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편의점 유리창에 붙은 헤드라인을 확인하겠다는 계획은, 결국 그 문턱을 넘지도 못한 채 무산됐다.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순간, 카운터 안쪽에서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유심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었는데, 그 눈빛의 온도가 손님을 대하는 온도가 아니라는 걸 나는 즉각적으로 알아챘다.
그제야 자각이 왔다. 아, 나 지금 몰골이 영락없는 노숙자꼴이구나.
젖은 옷에 흙먼지가 켜켜이 눌어붙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꾀죄죄한 아이 하나가 편의점 앞을 배회하고 있으니, 이건 누가 봐도 신고 대상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의 손이 슬그머니 카운터 아래로 향하는 걸 보고 나는 재빨리 발걸음을 돌렸다. 저 손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 몸부터 좀 정리하자." 나는 은서에게 말했고, 근처에 눈에 띈 공중화장실로 들어가 대충 씻어냈다. 세면대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불평할 처지도 아니었다. 흙먼지를 씻어내고 젖은 옷자락을 손으로 짜내는 동안,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수염은 며칠째 방치된 듯 거칠었고, 눈 밑은 퀭했다. 이세계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한 몰골을 하고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세계를 넘어오는 것 자체가 사람 하나를 이렇게 망가뜨려놓는구나 싶었다.
다시 시내를 걸으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계획이라는 걸 세워보려 했다. 신원증 없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뭐부터 확보해야 하는가, 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지긋지긋한 질문이었다. 통장도 없고, 신분증도 없고, 심지어 이 나라의 법이 나를 어떤 존재로 취급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계획이라는 걸 세운다는 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지도 동시에 깨달았다.
그래도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이세계에서 익힌 것들이 이 세계에서도 온전히 작동하는지, 그 여부부터였다. 만약 능력이 죽었다면 나는 그냥 노숙자꼴을 한 불법체류자에 불과했고, 능력이 살아있다면 적어도 뭔가 해볼 구석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골목 안쪽,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들어가 나는 손을 들어 허공에 작은 균열을 그었다.
파앗.
짧은 소리와 함께 손끝에서 손바닥만 한 공간이 열렸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예전부터 넣어뒀던 단검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손잡이의 감촉, 칼날에 새겨진 흠집 하나까지 그대로였다.
'이게, 되네...?'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공간 조작이 세계를 넘어와서도 똑같이 작동한다는 건 이론적으로는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고 나니 느낌이 또 완전히 달랐다. 마치 이삿짐을 미리 다른 집에 부쳐놓았는데, 그 집 문을 열었더니 짐이 고스란히 그대로 있는 걸 확인한 기분이었다. 안도감과 황당함이 반씩 섞인, 묘한 감정이었다.
이어서 진안을 켰다. 시야가 살짝 뒤틀리는 느낌이 들면서 골목 저편에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취객의 몸에서 흐릿한 문양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것을 읽어내리자, 그 사람이 최근 며칠간 얼마나 잠을 못 잤는지, 심장이 얼마나 약해져 있는지, 심지어 위장 어디쯤에 염증이 자리 잡고 있는지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진안(眞眼) - 대상의 상태와 이력 일부를 열람합니다.]
라는 메시지가 시야 한켠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시스템 자체가 이 세계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이거 완전 개사긴데?'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찬물 같은 현실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능력이 살아있다고 한들, 이걸 마음껏 써먹을 판이 이 세계엔 없었다.
당장 생각해봐도 그랬다. 은행에 가서 계좌를 만들려 해도 신분증이 필요했고,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려 해도 4대보험이니 신원 확인이니 하는 절차가 줄줄이 따라붙었고, 심지어 하루 묵을 숙소를 잡으려 해도 투숙객 명부에 이름과 주민번호를 적어야 했다. 검이나 마법 따위는 이 세계의 어떤 서식에도 기입할 칸이 없었다.
요컨대 이 세계는 능력보다 서류가 더 강한 무기인 곳이었다. 몬스터를 썰어 죽이는 재주보다, 도장 하나 찍힌 종이 한 장이 훨씬 값어치가 높은 세계.
"돈이 필요해." 나는 중얼거렸다. 당장 밥을 먹으려 해도, 잠을 자려 해도, 뭘 하려 해도 결국 필요한 건 돈이었다. 이세계에서는 몬스터의 코어 하나면 몇 달을 먹고살았는데, 여기서는 그런 코어를 아무리 들고 다녀봐야 길거리 돌멩이보다 나을 게 없었다.
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손끝으로 골목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 하나를 가리켰다.
"물질 생성으로 만들면 되잖아요."
그 말에 나는 잠깐 멍해졌다가, 이내 무릎을 쳤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이세계에서 지겹도록 써먹었던 스킬인데, 여기서도 쓸 수 있다는 걸 방금 확인해놓고서도 정작 활용법은 떠올리지 못했다니.
이세계에서 익힌 물질 생성 능력은 순수한 원소를 압축해 실체화하는 방식이었다. 이론상 이걸로 금덩이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금이라는 원소 자체가 그렇게 복잡한 구조를 가진 것도 아니었으니.
손바닥 위에서 마나를 끌어모으자 노란 빛이 뭉치듯 응축됐다. 빛이 점점 밀도를 더해가더니, 곧 손바닥만 한 금괴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끝에서부터 느껴졌다.
[물질 생성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마나 소모량: 320]
금을 만드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순도 99.99퍼센트짜리 금괴를 만드는 데 마나 320이면 오히려 싼값이라고 해야 할까. 문제는 이걸 어디서, 어떻게 파느냐였다.
정상적인 금은방이라면 신원 확인은 물론이고, 출처가 불분명한 금괴에는 세관이나 경찰이 붙을 게 뻔했다. 갑자기 순도 100퍼센트짜리 금괴를 들고 와서 팔아달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신고당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유통망은 못 쓴다는 소리인데.'
그 결론이 자연스레 따라붙었고, 그 뒤에 이어지는 선택지는 사실상 하나뿐이었다. 신원을 따지지 않고, 출처를 따지지 않고, 대신 그만큼 위험한 값을 치르는 곳으로 가는 것.
요컨대 언더월드였다.
"...더럽게 쓸모없네, 이 세상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금괴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묵직한 무게가 주머니 안쪽을 축 늘어뜨리는 게 느껴졌는데, 그게 마치 앞으로 내가 짊어질 위험의 무게를 미리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은서는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통영으로 가죠." 은서가 말했다. 그 말투가 지나치게 확신에 차 있어서,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거기 뭐 아는 거 있어?"
"제가 이 나라에 살았을 때, 통영 쪽에 그런 부류들이 많이 몰려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으니까요."
은서는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이세계의 황제였고 수백 년을 살아온 존재였는데, 어느 시점엔가 한국에서 살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게 늘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수백 년을 산 존재가 한국에서의 삶을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지만, 지금까지 겪어온 것들을 생각하면 상식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부터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 기억이 어디서부터 진짜고 어디까지가 착각인지, 나는 아직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면 뭔가 더 복잡한 이야기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지금 당장은 그럴 여력도 없었고.
"그럼 일단 거기 가서 사람 좀 만나보자." 나는 결정을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역마는 내 어깨 위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방향을 확인하듯 두리번거렸는데, 그 조그만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잠깐이지만 마음이 조금 놓였다. 적어도 이 낯선 세계에서 나 혼자만 덩그러니 떨어진 건 아니라는 사실이, 지금은 무엇보다 큰 위안이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 나는 주머니 속 금괴의 무게를 다시금 실감하며 이게 앞으로 얼마나 위험한 대가를 부를지 가늠해봤다. 통영이라는 지명도 낯설었고, 그곳에서 만날 '그런 부류'라는 사람들이 어떤 인간들일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봐도 그 상상력의 한계 안에서만 최악일 뿐, 실제로는 그보다 더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정류장 전광판에 뜬 뉴스 자막 하나가 눈에 들어와 발걸음이 다시 얼어붙었다.
'8년 전 실종된 20대 남성,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유전자 데이터베이스 등록 완료'
라는 문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