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잠 못 든 밤, 검이 빛나다

4화

협곡의 끝에는 다시 절벽이 있었다. 지형도를 확인해보니, 왼쪽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폭군 드래곤의 영역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이었는데, 그 길은 절벽 위 좁은 능선을 따라 나 있었다. 던전 지형이 이런 식으로 위험을 배치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접근이 어려울수록 몬스터가 강해지고, 강해질수록 보상 등급도 올라간다는 게 이 던전 시스템의 기본 규칙이었다. 삼 년간 온갖 던전을 돌면서 확인한 바로는, 이 규칙에서 벗어나는 예외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시스템은 정직했다. 사람보다 훨씬. 능선은 폭이 사람 두 걸음 정도였다. 아래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지형도상 표기된 깊이는 대략 천 미터였다. 천 미터라는 숫자를 보며, 나는 반사적으로 그 낙하 시 예상 충격을 계산했다. 자유낙하로 천 미터를 떨어지면 지면 도달 속도는 초당 백사십 미터 안팎, 인체가 받는 충격은 그 즉시 사망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공기저항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낮게 잡아야 했지만, 오차 범위 안에서 결론은 똑같았다. 어느 쪽으로 계산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낙하는 아니었다. 계산은 늘 이렇게 냉정하게 먼저 나왔다.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었다. 나는 능선을 따라 걸었다. 발밑으로 부는 바람이 안개를 밀어냈다가 다시 채워 넣기를 반복했고, 그 사이로 아주 잠깐씩 시커먼 바닥이 보이는 듯도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남은 오거 네 마리는 이 능선 중간에 자리한 넓은 바위 평지에 있다는 게 던전 안내판의 표기였는데, 이런 배치는 흔했다. 좁은 통로를 지나야 하는 지점에 무리 지은 몬스터를 세워 두는 건 던전 시스템의 전형적인 함정이었다. 오거 네 마리가 동시에 몰려온다면, 계산이 조금 달라졌다. 한 마리씩 상대할 때와 넷을 동시에 상대할 때의 체력 소모율은 단순히 네 배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게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었는데, 방어와 회피 동선이 겹치면서 실수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런 좁은 능선에서는 뒤로 물러날 공간조차 없었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오거를 상대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끝이었다. 평지에 다다랐을 때, 오거 네 마리가 이미 나를 발견하고 자세를 잡고 있었다. 덩치가 큰 놈부터 작은 놈까지 순서를 매기며, 나는 어느 놈을 먼저 쓰러뜨려야 나머지 셋의 대응을 흩트릴 수 있을지 순간적으로 셈했다. 답은 금방 나왔다. 가장 큰 놈을 먼저 치면, 무리의 위계 구조상 나머지가 잠시 혼란에 빠진다는 걸 이전 사냥에서 이미 확인한 적이 있었다. 오거는 무리 내에서 서열이 명확한 몬스터였고, 우두머리가 쓰러지는 순간 나머지는 짧게는 이 초, 길게는 사 초 정도 판단이 마비되는 습성을 보였다. 그 틈이 승부를 갈랐다. 가장 큰 놈이 먼저 달려들었다. 나는 그 돌진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몸을 살짝 틀며 놈의 옆구리를 그었다. 검이 지나가는 순간의 감각은 여전히 저항이 거의 없는, 익숙한 매끄러움이었다. 오거의 가죽은 두껍기로 유명했지만, 정확한 각도로 들어가면 종이를 가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각도를 찾는 데 걸린 시간이 지금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놈이 쓰러지며 나머지 셋의 발걸음이 잠시 흐트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검격을 이어갔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생각은 그 뒤를 따라가는 순서였다. 두 번째 놈은 목을, 세 번째 놈은 무릎 뒤 힘줄을 노렸는데, 그건 부위별로 방어력이 다르다는 걸 오래전부터 몸으로 익혀둔 결과였다. 마지막 남은 놈은 도망치려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 능선에서는 도망칠 공간이 없었다. 네 마리를 모두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삼 분이 되지 않았다. 트루캐스트 채팅창은 이제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폭주하고 있었다. 시청자 수는 이십만을 넘어섰고, 실시간 방송 순위는 전체 1위로 올라섰는데, 인기 헌터 방송들도 감히 넘보지 못하던 순위였다. 몇몇 유명 헌터들이 자기 방송에서 이 영상을 캡처해 화면에 띄우며 '이거 진짜냐'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 순간부터 이 방송은 트루캐스트를 넘어 다른 플랫폼으로도 실시간 캡처되어 퍼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끊어 분석했고, 누군가는 '이 헌터 소속이 어디냐'는 질문을 반복해서 올렸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몰랐다. 오거를 정리한 뒤, 능선을 따라 조금 더 걸었다. 지형이 갑자기 좁아지며, 발밑의 바위가 부서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손끝에 스치는 미세한 진동이 있었다. 나는 그게 지반이 무너지는 조짐이라는 걸 알아챘지만, 알아챈 순간에는 이미 발밑의 바위가 완전히 깨져 있었다. 진동을 감지하고 반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인간의 신경계 기준으로는 이미 늦은 시점이라는 걸, 그 짧은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계산하고 있었다.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두려움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낙하 높이 천 미터, 낙하 속도 초당 백사십 미터, 도달까지 예상 시간 십사 초 안팎. 그 십사 초 안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게 유일한 셈이었다. 두려움이 끼어들 자리는 그 계산이 이미 다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낙하 중에 검을 협곡 벽에 꽂았다. 검이 암벽에 박히는 순간의 마찰음이 귓전을 찢을 듯 울렸다. 손목에 엄청난 부담이 걸렸고, 손끝이 저릿한 감각을 넘어 아예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검을 놓으면 모든 게 끝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손바닥에서 검 손잡이의 감촉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나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억지로 오므려 검을 붙들었다. 속도가 줄었지만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 나는 검을 다시 뽑아 몸을 회전시키며, 벽을 발로 밀어차 궤도를 바꿨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암벽의 냉기가 다리를 타고 올라왔고, 그 냉기가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이런 낙하 제어법은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다만 몸이 알고 있었다. 삼 년간 던전에서 굴러다니며 익힌, 매뉴얼에는 없는 감각이었다. 이 감각을 아는 헌터가 이 세상에 몇이나 될지 나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아마 거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낙하 중인 그 짧은 시간에도 스쳐 지나갔다. 지면이 가까워졌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검을 다시 한번 벽에 꽂아 속도를 줄였고, 남은 낙하는 다리로 충격을 받아냈다. 무릎이 꺾이며 지면에 닿는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충격이 있었지만, 뼈가 부러지는 느낌은 없었다. 계산대로였다. 천 미터 낙하 후 두 다리로 서 있는 나. 이 장면이 트루캐스트를 통해 전 세계로 실시간 송출되는 순간, 시청자 수는 삼십만을 넘어 사십만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채팅창에는 '이거 조작 아니면 저 사람 인간 아니다', '헌터 등급 시스템에 이런 등급이 있었어?'라는 말들이 반복해서 올라왔고, 몇몇 시청자는 화면을 정지시켜 캡처한 뒤 그 안에 스치듯 잡힌 정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낙하 궤적을 초 단위로 끊어 분석했고, 어떤 이는 검이 벽에 박히는 각도까지 재보겠다며 화면을 몇 번이고 되돌려 봤다. 드론이 촬영 중이던 화면 한쪽 구석에는, 내가 대기실에서 확인하던 노르마 목록의 잔상이 아주 잠깐 겹쳐 나온 적이 있었다. 폭군 드래곤 3, 오거 5, 바질리스크 2라는 문구와 함께, 하단에 작게 표기된 근무 시작 시각이 함께 노출되어 있었는데, 그 시각을 계산하면 이미 이백 시간 넘게 연속 근무 중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캡처는 순식간에 퍼졌다. '저거 근무 시작 시각 봐라', '이백 시간이 말이 되냐', '흑구 길드 이거 노동법 위반 아니냐' 같은 댓글들이 채팅창을 넘어 다른 커뮤니티로까지 옮겨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 캡처 화면을 확대해 시각을 다시 계산해 올렸고, 누군가는 '이거 실화면 고발감 아니냐'는 댓글을 달았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협곡 바닥에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지면에서 몸을 일으키며,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손목이 아직 저릿했다. 나는 그 저릿함을 통증이 아니라 피로의 신호로 해석했다. 언제나처럼 계산이 먼저였다. 손목의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 그사이 다음 구간까지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 그 둘을 겹쳐 놓고 나는 이동을 우선하기로 했다. 배낭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나는 그걸 느꼈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업무 중에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게 이 회사에서 삼 년째 지켜온 나만의 규칙이었으니까. 배낭 끈을 고쳐 메며, 나는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진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조금 뒤 다시 울렸다. 두 번째 진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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