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잠 못 든 밤, 검이 빛나다

1화

새벽 네 시. 흑구 길드 지하 3층 장비 대기실.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갈아달라고 말한 지 벌써 석 달째였는데, 총무팀은 예산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처음엔 나도 몇 번 더 요청했지만, 세 번째 요청서를 반려당한 뒤로는 그냥 포기했다. 이 지하 3층에 형광등을 갈아줄 만큼의 예산이 회사에 없다는 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걸 따지고 들 만큼의 힘이 남은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 깜빡이는 불빛 아래서 검집을 손질하며, 오늘도 집에 못 들어간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2주째였다. 집에 못 들어간 지 2주, 하루 수면 시간 평균 2시간, 그사이 처치한 몬스터 수는 헤아리기도 지겨워졌다. 계산하는 버릇이 있는 나는 이런 순간에도 자동으로 숫자를 굴렸는데, 하루 2시간씩 자면서 14일을 버텼으니 누적 수면 부족은 대략 168시간, 그러니까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7일치 잠을 완전히 걸러낸 셈이었고, 그 계산이 끝나자마자 눈두덩이 뜨겁게 조여드는 걸 느꼈다. 손끝이 저릿했다. 검집의 죔쇠는 늘 세 번째 나사부터 헐거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제조사에 문의해봐도 별다른 답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삼 년째 그 나사만 따로 조이는 버릇이 생겼다. 손에 익은 동작이었다.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헌터 등급표를 다시 확인했다. 이 세계에서는 사람이든 몬스터든 등급이 매겨졌다. S, A, B, C, D. 몬스터의 위험도와 헌터의 전투력을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 있게 만든 이 시스템은, 정부가 던전 관리를 민간 길드에 하청 준 뒤로 더욱 노골적으로 상업화되었는데, 등급이 높을수록 사냥 단가가 뛰었고 그만큼 배분되는 몫도 갈렸다. 등급 산정 방식은 겉으로는 공정해 보였다. 전투 데이터, 처치 기록, 부상률, 생존 기간까지 다 계량화해서 점수를 낸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그 점수를 누가 매기느냐가 훨씬 중요했다. 흑구 같은 하청 길드에 소속된 헌터는, 등급 심사 자료를 회사가 제출하는 순간부터 이미 손해를 보게 되어 있었다. 회사가 굳이 실적을 낮게 보고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등급이 낮아야 인건비 단가가 싸졌다. 나는 서류상 B급 헌터였다. B급이라는 등급이 붙은 사람에게 S급 드래곤 사냥을 시키는 회사는, 적어도 이 나라에는 흑구 길드 하나뿐이었다. 정부 하청 던전은 등급 규정이 느슨했고, 흑구는 그 틈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노르마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폭군 드래곤 3, 오거 5, 바질리스크 2, 잡몹 처리는 무제한. 기한은 오늘 자정까지. S급 셋을 하루 안에 처리하라는 노르마였다. 이 노르마표를 처음 받았을 때, 나는 웃었다. 진짜로 웃었다. 이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부대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삼 년을 하다 보니 웃음이 사라지고 계산만 남았다. S급 하나를 잡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 이동에 드는 시간, 회복에 드는 시간을 다 합치면 오늘 하루는 스물두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었다. 여유는 두 시간뿐이었고, 그 두 시간 안에 잡몹까지 처리해야 했다. 곽 팀장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항상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는데,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마 아무것도 안 들었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언젠가 그 서류철이 열린 걸 본 적이 있었는데, 안에는 구겨진 영수증 몇 장과 볼펜 한 자루뿐이었다. "도현아, 뭐하노. 시간 없다 아이가." 그가 서류철로 벽시계를 가리켰다. 나는 검집의 마지막 죔쇠를 조이며 대답했다. "곧 들어갑니다." "곧이 아이라 지금 들어가야지. 위에서 아침 회의 전에 노르마 완수 영상 뽑아 오라 캤다." 위에서, 라는 말에는 항상 얼굴이 없었다. 나는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진짜로 지시를 내린 사람의 얼굴을 궁금해했지만, 이 회사에 입사한 삼 년 동안 그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곽 팀장 위에는 부장이 있고, 부장 위에는 이사가 있고, 이사 위에는 또 누가 있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위에서, 라는 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인격체처럼 회사 안을 떠돌아다녔다. 곽 팀장의 미안하다는 말에는 미안함이 한 톨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내가 늦는 걸 자기 상사에게 혼날 일로 여기고 있었고, 그 조바심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났다. "압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정제된 대답. 어차피 이 사람과 나눌 말은 그 이상 없었다. 삼 년 전의 나는 지금과 달랐다. 신인 헌터 랭킹 3위. 데뷔 첫 달에 A급 던전을 솔로로 클리어해서 업계 소식지에 작게 실린 적도 있었다. 그때는 스카우트 제안이 몇 건 들어왔고, 몇몇 큰 길드는 내게 계약금을 제시하기도 했었는데, 나는 그중 가장 안정적으로 보이는 흑구를 골랐다. 정부 하청이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감 때문이었다. 그때 제안을 넣었던 다른 길드 중 하나는 지금도 방송에 자주 나온다. 그 길드 소속 헌터들은 던전 클리어 실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팬클럽이 생기고, 광고 계약을 맺는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헌터 하나는 요즘 화장품 광고에 나온다는 걸 우연히 편의점 잡지 표지에서 봤다. 그 얼굴을 보면서 나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배 속 어딘가가 조용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선택이 삼 년 만에 사람을 이 지하 대기실 형광등 아래로 데려다 놓았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랭킹은 실적이 아니라 노출 빈도로 산정되었고, 흑구는 정부 하청 업무의 보안 등급이 높다는 이유로 나를 방송이나 인터뷰에 한 번도 노출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나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나는 서서히 지워졌고, 나조차도 스스로가 한때 랭킹 3위였다는 사실을 잊고 지내는 날이 늘어갔다. 알아도 소용없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순간, 랭킹이나 실력 같은 건 노르마표 위의 숫자로만 환산되었으니까. 이 사실을 나만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이 회사에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곽 팀장도 몰랐고, 인사팀도 몰랐다. 그들은 그저 위에서 내려온 숫자를 관리할 뿐이었다. "드론은 챙겼재?" 곽 팀장이 물었다. 나는 장비함에서 손바닥만 한 드론을 꺼내 배낭 옆주머니에 꽂았다. 이 드론은 노르마 완수 영상을 자동으로 회사 서버에 전송하는 감독용 기계였는데, 그 존재 자체가 나에 대한 회사의 불신을 상징했다. 서버에 전송된 영상은 인사팀이 확인하고, 노르마 미달 시 급여에서 벌점을 매겼다. 계산은 간단했다. S급 하나 미처리당 벌점 삼십만 원, 세 마리를 다 놓치면 구십만 원이 그대로 깎였다. 이번 달 월급의 삼분의 일이었다. 그 벌점 기준표도 처음엔 이렇지 않았다. 입사 첫해에는 벌점이 십만 원이었는데, 재작년에 한 번, 작년에 또 한 번 인상되었다. 인상 공지는 항상 사내 게시판 구석에 조용히 올라왔고,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 항의할 창구 자체가 없었으니까. 노조는 없었고, 헌터 개개인은 회사와 일대일로 계약을 맺는 개인사업자 신분이었다. 개인사업자라는 이름 뒤에는 최저임금도, 산재보험도, 휴일수당도 없었다. "설정은 항시 켜져 있재? 확인해라." 곽 팀장이 재차 물었다. 나는 드론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조그맣게 뜬 설정 목록이 눈에 들어왔는데, 나는 그걸 대충 훑고는 익숙하게 첫 번째 항목을 눌렀다. 매번 하던 동작이었다. 순서도 늘 같았다. 전원, 촬영 시작, 전송 채널 선택. 그런데 오늘은 목록의 순서가 조금 달랐다. 어제 업데이트가 있었다는 사내 공지를 얼핏 본 기억이 났다. 나는 그 공지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 읽을 시간이 없었다. 공지 제목만 스치듯 봤는데, '드론 소프트웨어 v3.2 업데이트 안내'라는 글자가 어렴풋이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그 밑에 뭐가 적혀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목록 순서가 바뀐 걸 눈치챘으면서도,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항목 이름은 똑같았으니까. 전원, 촬영, 전송. 순서만 바뀐 거라면 상관없었다. "들어간다." 나는 곽 팀장에게 말했다. 그는 서류철을 옆구리에 다시 끼우며 손을 흔들었다. "고생해라. 저녁 회식은 없다, 알제."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그 말을 뒤로하고, 나는 던전 게이트 쪽으로 걸었다. 게이트는 정부가 관리하는 균열의 입구였는데, 이 시간대 이용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복도를 걸으며 나는 오늘의 순서를 다시 정리했다. 첫 번째 폭군 드래곤은 던전 초입에서 가장 가까운 서식지에 있고, 거기까지 이동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대략 삼십 분. 전투에 필요한 평균 시간은 한 시간 반. 회복에 필요한 최소 시간은 십오 분. 이런 식으로 오거 다섯, 바질리스크 둘까지 더해 놓으면, 자정까지 남는 여유 시간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계산은 늘 정확했다. 문제는 계산이 어긋나는 순간이 항상 있다는 것이었다. 게이트 앞에 도착했을 때,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균열 특유의 냄새, 쇠와 습기가 섞인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삼 년째 맡아온 냄새였는데, 오늘은 그게 유난히 진하게 느껴졌다. 잠이 부족해서 감각이 예민해진 걸 거라고, 나는 그렇게 넘겼다. 손끝으로 검자루를 만지며, 나는 오늘 처치해야 할 목록을 다시 떠올렸다. 폭군 드래곤 셋, 오거 다섯, 바질리스크 둘. 숫자로만 보면 무겁고 위험한 목록이었지만, 나는 이미 이 정도 목록을 몇 번이나 치워봤는지 셈할 수 있었다. 셈은 금방 나왔다. 문제는 몬스터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자정까지 저 숫자를 다 채워야 벌점을 면했다. 게이트 앞에 서서, 나는 드론의 촬영 시작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누르는 손끝에서 아주 작은, 이물감 같은 떨림이 있었다. 그때는 그게 뭔지 알지 못했다. 균열 너머로 발을 들이는 순간, 등 뒤에서 게이트가 낮게 진동했다. 늘 그랬듯 그 진동은 몇 초 만에 사그라들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평소보다 길게, 마치 무언가를 알리듯 이어졌다. 나는 그 소리를 뒤로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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