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어둠 속에서 나는 몸이 없는 감각을 느꼈다. 팔도 다리도, 심지어 심장이 뛰는 감각조차 사라진 채, 나는 그저 하나의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듯한 기묘한 부유 상태에 놓여 있었다. 손끝이 있어야 할 자리를 더듬어보려 했지만, 더듬을 손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죽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는 허탈함이 먼저 밀려왔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 흔한 마지막 대사 한 줄도 못 남기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사방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공간은 이제까지 본 어떤 것과도 달랐다. 백색의 대리석 같은 바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그 바닥 위로 붉은빛을 띤 문양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는데, 그 문양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그것은 글자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마치 핏줄이 바닥에 새겨진 것처럼 유기적으로 뻗어 있었다. 공간 자체에는 벽도 천장도 없었고, 그저 무한히 이어지는 백색과 붉은빛의 대비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발을 딛고 있다는 감각조차 없는데도 어째서인지 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공간의 법칙이 내가 알던 세계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이벤트인가.'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그 순간 시야 정면에 거대한 문자열이 떠올랐다.
[시스템 코어 접속 감지] [비정상적 존재 확인: 강도현] [권한: 미분류]
그 문구를 읽는 순간,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낌과 동시에, 이 공간이 단순한 죽음의 저편이 아니라 뭔가 더 근원적인 장소라는 확신이 들었다. '비정상적 존재라니, 참 정직하게 말해주는군.' 나는 그렇게 자조하면서도, 이 상황을 최대한 냉정하게 받아들이려 애썼다. 살면서 별별 이상한 상황을 다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그 목록에 새로 한 줄을 추가해야 할 것 같았다. 문자열은 곧이어 깜빡이듯 흔들리다가, 마치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듯 잠시 멈춰 있었다. 그 정적이 오히려 더 불길했다.
붉은 문양들이 갑자기 바닥에서 솟아올라 내 주위를 감싸며 회전하기 시작했고, 그 회전이 점점 빨라지면서 문양 하나하나가 글자처럼 재조합되어 갔다. 마치 수천 개의 실이 동시에 풀렸다가 다시 얽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눈으로 좇으려 했지만, 속도가 너무 빨라서 중간부터는 그저 붉은 궤적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스킬 발현 조건 충족] [주각(呪刻) 각성] [마상(魔傷) 각성]
나는 그 문구들을 보며 심장이 없는 몸으로도 쿵쾅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심장도 없는데 심장이 뛴다니, 이건 또 무슨 모순인가. 주각과 마상.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스킬이었다. 어머니에게도, 세상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명칭이었다. 게임이었다면 나는 이 이름들을 검색창에 넣어보고 공략 카페부터 뒤졌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낯설었다. 이 세계에는 공략도 없고, 나보다 앞서간 사람도 없었다. 있다면 그건 나 혼자였다.
문양들이 마지막으로 하나의 거대한 원형으로 응축되며, 내 눈앞에 낯선 문신 같은 각인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살갗 위에 새겨지는 감각으로 다가왔는데, 왼쪽 손목 어딘가에서 타는 듯한 뜨거움이 느껴졌다. 몸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통증만은 정확하게 실감났다. '이거 진짜 아프잖아.' 나는 그 통증에 이를 악물면서도, 동시에 이 각인이 앞으로 내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무언가라는 직감을 떨칠 수 없었다. 뜨거움은 곧 저릿한 감각으로 바뀌었고, 그 저릿함은 뼈를 타고 올라오는 듯한 이상한 진동으로 이어졌다. 마치 몸속에 무언가가 자리를 잡는 것 같은, 낯설고도 확고한 감각이었다.
각인이 완성되자, 공간 전체가 서서히 붕괴하듯 흐려지기 시작했고, 백색 바닥이 갈라지며 그 틈으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빛에 몸이 서서히 끌려 들어가는 걸 느꼈는데, 저항할 힘도 없었고 저항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벗어나야 살든 죽든 결론이 날 것 같았으니까. 마지막으로 시야에 남은 문구는 이거였다.
[모든 정보는 각성자 본인 외 열람 불가]
'그럼 이 스테이터스 창은 나만 볼 수 있다는 뜻이군.' 나는 그 사실을 곱씹으며 완전히 빛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스킬 이름이라도 좀 근사했으면 좋았을 텐데. 주각이니 마상이니, 어쩐지 저주받은 느낌이 물씬 나는 이름들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익숙한 천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내 방이었다. 익숙한 벽지의 얼룩, 천장 모서리에 낀 오래된 곰팡이 자국까지도 그대로였다. 몸은 온통 나른한 통증으로 뒤덮여 있었고, 어깨에는 붕대가 단단히 감겨 있었는데, 그 통증조차 지금은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져서 이상하게 반가웠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이렇게 아플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제야 새삼 깨달았다. 창밖으로는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고, 그 빛 속에서 먼지가 느리게 떠다니는 게 보였다. 평범하고, 따뜻하고, 조금 전까지 겪은 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침대 옆에는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눈가가 붉게 부어 있었고, 표정에는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피로함과 안도감이 뒤섞여 있었다. 손에는 물수건을 든 채였는데, 아마 내가 눈을 뜨기 전까지 몇 번이고 내 이마를 닦아냈을 것이 분명했다. "도현아."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 내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손길에 눈물이 핑 도는 걸 억지로 참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저 괜찮아요, 엄마."
그 말에 그녀는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낮게 되물었다. "그때, 손끝에서 빛이 났었어. 그거… 뭐였어?" 그 질문에 나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방금 전까지 겪은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그녀의 저 한마디로 확인받은 셈이었다. 어디까지 본 걸까. 얼마나 본 걸까. 머릿속으로 온갖 가능성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이 상황을 넘길 수 있을까.' 네 살짜리 어린애의 머리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대답을 하면 곤란했다. 최대한 어리숙하게, 최대한 겁먹은 것처럼 보여야 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무섭고 아팠는데 손이 저절로 그랬어요." 최대한 순진한 아이의 어조를 흉내 내며 대답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눈은 여전히 내 손목 근처를 향해 있었고, 나는 그 시선이 붕대 아래를 꿰뚫어보려는 것 같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애써 숨을 고르게 쉬려 노력했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 같아서, 혹시 이 소리가 어머니에게도 들리는 건 아닐까 하는 실없는 걱정까지 들었다. 그녀는 결국 옅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아직 어리니까."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숨은 미세한 그늘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건 안심하는 웃음이 아니라, 애써 안심하려는 웃음이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수건을 다시 적셔오겠다며 방을 나선 뒤, 나는 이불 속에서 왼쪽 손목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붕대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아래 분명히 새겨진 낯선 문양의 감각이 아직도 손목 피부 위에서 은은하게 저릿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붕대 위를 살짝 눌러보니, 마치 그 안에서 무언가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미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 각인과 스킬을 어머니에게, 아니 이 세계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들었다.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아직 다 파악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했다.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 그건 지난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그리고 그 확신과 동시에, 나는 방문 밖 복도에서 낮게 오가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문틈을 타고 또렷하게 흘러들어왔다. 하나는 어머니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좀처럼 들을 일 없던, 낮고 무거운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 아이, 다시 검사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강태오의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한층 가라앉은,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어조였다. 나는 이불 속에서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저릿한 감각이 손목에서부터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