숫자로 증명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갓난아기 시절 내내 억눌러왔던 흥분이 한꺼번에 치솟아서,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이 세계에서 내가 뭔가 다른 존재라는 걸 함부로 드러내면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그 순간에도 작동했으니까. 두 살짜리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발광하면 부모 입장에선 병원에 데려갈 노릇이지, 축복이라고 여길 리가 없다. 나는 이불 속에서 조용히 숨을 몰아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나는 그 상태창을 몇 번이고 다시 불러내려 애썼다. 눈을 감고, 뜨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온갖 시도를 해봤지만, 그것이 다시 떠오른 건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였다. 방구석에 놓인 나무 딸랑이를 손에 쥐려다가 놓친 순간, 시야 구석에 문자열이 다시 반짝였다. [MP: 12/12]. 나는 그 즉시 딸랑이를 다시 놓쳐보았다. 문자열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번엔 일부러 손을 떨어보았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감정이 요동칠 때, 특히 놀람이나 당혹감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반응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는 것. 어떤 조건에서 이게 나타나는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감정이나 집중력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이후로 매일 밤, 몰래 이 문자열을 관찰하는 걸 취미로 삼았다. 낮에는 갓난아기답게 젖을 물고 울고 웃는 시늉을 하다가, 밤이 되어 방 안에 아무도 없을 때만 조용히 눈을 감고 감정을 흔들어보았다. 일부러 무서운 상상을 하거나, 전생의 부끄러웠던 기억을 끄집어내며 낯을 붉히듯 감정을 요동치게 만들면 문자열이 뜨는 확률이 조금 더 높아지는 것 같았다. 서른둘 어른이 두 살짜리 몸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흑역사를 재생하며 상태창을 관찰하는 꼴이라니, 누가 보면 정신병자로 오해할 만한 그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이보다 절실한 놀이가 없었다. '음양술 0'이라는 수치가 마음에 걸렸다. 이 세계 사람들은 대부분 음양술이라는 걸 다룬다고 했는데, 내 수치는 0이었다. 하녀들이 부적을 손에 쥔 채 낮게 읽는 문구를 어깨너머로 몇 번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그들의 손끝에서 옅은 빛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게 바로 음양술이라는 것이겠거니, 나는 짐작했다. 나에게는 그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만 있는 것 같은 MP라는 수치가 존재했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걸까. 나 혼자만 다른 규칙으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뜻인가, 아니면 단순히 아직 발현되지 않은 잠재력에 불과한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에 쌓여갔지만, 그 답을 찾기 위해선 먼저 이 세계의 규칙을 제대로 배워야 했다. 서른두 해를 살면서 배운 게 있다면, 정보가 없을 때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일단 관찰부터 하라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는 말도 못 하고 걷지도 못하는 갓난아기였지만, 적어도 눈과 귀는 성인의 사고를 그대로 담고 있었으니, 그 무기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당에서 나를 안고 산책시키던 어머니 이수아가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볕이 좋은 오후였고, 마당 한켠에 심어진 향나무에서 옅은 향기가 실려 왔다. 그녀는 평소처럼 낮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흥얼거리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노래가 끊기고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 시선이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무는 걸 느끼며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설마 눈치챈 건가.' 심장이 갓난아기의 작은 가슴팍 안에서 미친 듯이 두들겨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초점을 풀고, 흐릿하게 시선을 흩트리며 아기다운 눈빛을 만들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연기가 서른두 해 사회생활을 한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 리 없었고, 하물며 상대는 갓난아기의 눈빛 하나하나를 매일 들여다보는 어머니였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볼을 가볍게 쓸었다. 그 손끝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던 건, 아마 내 쪽의 긴장이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 탓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현이는 참 눈이 깊구나. 아기가 아닌 것처럼." 그 말에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낌과 동시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깜빡였다.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그 몇 초가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이어서 무슨 말을 할지, 혹시 집사를 불러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라 명할지, 온갖 최악의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그녀는 별다른 의심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치 방금 한 말이 그저 어미가 아기를 보며 흔히 하는 감상 정도였다는 듯, 다시 나긋한 자장가를 흥얼거리며 마당을 걸었다. 나는 그녀의 품 안에서 흔들리며, 겨우 가라앉은 심장 박동을 다시 확인했다. 다행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표정과 시선을 관리하는 데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머니는 나를 매일 안고, 매일 들여다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눈을 계속 속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오래 숨겨야 한다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세운 첫 번째 생존 전략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그 전략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확신할 수 없다는 불안도 함께 품게 되었다. 눈이 깊다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 사람을 서늘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이불 속에서 조용히 감정을 흔들어 상태창을 불러냈다. [MP: 12/12]. 숫자는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그 숫자를 들여다보며 다른 생각에 잠겼다. 이 MP라는 것이 언젠가 무언가로 이어질 거라면, 그리고 이 세계의 음양술이라는 힘이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 방식이라면, 나는 대체 무엇으로 살아남아야 하는가.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어머니의 시선이 오늘처럼 계속 나를 향한다면, 언젠가는 숨기는 것보다 드러내야 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 그 순간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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