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야, 저거 진짜 지린 거야?"
누군가의 외침에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번졌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귓속이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운동장 한복판, 수십 개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움직여야 해. 움직여야 하는데…)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는 여전히 축축했고, 그 감각이 나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바지 자락에서 흘러내린 물기가 운동화 안으로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차가운 건지, 뜨거운 건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와, 냄새."
누군가 코를 막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비웃음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누군가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고, 또 누군가는 옆 사람의 옷을 잡아당기며 웃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하려는 학생도 보였다.
액정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이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안 돼… 찍지 마…)
나는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온몸이 부끄러움으로 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정작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때였다.
쿵.
둔한 소리가 들렸다.
촬영하려던 학생의 손에서 스마트폰이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액정에 금이 가는 소리가 작게 났다.
김민재가 그 학생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찍으면 죽는다."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위협적인 기운이 그 말투에 담겨 있었다.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웅성거림이 뚝 끊겼다.
바람 소리마저 멈춘 것 같은 정적이었다.
민재는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서늘했다.
"더 웃을 사람 있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비웃던 학생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몇몇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던 학생은 몸을 웅크리며 그대로 무리 속으로 숨어들었다.
민재는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것만으로 남아있던 웅성거림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그 정적을 깨려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사람들의 다리가, 운동장의 흙바닥이, 하늘의 색이 뭉개진 물감처럼 섞여 보였다.
(정신을 잃으면 안 돼…)
하지만 그 생각과 동시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도현아, 나야. 서준이야."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박서준의 팔이 내 등을 받치고 있었다.
그 팔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이상하게도 선명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마치 세상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신처럼 들렸다.
"내가 업고 갈게. 조금만 참아."
서준은 나를 등에 업으며 몸을 일으켰다.
등에 업힌 채로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주변 학생들의 얼굴이 하나씩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여전히 눈을 피했고, 누군가는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정신을 놓았다.
의식이 흐릿하게 멀어지는 와중에도, 서준의 등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만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온기가 마치 세상에 남은 유일한 진짜 감각 같았다.
(고마워… 서준아…)
그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보건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밖으로 붉은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이었다.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침대 시트 위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여기가… 보건실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서준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표정에는 안도와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의자를 얼마나 오래 지키고 있었는지, 다리를 살짝 떨고 있는 것도 보였다.
"교복은 내가 새 걸로 가져다 놨어. 보건 선생님한테 부탁했고."
서준이 옆의 새 교복을 가리켰다.
개어진 교복 위에는 아직 세탁소 라벨이 붙어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목이 메었다.
말을 하려 해도 목구멍 안쪽이 뜨겁게 조여드는 느낌뿐이었다.
"민재는?"
겨우 물었다.
"교문 앞에서 그 애들 다시 못 까불게 정리 좀 하고 있어. 곧 올 거야."
서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말투에는 별일 아니라는 듯한 여유가 배어 있었지만, 나는 그게 오히려 더 미안하게 느껴졌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 그 순간의 감각이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고마워, 서준아."
겨우 그 말을 꺼냈다.
서준은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며 웃었다.
"고맙긴. 우리가 친구잖아."
그 짧은 말이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온전히 의지한 게… 얼마 만이지.)
낯선 결핍감이 가슴 한구석에서 조용히 피어올랐다.
부모님도, 누나도 늘 바빴고, 나는 스스로 알아서 해왔다.
아플 때도, 넘어졌을 때도, 늘 혼자 일어서는 게 익숙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완전히 기대고 있었다.
그 감정이 낯설고도 이상하게 따뜻했다.
동시에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약한 모습을 다 보였다는 사실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겁게 다가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민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리 끝났어. 아무도 더 말 안 나올 거다."
그는 짧게 말하고는 침대 옆에 섰다.
안경알에 아직 붉은 저녁 햇살이 비쳐 반짝였다.
"괜찮아?"
민재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스며 있었다.
평소의 서늘한 말투와는 조금 다른, 낮게 가라앉은 어조였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너희 덕분에."
민재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 새끼들,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때는 이 정도로 안 끝나."
낮게 내뱉은 그 말에는 숨길 수 없는 날이 서 있었다.
서준이 픽 웃으며 그 어깨를 툭 쳤다.
"살인 예고는 좀 참아라."
"예고 아니고 예정이야."
둘 사이의 가벼운 농담에도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함께 있어주는 두 사람의 존재만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창밖의 붉은빛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운동장 쪽에서 아이들의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가, 곧 멀어졌다.
하루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벌어진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그 웅웅거리는 웃음소리와, 차갑게 젖어드는 다리의 감각이 다시 되살아날 것만 같았다.
(한소은은… 이제 나를 어떻게 볼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가슴 한쪽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소은이 그 자리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만약 있었다면, 그 애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오래 붙잡을 여유가 없었다.
몸이 이상하게 무겁고 나른했다.
집에 가서 씻고 쉬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복도 저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보건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